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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D-37 4 2021.05.06
  7. D-40 2 2021.05.03
  8. 다시 눕눕 4 2021.04.22
  9. 배려 12 2021.03.27
  10. 출근 2 2021.03.06

D-6

from 모퉁이다방 2021. 5. 25. 22:50

 

 

  오늘은 수술 전 마지막 정기검진일. 태동검사를 하고 진료를 봤다. 검사 이십분 여 동안 탕이는 조금씩 꼼지락거렸다. 이런 사랑스런 태동도 이번주가 마지막이다. 사람 많은 토요일보다 그나마 사람이 적은 평일이 병원도 간호사 분도 선생님도 여유로우시다. 선생님은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물으셨다. 아직도 머리가 위에 있을까요? 네, 그런 것 같아요. 역시 탕이는 돌지 않았다. 처음으로 선생님이 진료 외 다른 이야기를 건네셨다. 오늘의 날씨에 관한 것이었는데, 밖의 날씨가 어떤가요? 바람이 많이 불어요. 날씨 때문인지 오늘따라 손이 많이 차가운데 배에 손 올릴 때마다 걱정이 된다고. 선생님이랑도 어느새 팔개월 째다. 다 정상이란다. 오늘은 얼굴을 좀더 자세히 보여 주셨다. 뭔가 저번 진료 때보다 얼굴이 성숙해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입술은 나를 닮았는데 턱 부분은 남편을 닮은 것도 같다. 지난 주에 이어 여전히 탯줄을 목에 감고 있는데 느슨하게 한 번 감고 있어 자세를 돌리면 금방 풀어질 것 같다고 걱정하지 말라 하셨다. 

 

  오늘은 남편이 늦게 출근해도 된다고 해서 병원을 나와 같이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순대국. 탕이는 이제 2.9키로이고, 머리크기며 배둘레가 1주 정도 늦다. 선생님은 다음주면 3키로 조금 넘을 거고 양수양도 충분하니 수술하기 전에 아기 위치를 진료실에서 한 번 보고 올라가자고 하셨다. 31일 월요일에 12시까지 병원에 가야한다. 토요일에 남편과 나는 코로나 검사를 해야하고, 수술은 1시 반에서 3시 반 사이에. 밥을 먹고 각자의 커피를 사들고 집까지 왔다. 남편은 그대로 회사에 갔고 나는 집에 와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들을 검색하고 주문했다. 병원가서 살 것들을 빼면 대충 준비는 끝난 것 같다. 이번주에 빨래를 한두번 더 돌리면 될 것 같고. 친구들의 선물이 택배로 도착하고 있고, 나는 너무너무 고마운데, 이 마음이 온전히 전달될까 싶고. <노매드랜드>를 결제해서 봤는데 영화관에서 큰 화면에 집중해서 봐야했던 영화였다. 아주 큰 스크린 화면에 펼쳐졌으면 정말 멋졌을 장면들이 이어졌다. 

 

  예전에 읽었던 책에 포스트잇을 붙여둔 좋은 구절들을 옮겨 쓰고 있는데, 오늘은 이주란의 소설 <한 사람을 위한 마음>이다. 이 책은 좋았던 단편과 그렇지 않았던 단편이 분명했는데, '한 사람을 위한 마음'과 '준과 나의 여름'이 좋았다. 힘들지만 소중한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준과 나의 여름'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근데 I 말이야. 너무 귀엽지 않았어?

  너도 귀여워!

  우리도 그런 아이 낳을까?

  오늘?

  ......

  오늘 너무 고맙네.

  만약 우리가 아이를 낳는다면 골프연습장은 못 보내겠지.

  그런 걸 뭐 아무나 보내나.

  만약 우리가 아이를 낳는다면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눠 먹고 나눠 쓰며 살아야 하겠지.

  내 거 다 줄게.

  아냐, 아냐.

  우리는 다 마른 발을 포개고 누웠다. 나는 오늘 준이 전에 없이 다정하다고 느꼈다. 왜......라고 생각하며 그의 이마와 손가락 같은 것을 오래 바라보았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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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7

from 모퉁이다방 2021. 5. 24. 13:29

 

 

  지난주에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를 봤다. (영화 스포일러가 있어요) 남편이 갑자기 이 영화를 봤느냐고 물었다. 자신이 아는 대충의 줄거리를 말해줬는데 나는 바로 보자고 했다. 더스틴 호프만과 메릴 스트립이 부부로 나온다. 그들에게는 초등학교 1학년인 아들이 하나 있다. 어느 날 메릴 스트립이 떠나겠다고 한다. 자신을 찾기 위해서. 그동안 회사에 몰두하느라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 더스틴 호프만은 아들을 혼자 키우게 된다. 아내가 떠난 다음 날 프렌치 토스트를 아침으로 만들어달라는 아들의 요청에 고군분투하지만 주방과 음식은 엉망진창이 된다. 그 뒤 그는 차츰차츰 집안일과 아들 돌보는 일에 적응해 나간다. 덕분에 회사에서 맡은 일은 엉망진창이 되어 가고 있었지만, 그에게는 아들 돌보는 일이 더 중요했다. 부족하지만 점점 좋은 아빠가 되어간다. 몇개월 후 메릴 스트립이 돌아온다. 그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았고, 자신이 아들을 충분히 혼자 키울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고. 양육권을 주장한다. 더스틴 호프만은 소중한 아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아들을 돌보느라 회사에서 잘렸지만 양육권을 지키기 위해 연봉이 낮은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새직장을 구한다. 두 사람은 법정에서 다툰다. 결국 메릴 스트립이 양육권을 차지하게 된다. 더스틴 호프만은 받아들인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일어난 두 사람은 아무 말없이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메뉴는 프렌치 토스트. 메릴 스트립이 떠난 다음날 고군분투했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두 사람은 호흡을 맞춰 척척 아침을 준비해나간다. 아들이 커다란 볼에 계란을 포크로 잘 저어주면 아빠가 식빵을 촉촉히 적셔 후라이팬에 얹히고 타지 않게 적당한 때에 잘 뒤집어 준다. 그리고 식탁에서 각자의 읽을거리를 읽으며 따뜻한 아침을 먹는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장면에서 펑펑 울었다. 영화는 점점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이 영화는 더스틴 호프만 입장에서 전개되는 이야기였는데, 메릴 스트립 관점에서 찍는다면 또 다른 영화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점점 나은 사람이 되어가고, 우리 인생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똑같을 거다. 

 

  주말에는 부모님이 결혼식이 있어 올라오셨다. 가족들이 다같이 모였다. 중국집에서 저녁을 먹고 막내동생네로 가서 과일을 먹었다. 엄마는 남편에게 술 한잔 하라고 하고 동생네에서 자고 내일 가라고 했다. 나는 요즘 밤에 잠도 못자고 화장실을 자주 가는터라 다른 사람들이 불편해할거라 했는데 괜찮다고 자고 갔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래서 둘째동생도 남편과 나도 모두 막내동생네서 잤다. 거실에 이불을 펴놓고 모여서 잤다. 결국 나는 새벽 4시까지 잠들지 못하고 힘들어했고 그걸 둘째동생만 지켜봤지만. 다음 날 아침에 김밥을 사와 라면을 끓여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보니 집에 안 가고 하루 자길 잘했다 생각이 들었다. 둘째동생이 커피도 내려줬다. 남편은 동생네서 술 한 잔을 하며 우리 가족이 이렇게 모두 모인 건 처음이다, 너무 좋다, 라고 이야기했다. 나는 남편이 '우리 가족'이라고 말해서 울컥했다. 남편이 엄마 아빠를 장모님 장인어른이라고 하지 않고 어머니, 아버지라고 말해주는 것도 고맙고. 동생네에서 나오며 모두 다음에는 여덟명이서 만나자고 했다. 이제 탕이까지 '우리 가족'이 여덟명이 된다. 아기가 태어나면 가족 모두 조금씩 더 좋은 쪽으로 변화할 거라 믿고 있다. 아, 딱 일주일 남았다. 남편 친구가 아기침대를 물려줘 어제 가져와 조립하고 우리 침대 옆에 뒀다. 아주 조금씩 실감이 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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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0

from 모퉁이다방 2021. 5. 21. 10:30

 

 

  그제 밤 티비를 켜고 누웠는데 오은영 선생님의 <금쪽 수업>이라는 프로그램이 하고 있었다. 네 가지 애착 유형에 대해 설명 중이었다. 안정형, 집착형, 회피거부형, 두려움형. 이 유형들은 내가 남편과 연애 중일 때, 한창 많이 싸우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할 때, 이 연애를 잘 이어나가고 싶어 읽던 책에 있었다. 당시 남편과 내가 안정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로 인해 우리가 오랫동안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았다. 남편 집 앞 커피집에서 그 책을 다 읽었는데 야근을 하고 있는 남편에게 서프라이즈를 하려고 기다리다 결국 만나지 못하고 혼자 돌아왔더랬다. 혼자 그 먼길을 돌아오는데 서글프거나 지치지 않았다. 나를 반성하게 되고 이제 우리 둘다 잘해나가보자는 다짐을 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티비를 보는데 그때 생각이 불현듯 났다. 그런 때도 있었지 싶었다. 

 

  어제는 점심으로 콩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콩물과 메밀면을 화요일 병원 갔을 때 사가지고 왔다. 메밀면을 5분 정도 푹 끓이고 찬물로 빡빡 헹궈냈다. 그릇에 면을 담고 콩물을 적당히 부었다. 얼음 몇 개도 넣었다. 깨를 갈아 욕심껏 뿌렸다. 회사일로 저녁까지 먹고 본 남편에게 하루종일 집에 있으니 심심하고 기분이 다운되기도 한다고 하니 자기는 집에서 한 일년 정도는 신나게 놀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게임도 하고 드라마도 보고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드라마도 보고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드라... (-_-) 오늘은 <노매드랜드>를 대여해 봐야지 생각하고 있다. 어제 엽서를 썼고, 오늘도 비가 오네. 비가 그치면 우체통까지 걸어갔다 와야지. 돌아오는 길에 스콘도 사오고. 탕이 애착인형으로 노오란 오리 인형을 봐뒀는데 일시품절 상태이다. 문의하니 이번주에 재오픈한다고 한다. 놓치지 말고 주문해야지. 이름 후보 중 하나인 '지오'의 한자들을 찾아봤는데 마음에 드는 한자가 있었다. 굳건할 지, 온기 오. 굳건하고 따뜻한 사람. 굳건할 지, 깊을 오. 굳건하고 깊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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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3

from 모퉁이다방 2021. 5. 18. 17:25

 

 

   진료실에 들어가면 매번 선생님이 제일 먼저 물어보신다. 돈 것 같아요? 내 대답은 항상 아니요. 초음파를 보신 선생님은 그러네, 아직 머리가 위에 있네. 오늘도 그랬다. 매번 아가 자세를 산모수첩에 그려두시는 선생님. 오늘의 그림은 제일 위 동그라미 그 아래 세로 한 줄 그 아래 산봉우리 두 개. 몸무게도 괜찮고 양수양도 괜찮고 아가는 잘 있단다. 목에 탯줄을 한 번 감고 있는데 별 문제는 없다고 하셨다. 수술 날짜를 확정했다. 5월 31일. 갑자기 디데이 날짜가 확 줄었다. 남편 전회사 동료가 있는데 나보다 예정일이 3주 빨랐다. 태명은 코코. 코코가 오늘 오전에 태어났단다. 지난주 일요일에 집에 가서 놀다왔는데 그 집 남편이 석가탄신일 하루 전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바랬는데 진짜 바램대로 되었다. 세 시간동안 진통하고 순산했다고. 저 세상 고통이었다고. 세상 모든 엄마는 위대하다.   

 

   어제 냉장고에서 수박을 꺼내 썰어두었는데 남편이 반통짜리 수박을 꺼내다 허걱했다. 엄청나게 무거운 수박이라고. 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수박을 들고 지난주에 보경이가 놀러왔다. 딸기 한 소쿠리와 함께. 보경이는 수박을 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시간이 조금 지나 시원해지자 꺼내서 반통을 잘랐다. 그리고 반통의 반통을 잘랐다. 두 통은 랩을 씌워 냉장고 안에 넣어두고 반의 반통을 먹기좋게 네모나게 잘라 락앤락통에 담아뒀다. 덕분에 나는 수월하고 편안하게 올해 첫 수박을 먹었다. 보경이랑 둘이 먹고 보경이가 간 뒤에는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꺼내먹었다. 남편이 수박을 좋아하지 않아서 수박 한 통이 온전히 내 차지가 되었다. 오늘은 점심으로 통통한 김밥 한 줄을 사와 먹고 후식으로 어제 잘라둔 수박을 꺼내 먹었다. 적당히 달고 적당히 시원한 여름의 맛이다. 온 집안 창문을 다 열어두고 방석과 수건을 빨았다. 초여름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보경이는 얼마 전 버스정류장에서 느낀 어떤 감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광경을 보고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났다고 했다. 다른 때에는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을 광경인데 그 순간에는 정말이지 자기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고 했다. 시아버지의 임종 이야기도 해줬다. 갑자기 떠나시려는 시아버지 귓가에 조용조용 마지막 인사를 건네던 시어머니. 당신과 같이 살아서 참 행복했어요, 로 시작하는 따듯한 말들. 코끝이 찡해졌다. 보경이의 이 이야기들이 기억에 아주 오래 남겠다고 생각했다. 네 시 즈음 보경이가 이제 가봐야되겠다고 했고 함께 집앞 버스정류장에 나갔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 의자에 둘이 나란히 앉아 있는데 이 평일 오후의 시간이 무척이나 평온하게 느껴졌다. 영종도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와준 사람의 마음을 오래오래 기억해둬야지. 쉬운 일 같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걸 아니까. 

 

   지난주 진료때 물어보려고 했는데 못 물어 본 질문. 이제 움직여도 될까요? 선생님이 답해주셨다. 그럼요~ 아주 경쾌하게. 후아, 이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병원을 나와 택시를 타고가며 보았던 스타벅스로 걸어 가 디카페인 커피와 에그베이컨 샌드위치를 시켰다. 얼마만에 커피집에서 커피를 마시는가. 그것도 혼자서. <무라카미 T>는 양장에 너무 좋은 종이를 쓴 것 같다. 내용을 보면 장정도 종이재질도 책의 여백도 (그러므로) 가격도 과한 느낌. 가벼운 내용이니 더 가볍게 만들었음 좋았을 것 같다. 무엇보다 내용이 너무 가벼워서 읽기 전의 기대감을 채워주지 못했다. 좋았던 부분은 있었는데, 하루키가 미국에 갈 때마다 꼭 햄버거와 생맥주로 첫 끼니를 해결한다는 부분. 별 것 아닌데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 왠지 설레였다. 내게도 자주 가는 나라와 그 나라에서 꼭 먹는 첫 끼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여행이 그립다는 이야기. 

 

  여행으로 미국에 간다. 세관을 통과하고 공항을 빠져나와 시내에 자리 잡자마자 '어디 가서 햄버거부터 먹어야 해'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어떠신지? 적어도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지극히 당연한 본능 같기도 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형식적인 의례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좋다. 어쨌든 햄버기를 먹으러 간다. 

   오후 1시 반 쯤에 손님이 얼추 빠진 햄버거 가게로 들어가 카운터에 홀로 앉아 쿠어스 라이트 생맥주와 치즈버거를 주문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패티의 굽기 정도는 미디엄, 버거와 치즈 외에는 양파와 토마토와 양상추과 피클. 사이드 메뉴는 갓 조리한 감자튀김. 마음의 친구로 역시 콜슬로도 주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소중한 단짝, 머스터드(디종)와 하인즈 케첩.

   시원한 쿠어스 라이트를 차분하게 마시고 주위 사람들의 술렁임과 접시나 잔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혹은 이국의 공기를 주의 깊에 들이마시면서 치즈버거 접시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비로소 '아, 그렇지, 또 미국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솟아난다. 

- p.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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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2

from 모퉁이다방 2021. 5. 12. 10:51

 

 

  병원에 다녀왔다. 이제부터 일주일에 한번씩 진료를 보러간다. 새벽에 피가 나서 병원에 갔을 때 선생님이 35주까지만 잘 버티면 그때는 태어나도 괜찮다고 하셨다. 그 35주차가 되었다. 탕이는 2주동안 200그램이 늘어 있었다. 여전히 역아였는데, 머리가 가슴 바로 아래에 있다고 하셨다. 아가 머리 때문에 많이 힘드시겠는데요? 나는 요새 배가 많이 단단하다고 이게 정상인지 물었다. 머리가 위에 있어 어쩔 수 없다고 하셨다. 근종도 있고. 다행히 근종은 더 커지진 않았다. 머리 바로 옆에 발이 보였는데 아가가 지금 폴더처럼 몸을 접고 있다고 했다. 32주부터 선생님은 산모수첩에 탕이의 자세를 그려놓으시는데, 보시더니 그래도 아가가 계속 자세를 바꾸고 있다고 하셨다. 그래도 계속 역아이니 수술 확정으로 마음을 먹자고 하시며 6월 12일이 예정일이니 5월 마지막날부터 6월 첫째주 중에 좋은 날짜를 다음 진료 때 잡아오라고 하셨다. 수술 당일에라도 돌면 취소하고 집에 갈 수 있다면서. 엄마가 바빠졌다. 엄마는 사주를 아주아주아주 믿는데 첫 손주에게 좋은 사주를 주려고 이리저리 알아보시기 시작했다. 이왕 수술을 하는 거고 할머니의 믿음이 있으니 좋은 날짜로 잡아보는 거고, 나는 우리가 잘하면 되는 거라 생각한다. 선하고 따뜻한 아이로 우리가 잘 이끌어주고 탕이 자신이 중심을 잡고 잘 자라주는 것. 그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어찌되었든 3주 정도 남았다. 설레고 떨린다.

 

  내내 집에 있으니 동생이 심심할 때 보라며 유투브 영상을 추천해줬다. 일본 영상인데 혼자서 혹은 가족과 함께 캠핑을 하는 영상이다. 처음에는 개인 유투브인가 싶었는데 영상이 아주 전문적이다. 찍어주는 사람도 따로 있고. 계속 보다보니 캠핑은 하지도 않으면서 캠핑용품에 관심이 간다. 심플하고 단단한 스탠 소재의 제품들이 많이 나온다. 캠핑용품 회사의 유투브인가. 주로 남자분 혼자 캠핑을 떠난다. 초록초록한 산골에 들어가 그곳의 계곡물이나 약수물을 받아 원두를 갈고 정성스레 내려 그 풍경을 마주하고 커피를 마신다. 사람 말소리 하나 없는 영상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어제 본 영상은 바닷가로 솔로캠핑을 떠나는 거였는데 영상의 시작이 집이었다. 집 창밖에도 나무들이 그득하더라. 집에서 바닷가에서 먹을 저녁을 준비한다. 양념을 만들고 뼈가 붙어 있는 돼지고기에 칼집을 내고 포크로 쿡쿡 찍어둔다. 지퍼팩에 고기 네다섯 덩이를 넣고 양념도 넣어 섞어둔다. 바닷가에 도착해 텐트를 치고 파도 구경을 한다. 날이 어두워지자 불을 피우고 요리를 시작한다. 심플하고 단단한 스탠 소재의 캠핑용품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분은 작은 무쇠후라이팬을 가지고 다니는데 후라이팬을 달궈 기름을 두르고 돼지갈비를 익힌다. 1인분의 쌀밥도 짓는다. 채소도 송송 썰어 익힌다. 그렇게 저녁이 완성되고 차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낸다. 이런 영상들이다. 어제는 중국냉면을 처음 먹어봤다. 오늘은 미세먼지 좋음. 초미세먼지 좋음. 일몰 19시 31분. 방마다 창문을 조금씩 열어뒀다.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탕이는 아침 딸국질로 자신의 무사함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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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7

from 모퉁이다방 2021. 5. 6. 16:42

 

 

  어제는 소윤이가 전주에서 군포로 왔다. 아침 아홉시에 출발해 군포로 오니 오후 한 시. 그리고 다섯 시에 여섯시 반 버스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 멀리서 배부른 나를 보기 위해 와줬다. 고맙게도. 계산해보니 일 년여만이었다. 세상에. 내 평생 이만큼 커다란 꽃다발을 받아본 적이 있었나. 품에 안아야 할 정도의 풍성한 꽃다발과 밤에 잠을 잘 못 잔다는 나를 위해 어여쁜 패키지의 차 세트를 가지고 왔다.

 

  대야미역에서 만나 남편이 좋아하는 (나도 한 번 가보고 바로 좋아하게 된) 쌈밥집에 가서 푸짐하게 점심을 먹었다. 제육쌈밥으로 3인분을 시켰다. 제육볶음과 당귀를 포함한 쌈채소와 우렁무침과 우렁쌈장, 각종 밑반찬과 된장찌개가 나온다. 한창 먹고 있으면 따끈따끈한 누룽지도 가져다 주신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이야기하며 쌈밥을 먹었다. 소윤이의 대학원 생활, 남편의 훈련병 태담과 요즘 아이들이 사는 곳을 두고 무지막지한 말들을 한다는 서글픈 현실, 탕이의 이름 후보 등등. 이것저것 먹을 것들이 많아 공기밥은 사이좋게 반씩 남겼다. 그리고 동네로 와 좋아하는 빵집에서 좋아하는 빵과 커피를 사고 집에 들어왔다. 남편은 방에 들어가 늘 지지만 지치지 않고 보는 한화 야구를 봤고 소윤이와 나는 소파에 앉아 빵과 커피와 차를 펼쳐놓고 수다를 떨었다. 처음 먹어보는 블루베리 케이크는 상콤하고 적당히 달아 맛났다.

 

  창밖으로 어제 비가 와서 더욱 무성해진 숲이 보였고 얼마 전 큰 맘 먹고 산 풍경소리가 바람결에 들려왔다. 관계에 대한 소윤이의 말은 어느 때의 나 같아서 무척 공감이 되었다. 만나지 못한 사이 이렇게 또 자라 있었구나 싶었다. 소윤이는 언니 배가 정말 많이 나왔다는 말을 여러 번 했는데 소윤이가 찍어 준 사진을 보니 그 말이 실감이 되었다. 아, 나 진짜 배가 어마어마하구나. 늘 내려다보니 그냥 많이 나온 줄 알고 있었는데 배가 찍힌 사진을 보니 정말 어마어마했다. 소윤이가 이 배를 하고 얼마나 힘들겠냐고 언니 정말 고생이 많다고 했다. 이 다정한 말 한마디에 마음이 따듯해졌다. 사실 요즘 밤마다 정말 힘들었거든. 잠은 안 오고 다리는 붓고 어떻게 누워도 불편하고.

 

  소윤이가 다섯 시에는 가야한다기에 이것저것 챙겼다. 빵과 주스, 얼마 전에 사둔 비누, 포틀랜드 차 티백. 소윤이가 남편에게 밖에 나가 초록초록한 데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화장도 하지 않고 미용실도 통 가지 않아 머리도 엉망인 나는 틴트만 바르고 자연광을 고스란히 받으며 사진을 찍었다. 처음엔 너무 적나라한 내 모습에 놀랬는데 이렇게 소윤이가 오고 이 시기 우리 둘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두게 되어 다행이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사진을 계속 들여다 보니 이뻤다. 우리 둘도, 초록초록한 나무들도, 비온 뒤 오월의 좋은 날씨도.

 

  소윤이를 보내고 집에 들어와 잠시 쉬다가 당근 거래를 하러 다시 나갔다. 신생아 때만 사용하는 모빌이라는데 가격이 비싸긴 해도 꼭 필요한 육아템이라 해서 중고로 구입했다. 6월 출산 예정이라고 하니 아가의 성별을 물어봤는데 아가 옷이랑 양말을 덤으로 주더라. 고마운 판매자였다. 상품은 아주 깨끗했고 옷이랑 양말에도 좋은 세제 냄새가 솔솔 났다. 집에 와 조립해보니 잔잔한 음악소리가 나며 인형들이 천천히 돌아갔다. 저녁은 수요일마다 앞 아파트에 장이 열리는데 거기서 곱창순대볶음을 사와 먹었다. 평소보다 움직여서 그런지 간만에 정말 숙면을 했다. 오늘 일찍 일어나 꽃병 물을 갈고 분무기로 물을 뿌려줬다. 어제 쌈밥을 먹는 동안 차 안의 온도 때문에 순식간에 꽃과 잎이 시들었다. 집에 와 줄기 끝부분을 대각선으로 잘라주고 물을 듬뿍 담은 꽃병에 꽂은 뒤 분무기로 물을 뿌려주니 금새 되살아나더라. 신기하게. 고운 마음이 담긴 어여쁜 꽃, 오래오래 봐야지. 꽃병은 이원하 시집 사은품인데 이렇게 적혀 있다. "나에게 바짝 다가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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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40

from 모퉁이다방 2021. 5. 3. 13:16

 

 

  어제는 장난감 소독을 마쳤다. 전부 물려받은 것들이다. 세탁하지 못하는 것들은 클리너를 싹싹 뿌려 마른천으로 뽀득뽀득 닦아냈다. 세탁할 수 있는 것들은 큼지막한 세탁망에 넣어 울세탁 모드로 돌렸다. 세 번씩 돌려야 했던 손수건과 천기저귀 빨래는 평일에 끝냈다. 어제는 아가옷 빨래를 했다. 남편 지인 중에 이제 돌이 된 아가가 있어 많이 물려받았다. 뜯어진 곳이 두 군데 있어 실로 단단하게 꼬맸다. 

 

  디데이 40일이다. 탕이는 아직도 역아이니 여러모로 수술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러면 디데이는 더 줄어들겠지. 한 달도 남지 않았을 거다. 저번주에 병원에 가니 다행히 경부길이가 조금 늘었다고 했다. 그래도 35주까지는 집에서 누워만 있음 좋겠다고 하셨다. 누워만 있는 건 너무 힘들어 집안에서 조금씩 움직인다. 빨래도 하고. 초음파를 보는데 아가가 양발을 머리에까지 올리고 있더라. 발 길이를 재주셨는데 7센치였다. 집에 와 줄자를 꺼내 7센치를 만들어봤다. 여기가 앞머리예요. 선생님이 가리켜 주신 곳에 잔디같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귀여운 아가에게 귀여운 머리카락까지 생겼다. 남편은 요즘 "오백이십칠번(남편은 내 생일에 아이가 태어나 매년 생일을 한번에 치르길 바란다 -_-;) 전탕이 훈련병, 잘 있었나? 점호 시작!"하며 태담을 시작하는데 앞머리 영상을 보더니 진짜 훈련병 머리를 하고 있다며 신기해했다. 이제 탕이는 2.4키로가 되었다. 다음주에 가면 더 자라 있겠지. 더 나올 수 있는 건가 싶은 배가 더 나왔다. 

 

  남편은 결혼 전부터 아이 생각이 많지 않았다. 가지지 말자고까지 말했다. 둘이서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우리 둘다 아이를 가지기엔 나이가 너무 많다고. 나는 가질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고 둘이서 계속 행복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 되었다. 어중간한 상태로 어중간한 노력을 하며 일년이 흘렀다. 남편은 올해, 그러니까 작년이 지나면 둘다 아예 생각도 하지 말자고 했다. 내년은 아이를 가지기엔 너무 많은 나이라고. 여수 여행에서였다. 남편이 우리 둘이 살아가려면 취미도 공유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많은 노력을 해야 될 거다 라고 말했다. 나는 남편의 그 말에 아이 없이 늙어가는 우리의 모습을 상상해봤다. 

 

  여행을 가기 한 달 전쯤 난임병원에 갔더랬다. 문제가 있으면 깨끗하게 포기를 하든지 시술을 해보자고. 둘 다 문제는 없었다. 시술은 결심이 서지 않아 날짜를 받아왔다. 잘 되지 않았다. 시술을 하는 문제로 친구들과 동생들 앞에서 싸우기도 했다. 남편은 빨리 시도를 하고 포기를 하든지 하자고 했다. 나는 시술을 하면 휴가도 많이 써야 하고 몸도 걱정이 되었다. 어느 날 퇴근길, 셔틀버스 안에서 생리가 시작되는 듯한 느낌이 왔다. 결국 이번 달도 안되었구나 생각했다. 휴가를 최대한 적게 쓰고 시술을 하는 방법이 뭔지 고민했다. 집에 와 속옷을 갈아입으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색이 이상했다. 사놓고 단 한번도 쓰지 않았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 테스트기를 꺼냈다. 헉 이게 뭐지? 선명한 두 줄이었다. 믿어지지도 않고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약속이 있어 술을 마시고 있는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사진을 보냈다. 마찬가지로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한 남편은 내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출산한지 얼마되지 않은 지인에게 바로 물어봤단다. 그리고 전화를 걸어와 말했다. H가 그러는데 이건 빼박 임신이라는데?   

 

  그날 아침 꿈을 꿨다. 너무 생생하고 느낌이 좋은 꿈이었다. 그 당시 친구가 이사 문제로 고민이 많았던 시기라 친구일이 잘 풀릴 거라 생각했다. 일어나자마자 친구에게 메세지를 보냈다. 내가 이런 꿈을 꿨는데 잘 될 것 같아. 꿈에 맑은 물이 나오면 좋은 거래. 꿈에서 나는 친구집에 있었다. 한참 놀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친구에게 샤워를 하고 가도 되냐고 물었다. 친구는 물론이지, 라고 했다. 나는 친구네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틀어놓고 나왔다. 친구와 한참 이야기를 하다 맞다, 나 물 틀어놨잖아, 하면서 욕실로 다급하게 들어갔다. 들어서자 친구의 욕실이 대중목욕탕만큼 커져 있었다. 길쭉한 탕이 생겼고 거기에 방금 받은 물이 그득했다. 친구에게 나 때문에 수도세가 어마어마하게 나오겠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친구가 괜찮다고 했다. 따뜻한 탕 안으로 들어갔다. 단번에 기분이 좋아졌다. 친구와 오빠(친구의 남편)가 밖에 앉아 내 얘기를 들어줬다. 그러다 갑자기 남편이 탕 속에서 나타났다. 길쭉하게 생긴 탕을 기분 좋은 얼굴로 유유히 배영하고 있었다. 순간 더할 나위없이 안락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태명이 '탕이'가 되었다. 친구의 이사 문제도 잘 해결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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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눕눕

from 모퉁이다방 2021. 4. 22. 14:13

 

  지난 정기 검진때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제 검진주기가 한달에서 2주로 바뀌었고, 마지막 진료 때 아가는 2주 사이 500그램이나 늘어 있었다. 아직 역아였지만. 선생님은 내가 많이 노산이라 아기가 돌더라도 수술을 원하면 할 수 있다고, 노산은 보통 진행이 많이 느려 골반이 좋더라도 힘들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내가 자연분만을 원하면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주변에서 수술이 나쁘지 않다고 권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 수술 쪽으로 마음을 먹고 있다. 탕이는 몸무게가 는만큼 태동도 힘차졌다. 이제 밖의 소리를 다 듣는단다. 선생님은 초음파에 아가 얼굴이 보이자 "안-녀영, 아가야." 하고 인사를 건넸다.

 

  다음 진료 날짜를 처음으로 평일로 잡았다. 그날 막달 검사를 한다고 했다. 5월부터 휴가를 쓸 거니 5월 첫번째 월요일로 잡았다. 매일 산책하고 아가 옷과 손수건 빨래도 하고, 혼자서 영화도 보러가고 등등의 소소한 계획들이 있었다. 그런데 화요일 출근하려고 일어났는데 아주 옅은 피가 묻어 나왔다. 아주 옅었고 그동안 피가 두어번 난 적이 있어 침착하게 팀장님한테 연락을 하고 휴가계를 냈다. 병원 진료가 9시 반부터라 1시간 정도 누워 있었다. 피는 멈춘 것 같아 샤워를 하고 남편과 함께 아침을 챙겨 먹었다. 그러고 화장실을 갔는데 좀더 짙은 피가 묻어 나왔다.

 

  선생님은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피가 났다고요? 얼마나 났어요? 물으셨다. 먼저 배초음파를 봤다. 아가는 잘 있었다. 대기실에서 기다릴 때 태동이 느껴졌는데 손이며 다리며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여전히 역아이고. 선생님이 6센치 근종 때문에 못 도는 걸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질초음파를 했는데, 피는 보이지 않고 자궁경부가 입원했을 때보다 반 정도 짧아졌다고 한다. 벌어진 틈도 보이고. 30주에 들어서면서 배가 많이 나오고 피곤함을 자주 느꼈는데 그래서 그런걸까. 태동검사를 하고 수축이 잡히면 입원을 하고 잡히지 않으면 일단 외래진료를 보자고 했다. 다행히 수축은 없었다. 질정처방을 받았다. 그리고 집에서 누워만 있으라고 했다. 출근도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일주일 뒤에 보자고 하시며 34주에는 나와도 되는데 그 전에 나오면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엄마가 최고의 인큐베이터잖아요, 집에서 누워만 있으세요. 오늘이 32주 5일차이다.

 

  회사는 바로 휴가를 냈고 그날부터 다시 눕눕의 생활이다. 아무 것도 못하고 누워만 있으니 답답하고 힘들다. 티비를 보다 잠이 들고 혼자 밥을 챙겨 먹고 그러다 갑자기 서러워지기도 하고. 창문 밖의 숲은 점점 초록초록해지고 있다. 빨래라도 하고 싶은데 움직였다 자궁경부가 더 짧아지면 위험하니 잠시 앉았다 대부분 누워 있는다. 한 이틀은 티비만 보며 지냈는데 이제 정신을 차려야지 싶어 음악을 틀고 책을 꺼냈다.

 

  4월에 엄마가 올라오셨다. 코로나와 임신 때문에 명절에도 못 내려갔더니 엄마가 내 배 나온 모습을 영영 못 볼 것 같아 한 번 올라 오라고 했다. 아빠는 올라오셔도 딱히 할 게 없으니 답답하다며 출산하면 올라오신다고 하셨다. 동생과 남편과 엄마랑 제일 가까운 서해인 제부도에 다녀왔다. 날이 좋아 사람들이 많았다. 고요한 서해바다를 앞에 두고 나란히 앉아 동생이 집에서 내려온 커피와 나의 최애빵 팟콩파이를 나눠 먹었다. 엄마는 저기 커다란 바위가 보이는 곳까지 걸어갔다 와봐야겠다고 했고 동생이 따라 나섰다. 남편과 나는 캠핑의자에 앉아 자우림의 HOLA! 앨범을 반복해서 들었다. 우리들의 실패로 시작해 모닝 왈츠, HOLA!로 끝나는 순서였다. 눈 앞의 바다는 천천히 물이 차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보더니 어, 하면서 남편이 뛰쳐 나갔다. 전전 회사 상무님이라고 했다. 나는 멀리서 인사를 했다. 중학생 즈음 되어보이는 아들과 함께 바닷가 산책 중이셨다. 남편이 긴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고 한참 지나 엄마와 동생이 돌아왔다. 제부도를 나와 제부도가 내려다보이는 가게에 들어가 쭈꾸미 샤브샤브를 땀을 뻘뻘 흘려가며 먹었다. 우리가 지나온 바다에 물이 점점 들어차는 모습이 보였다.

 

  제부도에 가기 전에도 샤워를 할 때 자우림 앨범을 틀어놓고 했는데, 돌아와서 하니 샤워기에서 옅은 바닷내가 나는 것 같다. 그 한가했던 풍경이 떠오른다. 남편은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고 엄마와 동생은 저 멀리 바닷가를 걷고 있고. 차례차례 나와 아가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풍경. 이번에는 엄마와 싸우지 않았는데 (세자매 중 엄마랑 제일 많이 싸우는 큰딸이시다) 엄마가 아가에게 애틋한 마음을 얘기할 때 뭉클했다. - 아빠는 기다렸다는데 엄마도 기다렸어? - 아니. 나는 안 기다렸는데. 생길 때 되면 생기고 아니면 아닌 거고 생각했지. - 내가 들으니까 손주는 자식과 비교가 안되게 귀엽대. - 응. 그렇다더라. 엄마 친구들도 다 그러더라. 귀여워 죽는다고. 엄마는 두 밤을 자고 갔는데 첫날 밤에 내려오는 눈꺼풀을 버티다 안 되겠는지 방으로 들어가며 내 배를 톡톡 치며 탕이야, 내일 보자, 엄마랑 잘 자, 했다. 그러네, 엄마의 철 없는 딸이 이제 엄마가 되네. 눕눕하며 잘 버티다 딱 좋을 때에 누구보다 건강하게 세상에 나와 할머니 할아버지들 엄마 아빠 이모들 삼촌들 만나자, 아가. 다시 눕눕의 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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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

from 모퉁이다방 2021. 3. 27. 14:41

 

 

 

   오월부터 쉬기로 했다. 연차 소진하고 출산휴가 들어가기로. 삼십대에는 단 한번도 회사를 쉰 적이 없다. 오월에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지 기대도 되고 셀레기도 한다. 더불어 다가올 진통의 시간과 육아의 시작이 걱정도 되고. 아가는 아무래도 나를 닮은 것 같다. 입체초음파의 입이 완전 도톰한 것이 나다. 눈은 감고 있어서 잘 모르겠고, 코도 양수에 불어 있어 잘 모르겠는데 입은 딱 봐도 나다. 나를 닮은 아이가 초여름이 되면 이 세상에 존재를 드러낸다는 게 아직까지 믿기지 않고 신기하기만 하다. 오월에는 사놓은 손수건과 천기저귀 빨래도 하고 물려받은 작디작은 옷들도 빨아야지. 어제는 남편의 지인이 아가옷을 잔뜩 물려줬다. 지인의 아가는 돌을 앞두고 있는데 사실은 두번째이지만 거의 처음 보는 삼촌 이모에게 자기 장난감을 나눠주고 생긋생긋 잘도 웃어줬다. 오월에는 매일 일기도 쓰고, 산책도 하고, 책도 봐야지. 그때쯤이면 동네나무들도 초록초록해지겠다. 의사 선생님은 이제 3키로 남았다고 했다. 아가는 1키로도 안된다며 이제 조절해야 한다고. 하지만 피도 늘고 양수도 있고 등등이 있지 않나요? 라고 말하진 못하고 다음달에 지금과 똑같은 몸무게로 온다고 약속을 했다. 목요일에 먹은 숯불 돼지고기는 정말 맛있었다. 상추와 깻잎 위에 잘 구워진 돼지고기 얹고 새콤한 우렁야채무침과 편마늘을 얹어 한입 가득 입안에 넣으니, 캬- 어제 재어보니 1키로가 늘었더라. 과연 약속은 지켜질 수 있을까. 임당은 재검 끝에 통과되었다. 재검하면서 네시간 동안 한 시간에 한 번씩 피를 뽑았다. 

 

   지하철 임산부석에 관해서는 매일매일 일기를 쓸 수 있을 정도다.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지 임산부석에 앉은 사람들을 보며 새삼 느낀다. 요즘은 배가 많이 나와서 양보해주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꼭 앉아서 가고 싶던 초중기에는 뱃지를 봐도 잘 일어나 주질 않더라. 뱃지를 잘 보이게 하기 위해 가방까지 일부러 샀다. 이번 주에는 이런 분을 만났다. 1호선은 임산부석이 비어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날의 퇴근길에도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젊은 여자였고 큰 쇼핑백을 가지고 있어 뱃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 대놓고 볼 수도 없어 처음에는 왜 안 일어나지? 생각했고 (조금 화가 났고) 혹시 임산부인가? 생각했다. 예전에 임산부 아닌 사람이 앉아 있어 속으로 부글부글했는데 뒤늦게 뱃지를 발견하고 미안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아무튼 양보해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으니 그냥 책이나 보자 하면서 가고 있었다. 퇴근길이라 사람들이 꽤 있었다. 몇 정거장을 더 갔는데 갑자기 뒤에서 한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그러면서 저기 자리가 있어서요. 이리 와요, 하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바로 뒤로 아니고 멀리 대각선 라인에 있는 자리였다. 좌석 앞에 사람들이 일렬로 촘촘히 서 있었는데 어떻게 저 멀리서 나를 보신거지? 아주머니는 혹시 누군가 앉아버릴까봐 자기 에코백을 자리에 놔두고 나를 데리러 온 거였다. 여기 앉아요, 하더니 맞은편 좌석쪽으로 가 한참을 서서 가셨다. 지하철에서 몇 번의 양보를 받아봤는데 이렇게 눈물나는 양보는 처음이었다. 나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연거푸 말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복 받으실 거예요. 이 분에게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대신 뱃지를 보고, 만삭의 배를 보고 바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빈다. 너도 임신해서 꼭 너 같은 사람들만 만나기를. 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다. 이렇게 뱃가죽이 늘어나는 게 신기할 정도로. 이번 주에는 읽고 있던 책 하나를 끝냈고 또 하나를 시작한다. 아가 책도 여러 권 샀는데 포동포동한 손으로 읽어달라고 가지고 올 생각을 하면 뭔가 마음 한 켠이 따땃해진다. 나오는 날까지 건강하자, 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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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from 모퉁이다방 2021. 3. 6. 08:02

 

  다시 출근한지 3주가 지나고 있다. 재택을 두 달 반이나 했다. 첫 주에는 긴 출퇴근길이 고단했으나 금새 몸이 적응해 나가고 있다. 재택할 때는 늦게 일어나도 되니 밤에 잠이 잘 오지 않는 날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집에 와서 밥 먹고나면 바로 기절이다. 집에 사람이 들어오는지 바로 옆에 누가 눕는지 모를 정도로 기절하듯 잠에 든다. 일찍 일어나니 봄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도 알겠다. 해가 뜨는 시간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차 타고 역까지 나가는 길이 점점 밝아진다. 초여름이 가까워지면 이 시간이 지금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환하겠지.

 

  탕이는 출근 첫 날 지하철 안에서 지나치게 콩콩거려 나를 놀라게 했다. 이제 자신만의 하루 사이클이 생기고 외부 소리에도 반응을 한다는데 집에서 앉아 있거나 누워만 있던 엄마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고 출렁출렁 걷고 집에서는 듣지 못하던 소리들이 들려오니 그랬던 걸까. 신이 나는지 콩콩 거리며 활달하게 움직였다. 이제는 사무실에서도 힘차게 움직인다. 태동이 점점 힘차지고 있다. 어떤 순간에는 어이쿠 하는 느낌이 들 정도. 아가는 잘 있는 것 같다. 엄마와 함께하는 긴 출퇴근길을 지루해하지 않고 신기해하면서.

 

  2주동안 지하철에서 책을 두 권 읽었다. 역시 최고의 독서장소는 전철 안이다. 두 권 다 산문집이었고 한 권은 집에 대한, 한 권은 여행에 대한 책이었다. 지금은 소설집을 읽고 있다. 다시 여행을 가게 되면 나는, 우리는 어떤 여행을 하게 될까. 예전처럼 조바심 내지 않고 잘 보고 잘 걷고 잘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지난 주말에 동생이 와 함께 영화 <세자매>를 봤다. 흠. 세자매의 캐릭터가 너무 세서 보면서 많이 당황했다. 끝나고도. 그러고 감정이 순화될 수 있는 영상을 봐야한다며 찾다가 동생이 신세경의 유튜브 파리여행 영상을 틀어줬다. 생각했던 것보다 좋았다. 거기엔 낯선 곳이 있었고 설렘이 있었고 풍경이 있었고 맛있는 음식이 있었다. 엄마와 함께 여행하며 밖에서는 그곳의 음식을, 숙소에서는 그곳의 재료로 한국의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도 좋았다. 잘 차려진 깔끔한 여행 조식이 그립다.

 

  임신을 하니 눈물이 많아졌다. 호르몬 핑계를 될 수 있겠지만 원래도 눈물이 많았으니 그냥 우는 것일 수도. 어느 날은 서러워서 엉엉 울었다. (이런 날은 드물다) 화장실 안에서 엉엉 울고 있는데 뱃속이 크게 꿀렁-했다. 아가가 태동을 한 것이다. 엄마 울지 말라고 그러는 거야, 싶어 더 눈물이 났다. 그래서 조금 더 울고 씩씩하게 눈물을 닦고 나왔다. 두 사람이 한 몸에 있는 신기한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오늘은 병원을 다녀와 스파게티를 먹고 <미나리>를 봐야지. 동네에 좋아하는 빵집의 체인점이 생겼다. 내일은 거기서 팟콩파이도 사다 먹어야지. 정말 소중한 주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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