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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퇴원 16 2021.01.06
  3. 어른 4 2020.12.30
  4. 종로 2020.12.06
  5. 늦여름에서 늦가을 6 2020.11.28
  6. 페코짱 2 2020.10.09
  7. 나눔 5 2020.09.29
  8. 4호선 2020.09.24
  9. 재택 2 2020.09.13
  10. 비가 와요 2020.09.03

from 모퉁이다방 2021. 1. 17. 18:12

 

 

    퇴원을 하자마자 안방 침대 위치를 옮겼다. 침대 양옆에 작은 사이드 테이블이 있는 구조였는데 한쪽을 분리하고 침대를 벽쪽으로 붙였다. 남편은 자면서 온갖 몸부림을 치는 내가 침대에서 떨어질까 정말 불안하단다. 침대에서 떨어진 건 주문진으로 놀러가 만취했던 그 날 딱 한 번 뿐이었지만, 지금은 떨어지면 정말 큰일나니까 침대를 옮기자고 했다. 당연하게도 내 자리는 벽쪽이다. 벽 아래 두 개짜리 멀티탭을 두고 하나는 핸드폰 충전기, 하나는 집게 스탠드를 꽂아 두었다. 요즘은 배 때문에 옆으로 돌아눕는 게 편해 벽쪽으로 빵빵한 베개 하나를 두고 두 발을 휘감고 잔다. 이번주에는 배 한쪽이 단단하게 튀어나오는 증상이 있어 깜짝 놀랐는데, 찾아보고 물어보니 배뭉침이라고 한다. 처음 겪는 증상이라 이상이 있는건가 많이 놀랬는데 가만 누워 있으면 자연스레 가라앉는다고 하더라. 크게 숨을 쉬며 아가야 괜찮아, 괜찮아 중얼거리고 있으면 진짜 괜찮아지더라.

 

    남편과 둘이 재택근무를 한 지 꽤 되었다. 남편은 주방 식탁을 옮겨와 노트북, 모니터, 티비까지 활용해 거실에서 일을 한다. 나는 책방에서 데스크탑으로 일을 한다. 재택근무를 하며 엉덩이가 불편해 방석을 두 개 샀고, 남편은 그렇게도 바라던 게이밍 의자와 발받침대를 샀다. 신기하게도 하루종일 둘이 같이 있어도 싸우지 않는다. 아침은 일어나는 시간이 달라 따로 먹고, 점심과 저녁은 같이 먹는다. 외식은 하지 않고 직접 하거나 배달을 시켜 먹는다. 남편에게 이런 말을 직접 한 적은 없지만, 연애할 때보다 결혼하고 난 뒤에 남편에게 더 반하고 있다.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고 자신이 한 말은 지키는 사람이다. 할 수 없는 건 처음부터 할 수 없다고 말한다. 행복하다고 느껴질 때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고 꼭 표현해준다. 달달한 면이 부족했던 사람인데 아주 천천히 달달해지고도 있다. 좋아하는 것이 많이 달랐던 우리인데 조금씩 비슷해지고 있다. 과소비 하는 면이 있었던 내가 남편을 따라 점점 소비를 줄이고 있다.

 

    재택근무를 할 때 처음에는 라디오를 틀어두었는데, 요즘에는 멜론에 좋아요 해둔 음악들을 랜덤으로 듣고 있다. 총 662곡인데, 가만히 듣다보면 그 시절 그 노래를 좋아했던 그때의 마음이 되살아난다. 남편이 친구에게 얻은 스피커는 검은 색에 부피가 크고 구성품이 세개나 된다. 그동안은 책상 위 공간이 부족하다며 하나는 책상 위에 두 개는 바닥 아래에 쌓아두고 썼다. 바닥에 두다보니 아무래도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스피커 삼총사를 책상 위로 옮겼다. 데스크 탑 옆에 삼총사를 바짝 붙였다. 그 위에 네모난 화분의 스투키와 탁상용 선풍기, 2021년 달력을 올려두었다. 생각보다 공간을 많이 차지하지는 않더라. 책상 위에 올려두고 보니 당연하게도 소리가 더 잘 들린다. 남편이 전 회사에서 쓰던 컵에는 연필을 가득 꽂아 책장에 두었다. 책방의 테이블 야자와 홍콩야자도 잘 자라고 있다.

 

    응암동 오피스텔로 이사했을 때 친구는 고흐의 꽃피는 아몬드 나무 그림을 선물로 가져왔었다. 고흐가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며 조카의 파란 눈동자를 떠올리며 그린 그림. 내게는 어쩐지 조금은 쓸쓸한 느낌이 드는 그림. 그리고 곧 더욱 만개할 봄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 응암동에서는 키가 높은 책장 위에 두고 올려다 보았었다. 해가 많이 드는 집이었던지라 눈동자를 닮은 파란 배경의 빛깔이 옅은 하늘색으로 바랬지만. 군포로 가져와서는 바닥에 나란히 내려놓았다. 벽에 붙이지 않아도 나름의 멋이 있었다. 머리카락이 많이 떨어져 저렴하지만 성능이 좋다는 로봇청소기를 마련했는데 이 아이도 편하지만은 않은 게 청소시키려면 바닥에 있는 것들을 치워주어야 한다. 로봇청소기를 작동시키려면 일단 화장실 앞의 발매트를 치워주어야 하고, 거실의 체중계도 치워주어야 한다. 그리고 복도의 아몬드 그림도 어딘가로 올려두어야 한다. 그림은 계속 치우기가 그래서 꼬꼬핀으로 벽에 안착해 두었다. 검색해보니 아몬드 나무는 아주 강한 나무였다. 보호막이 되는 잎이 없는 나무. 추운 겨울바람을 강인한 생명력으로 이겨내고 이른 봄에 다른 나무보다 일찍 꽃을 피우는 나무. 특징을 찾아보고 나니 볼 때마다 내가 더 단단해질 것만 같다.

 

    내일 또 폭설이 예보되어 있지만, 아주 천천히 봄이 오고 있는 중일 거다. 올 겨울에는 외로웠던 루시가 겨울을 지나는 동안 행복해지는 한겨울 시카고의 이야기를 아직 보질 못했다. 몇달 전에 넷플릭스에 있어 눈이 펑펑 오는 겨울이 되면 다시 보아야지 했는데 없어졌더라. 다행히 네이버에서 오천원에 구매할 수 있더라. 구매해둬야지. 보고싶을 때 언제든 볼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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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

from 모퉁이다방 2021. 1. 6. 13:40

 

 

 

    새해는 병원이었다. 1월 1일 밤, 갑자기 피가 왈칵 쏟아졌다. 말 그대로 왈칵. 연휴라고 동생이 와서 남편이랑 셋이 알찜을 포장해와 먹고 있었다. 화장실로 가는 그 짧은 순간에 몇번이나 기도했다. 제발, 제발, 제발. 흥건한 피였다. 덩어리도 나왔고 피가 계속 쏟아졌다. 동생과 남편이 달려왔고 나는 잘못된 것 같아, 어떡해를 연발했다. 남편이 119를 부르겠다고 했다. 동생은 언니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라고 토닥여줬는데 얼굴에 겁이 가득했다. 초기에도 한번 피가 난 적이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을 갔는데 빨간 피가 묻어나왔다. 소량이라도 빨간 피는 좋지 않다고 했는데. 그 날도 나는 남편에게 잘못된 것 같아를 연발했고 남편은 응급실에 가보자고 했다. 팀장님께 연락하고 응급실에 갔다. 간호사가 많이 놀라셨나봐요, 라고 했고 초음파를 본 당직 선생님은 주사 한 대 맞고 집에 가라고 했다. 피가 또 나면 내일 와서 주사 또 맞으라고. 피는 더 나진 않았다. 정기검진일에 주치의 선생님께 얘기하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상이 없다고 산뜻하게 이야기해주셨다.

 

    남편도 나도 구급차를 탄 건 처음이었다. 체온을 계속 재던 구급대원이 체온이 좀 높다고 패딩 지퍼를 열고 있어보라고 했다. 가만히 누워 있는데 멀미를 하는 것 같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머리도 지끈거렸다. 병원에서 전화를 계속 받지 않아 혹시 다른 병원을 찾아봐야 할 수도 있다고, 그러면 시간이 많이 걸릴 수 있다고 했다. 다행히 병원은 열려 있었다. 전산장애로 인해 전화가 먹통이라고 했다. 간호사가 확인해보니 피가 더 나진 않는다고 했다. 조금 기다렸다 초음파를 보자고 했다. 가만 누워 있는데 누군가 응급실에 침착하게 들어와 팬티를 봤는데 피가 굳어 있었다고, 자기는 겁이 매우 많은 사람인데 응급실에 벌써 세번째 오는 거라고 이야기하는 말소리가 커튼 너머 들렸다. 초음파를 본 당직 선생님이 피가 물처럼 뚝뚝 떨어졌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니 검사를 하나 더 했는데 양성으로 나왔다고 며칠 입원을 할 수 있냐고 했다. 그 날부터 입원생활이 시작되었다.

 

    다음날은 마침 정기검진일이었다. 보통 날이었으면 남편과 아침일찍 준비를 하고 병원에 와 내 차례를 기다리다 진료실에 들어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을텐데. 환자복을 입고 도우미 분이 끌어주시는 휠체어를 타고 진료실 앞에 갔다. 내내 내게 걱정말라던 남편도 긴장되어 보였다. 주치의 선생님은 나를 보더니 아직 주수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라고 이야기하셨다. 배와 질 초음파를 연달아 보더니 일단 일주일 정도 입원을 하자고 했다. 그리고 처음 병원을 방문했을 때 그러셨던 것 처럼 최악의 상황도 말씀해주셨다. 나는 그 상황만 계속 머릿 속에 맴돌았다. 선생님이 그러셨잖아, 라고 말하면 남편은 그건 그럴 수도 있는 거고 잘 되면 별 문제 없다고도 말씀해주셨잖아, 라고 말해줬다. 전날은 보호자가 같이 있지 못하는 침상이라 남편은 집에 갔는데 내가 마스크를 쓰고 잤다고 하니 입원실을 1인실로 잡아왔다. 3인실 가격은 물어보지도 않았단다. 내가 너무 비싸다고 하자 계획했던 겨울여행도 못 갔는데 병캉스한다고 생각하자고 했다. 남편은 나랑은 많이 다른 사람이다. 대부분의 일에 긍정적이고 긴급상황에서 침착하다.

 

    밥은 아침 7시 반, 점심 12시, 저녁 5시 반에 나왔다. 처음에는 국이 심심하더니 며칠 있으면서 적응이 되었는지 점점 맛있어졌다. 매 끼니마다 고기나 생선, 채소가 꼭 나왔다. 입맛이 없어 남편에게 계속 같이 먹자고 했다. 남편은 집에서 숙모가 보내준 반찬과 조미김을 챙겨왔다. 햇반을 데워와 침대 위에서 같이 밥을 먹었다. 선생님 회진이 없던 일요일에는 검색에 검색을 거듭했다. 남편이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등을 보이고 누워 검색을 하고 혼자 눈물을 쏟아내곤 했다. 진료실에서 들었던 내 증상과 비슷한 상황들을 검색해봤는데 모두 부정적인 결말 뿐이었다.  남편이 병원 밖에서 부등켜안고 엉엉 울고 있던 남자와 여자를 봤다고 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대번에 눈물을 쏟아냈다. 이럴까봐 말 안하려고 했는데, 라며 이제 울지 말고 좋은 생각만 하자고 했는데 잘 되질 않았다. 밤에는 낮에 잠을 자서 그런지 잠이 잘 오질 않았다. 침대도 딱딱하고 베개개도 불편했다. 침대 옆 커튼을 열어 작은 창문 위를 올려다봤는데 동그란 게 보였다. 처음엔 가로등인가 싶었는데 달이었다. 침대에 누워서도 잘 보이는 위치에 달이 있었다. 창문에는 "문을 여실 때 방충망을 이용하세요"라고 씌여 있었다. 너무 답답하면 방충망을 내리고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찬바람이 들어오면 살 것 같았다.  

 

    드디어 월요일 아침이 왔고, 선생님 회진시간이 왔다. 선생님은 몸이 어떠시냐고 묻고 피가 아직 나냐고 물었다. 나는 패드에 묻지는 않는데 휴지로 닦으면 흐릿한 피가 살짝 보일 때가 있었다고 분비물도 좀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 상태를 가장 잘 전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뿐이라는 생각에 매번 화장실 갈 때마다 냄새를 맡고 유심히 들여다봤다. 그래서 팬티를 내릴 때, 휴지를 닦을 때 매번 조마조마했다. 제발 아무 것도 묻어나오질 않길. 선생님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 것도 안 나와야 한다고 했다. 답답하실 것 같아 괜찮으면 오늘 퇴원하라고 할랬는데 라고 하셔서 답답하지 않다고 몸이 괜찮아질 때까지는 언제까지도 있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럼 오늘은 패드를 벗고 팬티만 입고 있어보자고 하셨다. 그래야 뭐가 나오는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물도 많이 마시고 화장실도 자주 갔다. 매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팬티를 내렸다. 다행히 하루종일 아무 것도 묻어나오지 않았다. 화요일 아침이 왔고, 선생님이 다시 오셨다. 소식을 전하니 그럼 퇴원해볼까요? 라고 하셨다. 내가 퇴원 전에 초음파 다시 안 봐도 될까요 하니 그럼 오후까지 있다 아무 이상 없으면 외래로 초음파 보고 퇴원하자고 하셨다.

 

    고작 나흘 지났는데 아가는 몸무게가 더 늘어 있었다. 팔다리도 많이 자라서 양반다리도 하더라. 선생님은 제가 며칠 전에 성별 알려드렸나요? 물었다. 하늘색이라고 하셨다고 하니 다시 한번 그 부분을 보여주셨다. 남편이 바뀔 리는 없겠죠? 물었다. (남편은 딸을 간절하게 원했다) 아빠 이렇게 확실한데요? 바뀔 리가 없어요, 하고 남편에게 실망감을 안겨줬다. 선생님은 내가 궁금해했던 것들을 초음파를 보며 다시 친절하게 설명해주셨다. 내가 검색해본 건 나한테는 해당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아가도 변함없이 건강하고 양수양도 적당하고, 자궁경부 길이도 적당하다고. 걱정했던 자궁경부의 틈은 아무래도 점액질 인 것 같다고. 며칠 전보다 모양이 약간 달라져 있었다. 내가 피가 난 그 날 집안일을 평소보다 좀더 많이 했는데 그렇게 많이 한 것도 아니었다고 하니 아가가 없을 때의 몸과 아가가 있을 때의 몸은 전혀 다르다고. 무리 안 했다고 생각 들어도 아가가 있을 때는 무조건 조심조심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한달 뒤 다음 검진 때 보면 될 것 같다고 그전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으면 무조건 병원으로 오라고 하셨다. 토요일 진료실에 나왔을 때는 곁에서 도와주시던 도우미 분이 회사 다니세요? 어떡해요, 라고 걱정해주셨는데 화요일 진료실에 나왔을 때는 퇴원하시라는 거죠? 축하드려요, 라고 환하게 웃어주셨다. 물론 두 분이 다른 분이긴 했지만.

 

    오늘로 아가는 늙은 애미 뱃속에서 17주 4일차가 되었다. 느낌이 이상해 임신 테스트기를 해 봤을 때 선명한 두 줄이 나온 날부터 마음이 조급해져 아직 때가 되지 않은 줄 알았으면서도 병원에 가서 실망하고 안 좋은 소리만 잔뜩 듣고 온 날, 아기집과 난황을 확인한 날, 심장소리까지 무사히 확인하고 차가워보였던 선생님이 환하게 웃어보이며 연이어 축하한다고 말했던 날, 돌아누운채 움직이지도 않아서 1차 기형아 검사를 할 때 세 번이나 검사실을 나와 계속 걸어야 했던 날, 정상이라는 결과를 듣던 날까지. 믿기지 않지만 뱃속에 아가가 계속 함께 였다. 노산이고 걱정투성이 엄마인 덕에 혹시나 잘못될까, 나중에 남겨놓은 기록을 보면 너무 슬플까봐 일기도 제대로 쓰지 못했는데 이제는 매일매일 기록해둬야겠다. 이제야 진짜 새해가 시작되는 기분이다. 태명은 탕이다. 목욕탕 꿈을 꾸었기에 탕이라고 지었다. 조심성 없는 엄마라서 미안해. 세상에 나와도 아마 엄마는 계속 그럴 거야. 처음이고, 원래도 엄마가 그렇거든. 그렇지만 노력할게. 일단은 뱃속에서 더이상의 이벤트 없이 무럭무럭 건강하게 잘 자라자, 아가. 엄마가 더 조심할게.   

 

    "어제는 처음으로 배초음파를 했다.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병원 안에도 함께 들어가지 못했는데 어제는 날씨가 추워졌다고 보호자도 함께 병원에 들어갈 수 있었고, 진료실 안에도 함께 들어갔다. 탕이는 그 사이 키가 자라 있었고 팔다리가 생겼고 탯줄도 생겼다. 선생님이 이제 좋은 것 많이 드시라고 했다. 엄마아빠 본다고 짧디짧은 다리도 살짝 움직여주었다. 피, 소변 검사도 다 정상이란다. 이제 다음 진료는 12주차 1차 기형아 검사. 그동안 불안한 마음에 다이어리도 제대로 시작하질 못했더랬다. 이제 뭔가 안심이 된다. 탕이도, 나도 건강할 거라는. 잘 먹고, 잘 지내보자, 탕이야. 우리 가족이 되어주어 고마워. 엄마아빠는 격하게 환영해."

- 2020년 11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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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from 모퉁이다방 2020. 12. 30. 05:37

 

 

   아빠는 주례사에서 너희는 자신처럼 살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커덩했다. 아빠는 딸의 중요한 날, 꾸미지 않고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한 것이다. 커오는 동안 나는 자주 아빠의 외로움과 마주했다. 아빠의 외로운 어깨를 뒷모습으로 마주하면 결혼식장에서처럼 가슴이 철커덩했다. <스토너>를 읽으며 가슴이 아리면서도 다행이다 싶었던 건 아빠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아빠, 아빠처럼 외로웠던 사람이 여기 또 있었네. 지금보다 젊은 시절 아빠는 과묵했다. 힘들고 외로워도 그 감정들을 잘 내뱉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신 바둑을 두고 밤시간 사무실에서 혼자 시간을 오래 보내셨다. 요즘의 아빠는 수다쟁이다. 그동안 못했던 말을 다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저 먼 옛날 얘기도 끊임없이 이야기하신다. 그래서 치매 초기증상을 의심한 적도 있다. 남편은 그래서 전화를 드려도 대화가 끊이질 않아 좋다고 하지만 했던 얘길 또 듣고 또 듣는 딸들은 조금 괴로울 때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아빠가 수다를 왕창 떨고 나면 젊은 시절 외로운 아빠는 없다. 다행이다. 

 

   남편은 어제 술을 한 잔하고 침대에 누워 이야기했다. 다른 나라에 가서 일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자기가 가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의 가족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가족이 자신에게 기대고 상처주어서 물리적 거리로 인해 분리될 수 있는 곳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었다고. 너랑 친구들만 있는 곳에서. 어떤 상처는 몇 십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어제일처럼 생생하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가만히 들으며 어린시절 내 상처를 들여다봤다. 내게도 그런 상처가 있다. 몇 십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생생한. 지금 생각하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그런 상처가. 나란히 누워 우리가 좋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해 이야기했다. 남편은 자신있다고 했다. 나는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받은 상처보다 내가 주는 상처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우리들의 어른들도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었을 테니까.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으니까. 내가 줄 수 있는 상처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사과하고 보듬아 주자고. 어제는 숙모가 집에서 만든 반찬을 가득 보내주셨다. 우리는 그걸 각자의 그릇에 담아 참기름을 넣고 슬슬 비벼 먹었다. 건강했고 든든했다. 속이 꽉 찬, 정성 가득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단 티비 리모컨을 놓고 책을 읽어야지. 다사다난했던 올해가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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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from 모퉁이다방 2020. 12. 6. 08:37

 


    종로에서였다. 길을 가는데 누군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처음엔 정말 누군지 몰라 대꾸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내 뒤통수에 대고 엄청 섭섭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을 한 번 더 쳐다봤는데 생김새가 조금 달라졌지만 아무개를 닮은 거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냥 지나치려 했다. 아무개가 그동안 무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무개는 특유의 엄청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고 옆에 있던 누군가가 나를 쫓아왔다. 그 누군가는 빠른 걸음으로 쫓아오며 나를 혼냈다. 누군지 아시잖아요,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모른 척 하면 안되죠. 나를 훈계했다. 나는 그 누군가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그 사람이 순간 얼더니 맞아요, 하며 울음을 참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순간 서러워져 엉엉 울었다. 그렇게 엉엉 울다 꿈에서 깨서 화장실에 다녀오고 물을 컵에 가득 따라 마셨다. 내가 했던 말이 지금은 정확하게는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런 식의 말이었던 것 같다. 아니요, 사람이 사람한테 그러던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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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에서 늦가을

from 모퉁이다방 2020. 11. 28. 09:39

 

  이번주 바람이 무척 거세졌다. 버스를 기다리며 찬바람을 맞고 있는데 손이 시렸다. 이제 겨울이 왔구나 싶었다. 늦잠을 자리라 다짐했지만, 6시에 눈이 떠졌다. 이불 속에서 지난 사진들을 보다가 늦여름에서 늦가을 사이 사진들을 정리해두자고 생각했다. 많은 일이 없었지만 많은 일이 있었던. 올 가을은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좋았던 재택근무 시절. 아끼는 엄마잔을 꺼내 커피를 진하게 내리고 근무 준비.

 

 

주말에는 살 뺀다고 밥이 일체 들어가지 않은 김밥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아직, 여름. 아직, 초록.

 

 

실버스타의 소주 칠링.

 

 

평일에 집에서 이런 구름을 볼 수 있었던 건 재택 덕분이었다. 

 

 

동생이 각자 술과 안주를 준비해서 랜선술자리를 갖자고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책 사고 받은 사은품 잔. 남편의 최애잔이 되었다. 

 

 

동생과 막내네. 넷플 꼽사리들. 

 

 

올 여름 내 최애 맥주였던.

 

 

여름과 가을, 많은 책을 샀지만 다 읽지 못하고 있는. 두 권은 다 읽었다. 겨울에는 열심히 읽어야지.

 

 

돌돌 말린채 올라와 1년 가까이 피지 않더니

남쪽으로 여름휴가를 다녀오니 떡하니 펼쳐지고 있었다. 여인초 새잎.

 

 

2주동안 어떤 외식도 하지 않고 집에서 모든 걸 해결하던 시절.

 

 

단골들한테만 서비스로 내어줬다는 미로식당 떡볶이는 내내 궁금했는데 드디어 먹어보았다.

그리 달지 않고 내 입맛엔 딱. 

 

 

신박한 정리 보다가 필 받아서 서랍 찬장 정리.

 

 

남편의 취미. 지금은 다시 해체되어 티비와 소파가 있는 집이 되어가고 있다. 

 

 

막내네가 만들어 준 오렌지청으로 탄산수 가득 오렌지에이드.

 

 

이렇게 밝은 퇴근길이었는데. 달과 구름. 여름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여름의 긍정 기운에 점점 좋아지고 있다. 해가 오래 떠있는다는 건 정말이지 축복이다. 

 

 

어느 날은 아침을 미리 준비해놓고 잔다. 

 

 

옳소. 푸슈-

 

 

종종 빵을 얻어먹고 있다. 

 

 

만남의 광장 보고 만들어 본 시래기만두.

 

 

나혼자산다 보고 만들어 본 칼로리 폭발 꿀호떡버거.

 

 

스벅 의자 펼쳐놓고 창문 앞에 앉아 노을 보던 시간.

 

 

남편이 안 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 날도 아닌데 케잌을 사왔다.

너무 달아 결국 다 먹지 못하고 말았지만.

 

 

작은 몬스테라 키가 점점 커져서 분양을 원하는 엄마와 막내에게 하나씩 주려고 잘라서 심어뒀다. 

몇달 동안 아무 반응이 없더니 이제 한 화분에서 새잎이 나기 시작한다. 

 

 

막내가 직접 발아해 선물해 준 레몬나무는 쑥쑥 잘 크고 있다. 

 

 

가을대하도 먹어주고.

 

 

리틀포레스트 밤조림도 만들어 선물했다. 크리스마스 즈음 먹으면 맛있다는데, 과연.

 

 

원했던 답을 듣지 못하고 들어왔던 토요일. 남편이 힘내라고 짬뽕라면을 끓여줬다. 

 

 

이번 추석에는 시댁에도 친정에도 가지 않았다.

전만 부쳐 남편만 잠깐 시댁에 가서 차례를 지내고 왔다. 

 

 

책 보고 만든 뽀모도로. 별게 안 들어갔는데 너무 맛있어서 놀랐다. 

 

 

여름방학 보고 너무 맛있어 보여 만든 버섯전골.

양이 너무 많아 칼국수는 다음날 아침에 먹었는데 진짜 맛있었다.

 

 

회사 급식에 양배추쌈이 나오면 그렇게 좋더라. 양배추 쪄서 고기에 싸먹었다.

숙모쌈장 진짜 최고다.

 

 

여름방학 보고 만든 옥수수스콘. 모양 대실패. 어이없게 맛은 있었다. 

 

 

끄덕끄덕. 많이 생각하지 말자. 

 

 

혼자 먹었던 저녁. 우동면 삶아 남은 고기 쓱쓱.

 

 

가격이 있어 작년에 망설였던 쌀인데, 올해 사보았다.

흠. 아직까진 집앞 야채가게에서 파는 쌀이 더 맛난 것 같다.

 

 

안개 자욱했던 주말 아침.

 

 

아, 이뻐라. 순하고 소중한 새잎들. 쑥쑥 자라라.

 

 

관연이가 아무 날도 아닌데 선물을 보내줬다. 우리 소개해 준 고마운 사람. 이쁘다, 우리처럼-

 

 

주말에 동생이 와서 순대도 사고, 참치도 사고 직접 빵도 구워와서 형부의 퇴사를 축하해줬다. 

 

 

엄마아빠가 농사지은 무청 시래기 만들기. 파는 무가 아니라 크기가 작다.

이번 주말에는 깍두기 담궈야지.

 

 

퇴근길, 마을버스에서 내려서.

 

 

커다랗고 선명했던 달.

 

 

공의 택배는 언제나 정성스럽다. 박스부터 포장까지. 어디다 달아야 이쁠까 아직도 고민 중.

좋은 사람-

 

 

새벽. 씻고 나오면 이제 해가 조금씩 뜬다. 

 

 

아마도 올해 마지막 극장영화겠지. 텅빈 극장에서 재미나게 봤다.

동생에게 추천했는데 유치해서 보고나와서 실망했다고.

 

 

가을.

 

 

인도쌀 주문해서 인도카레도 해먹어봤다. 

 

 

남편이 안하던 짓을 하기 시작했다 2. 빼빼로데이에 꽃을 사줬다.

생화를 사.... 말 꺼냈다가 다시는 안 사준다는 말에 입 닫았다.

 

 

동네 샌드위치집. 맛있다고 하던데 처음 먹어봤다.

양상추가 많아 턱이 아플 정도. 야채 먹고 싶은 날 먹어서 좋았다. 

 

 

받고 싶었던 생화는 민선씨가 사줬다. 축하한다고 꼬맹이들이 들고 왔다. 

 

 

그리고 선물들. 내 주위엔 참 좋은 사람들이 많다.

 

 

싱싱한 것들이 땡기는 요즈음.

 

 

간만에 실과 바늘을 주문했다. 이제 겨울이다. 

올 겨울도 잘 지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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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코짱

from 모퉁이다방 2020. 10. 9. 05:26

 

    하얀색 페코짱 일러스트 에코백을 메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는 할머니를 봤다. 에코백도, 할머니도 무척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길이었는데 왠지 힘이 났다. 나도 귀여운 일러스트가 그려진 에코백을 메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번주에는 차를 뜨거운 물에 우려내 오래 마시고 있다.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마셨던 차라는데, 붉은 덤불이라는 뜻이란다. 면역력에 좋다고. 텀블러에 담아 놓고 뜨거운 온기를 느끼며 호로록 한 모금씩 마시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차는 정말 커피와 다른 것 같다. 커피도 좋지만 차도 좋다. 다 쓴 길쭉한 토마토 소스 병을 잘 씻어 말린 뒤 티백 하나를 넣고 냉장고에 냉침도 해두었다. 오래전 읽은 책들의 기록을 남겨두고 싶은데 어디 메모를 남겨두지 않으니 느낌들이 잘 기억나질 않는다. 이번 달 시옷의 책이 몇 달 전 좋게 읽은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인데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봐야겠다. 잠들기 전에 한 챕터씩. 이번엔 꼭 기록을 남겨야지. 문득, 가을이다. 연휴 첫날 가만히 밖을 내다보니 하늘도 좋고 바람도 좋고 공기도 좋다. 오늘 아침에는 식물들 흙을 체크하고 바싹 마른 아이들에게 물을 듬뿍 주었다. 시원하라고 잎들도 분무해주었다. 얼마 전에 <나의 아저씨>를 다시 봤는데 눈물나는 대사가 있어 그건 핸드폰 메모장에 기록해두었다.

 

- 우리도 아가씨 같은 이십대가 있었어요. 이렇게 나이들 생각하니까 끔찍하죠?

- 전 빨리 그 나이 됐음 좋겠어요. 인생이 덜 힘들거잖아요.

- 감사합니다.

- 생각해보니 그렇다. 어려서도 인생이 안 아프진 않았어.

 

   안 아프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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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from 모퉁이다방 2020. 9. 29. 19:42

 

읽으면서 흠집이 많이 난 책이라 나눔합니다.

필요하신 분 주소, 전화번호, 비밀글로 남겨주시면 택의점 택배 착불로 보내드릴게요.

 

 

하와이 여행에서 가지고 다녔던 책인데, 론리플래닛보다 더 많이 들여다 본 것 같아요.

뭘 빠듯하게 한 여행이 아니여서, 소개된 편집샵 찾아가보고 그랬어요.

사진도 있고 편집도 귀여워서 책으로 하와이 여행하기에 좋은 책 같아요.

 

 

사인본이에요. 내게 더이상 도망은 가지 말자, 하면 는다!의 깨달음을 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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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선

from 모퉁이다방 2020. 9. 24. 07:38


   4호선 안이었다. 자유로가 막힌터라 지하철 안에 자리가 드문드문 있었다. 그 날 나는 작은 숄더백을 메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다리 위에 올려뒀다. 책을 읽고 있었는데 핸드폰 메세지가 계속 와 책을 봤다 핸드폰을 봤다 했다. 다시 책을 읽는데 아주머니가 왼쪽 팔을 만지며 혼잣말로, 그러나 내게 다 들리게 아씨 뭐라뭐라하면서 짜증을 냈다. 그제야 아차, 내 가방 끈이 팔에 닿았구나 싶었다. 사과를 할까 싶었지만 너무 기분 나쁘게 짜증을 내서 말았다. 마치 내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대신 끈이 안닿게 얼음상태로 있었다. 왠지 끈위치를 바꾸는 것도 싫었다. 아주머니는 씩씩거리며 주위 빈 자리를 둘러보다 (빈 자리는 많았다) 두어 정거장을 더 앉아있다 마땅한 자리가 생겼는지 내 앞을 지나 자리를 옮겼다. 평소 같으면 아 왜 끈이 옆사람을 불편하게 하는지도 몰랐지 하고 미안해했을텐데, 이번에는 앞으로 그 아주머니처럼 행동하지 말아야겠구나 생각했다. 어떤 상황을 유연하고 너그럽게 넘어갈 수 있는 여유를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티비에 나오는 인상이 좋은 아주머니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러다 지하철 안에서 옆사람 때문에 짜증이 많이 났던 순간들도 떠올랐다. 나는 티비 속 인상좋은 아주머니처럼 사소한 짜증을 너그럽게 이해하고 재치있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힘들겠지만, 이미 내가 옆자리 짜증내는 아주머니지만, 언젠가 언젠가,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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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

from 모퉁이다방 2020. 9. 13. 17:14

 

    2주간의 재택근무가 끝났다. 지난 금요일에는 운동 할겸 동네 산책을 했는데 새로 생긴 삼겹살집에 사람들이 그득했다. 2주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외식도 하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사람들은 잘도 돌아다니는 구나. 출퇴근시간이 아예 없어지니 책도 많이 읽고 영화도 많이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네. 동생이 추천해 줘서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를 넷플릭스에서 봤는데 귀엽고 두근두근했다. 십대들의 사랑 이야기에 아직도 가슴이 콩닥거리다니. 김민철 씨의 치즈책을 읽고 거금을 들여 치즈 네 개를 주문했고, 보경이는 이웃의 책이라며 연두색 책을 보내줬다. 상주로 내려간 서울아가씨의 이야기다. 텀블벅에서 한수희 작가님의 새 책도 구매예약했다. 어느 저녁에는 대패 삼겹살을, 어느 저녁에는 LA갈비를 구워먹었다. 동생과 친구와 랜선술자리를 갖기도 했다. 거실에 있는 여인초의 새잎은 몇개월동안 돌돌 말린채 미동도 없더니 갑자기 커다란 잎을 짠하고 펼치기 시작했다. 동료가 생일선물로 준 마지막 바스볼로 반신욕을 하고 선풍기로 머리를 말리던 날에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버스씬이 생각이 났다. 수영을 하고 젖은 머리로 버스를 타고 집에 가던 첫째. 버스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바람을 느끼던 그 표정. 군포에 오고 낮 풍경을 오래 보질 못해 아쉬웠는데 그 꿈은 이뤘다. 초록초록한 낮의 풍경을 자주 내다보았다. 내일 옷은 어떻게 입어야 하나. 재택근무 하는 사이에 가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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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요

from 모퉁이다방 2020. 9. 3. 19:35

 

 

    쏴아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어제는 비가 오고 있었고, 오늘은 숲 속 나무들이 엄청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제는 태풍이 올라오는 중이었고, 오늘은 태풍이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태풍에 스친 바람은 얼마나 센지 나무들이 쏴아하고 대나무 소리를 냈다. 멀리서도 그게 들렸다. 속이 시원했다. 그 바람을 다 맞고 싶어 방마다 창문을 다 열어두었다가 방문 하나가 쿵하고 큰소리를 내며 닫혀 황급히 모두 닫았다. 책방 문만 남겨두고.

 

    이번주는 재택근무 중이다. 생애 처음이다. 재택근무는. 정말이지 재택근무 체질이라고 느껴지는 일주일인데, 다음주면 다시 출근을 해야 하니 몸이 이 편안함에 익숙해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아침에도 원래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난다. 그러고 나면 꽤 많은 시간이 남는데, 아침을 만들고 점심을 만들어 둔다. 책을 몇 장 읽고 정성스레 드립커피를 내린다. 꼭 그럴 필요는 없지만 샤워도 한다. 8시 40분 즈음이 되면 메신저로 출근 보고를 하고 일을 시작한다. 원격 속도가 느려 힘들지만 할 만 하다. 출퇴근 시간 자체가 없어졌으니까. 손목이 아파 마우스패드도 쿠팡으로 주문해서 바로 받았다. 12시 반 즈음이 되면 아침에 만들어 놓은 점심을 데운다. 2인분이다. 남편도 이번 주는 집에 와서 점심을 먹는다고 해서. 첫 날은 카레밥을 먹고, 둘째 날은 짜장밥을 먹었다. 큰 손이라 음식은 늘 많이 만드는데 이번주는 딱 2인분씩만 만들어 보기로 했다. 점심시간은 회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이라 밥 먹고 후식이나 음료를 먹으면 끝. 오후 업무를 하고 5시 50분이 되면 역시 메신저로 퇴근보고를 한다. 칼퇴해도 집, 조금 더 일하고 퇴근해도 집이다. 파주에서 퇴근하고 집에 오면 두 시간 걸리는데. 별 움직임이 없어 (방-화장실-부엌이 전부) 배가 별로 고프지 않은데도 남편이 퇴근해오면 뭔갈 챙겨먹는다. 그렇게 다음날 아침 이른 출근 걱정 없이 놀다 잔다. 살 찐다고 둘이 나가서 딱 하루 운동했네.

 

   회사에는 창문도 없고 조용한데, 집에는 책상 바로 옆에 창문이 있고 대체로 활짝 열어둔다. 너무 조용해서 라디오를 틀어둔다. 주로 CBS를 틀어두는데 어제는 비가 와서 그런지 좋은 음악들이 줄줄이 나왔다. 어떤 곡을 듣다가 이현우 노래인데 제목이 뭐였지, 너무 좋은데 하고 네이버를 검색 해보니 이현우의 비가 와요, 였다. 오늘 퇴근을 하고 동네 수퍼에 우유와 피자치즈를 사러 나가면서 이어폰을 끼고 이 노래를 들었다. 태풍이 지나간 하늘에 커다란 구름이 가득했다. 바람이 불어 구름도 빠르게 움직였다. 구름이 지나간 자리가 보였다. 해가 지고 있어 구름 색깔도 묘했다. 이현우가 노래했다. 또 비가와요 널 보고싶게 잊을만하면 또 비가와요. 그리고 또 노래했다. 너에게는 잘해주고 싶었는데. 아, 이 가사에 뭔가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이십대로 돌아간 듯한 몽글몽글한 마음. 다시 느낄 수 없을 것 같고, 그래서 다행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엄청 그리운 마음. 태풍이 지나간 거리를 걷는데 태풍이 지나간 마음이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 아, 내일 재택 마지막 날이다. 점심으로 뭘 해 먹을까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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