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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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모퉁이다방 2021. 1. 6. 13:40
새해는 병원이었다. 1월 1일 밤, 갑자기 피가 왈칵 쏟아졌다. 말 그대로 왈칵. 연휴라고 동생이 와서 남편이랑 셋이 알찜을 포장해와 먹고 있었다. 화장실로 가는 그 짧은 순간에 몇번이나 기도했다. 제발, 제발, 제발. 흥건한 피였다. 덩어리도 나왔고 피가 계속 쏟아졌다. 동생과 남편이 달려왔고 나는 잘못된 것 같아, 어떡해를 연발했다. 남편이 119를 부르겠다고 했다. 동생은 언니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라고 토닥여줬는데 얼굴에 겁이 가득했다. 초기에도 한번 피가 난 적이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화장실을 갔는데 빨간 피가 묻어나왔다. 소량이라도 빨간 피는 좋지 않다고 했는데. 그 날도 나는 남편에게 잘못된 것 같아를 연발했고 남편은 응급실에 가보자고 했다. 팀장님께 연락하고 응급실에 갔다. 간호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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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모퉁이다방 2020. 12. 30. 05:37
아빠는 주례사에서 너희는 자신처럼 살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커덩했다. 아빠는 딸의 중요한 날, 꾸미지 않고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한 것이다. 커오는 동안 나는 자주 아빠의 외로움과 마주했다. 아빠의 외로운 어깨를 뒷모습으로 마주하면 결혼식장에서처럼 가슴이 철커덩했다. 를 읽으며 가슴이 아리면서도 다행이다 싶었던 건 아빠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아빠, 아빠처럼 외로웠던 사람이 여기 또 있었네. 지금보다 젊은 시절 아빠는 과묵했다. 힘들고 외로워도 그 감정들을 잘 내뱉지 않는 사람이었다. 대신 바둑을 두고 밤시간 사무실에서 혼자 시간을 오래 보내셨다. 요즘의 아빠는 수다쟁이다. 그동안 못했던 말을 다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저 먼 옛날 얘기도 끊임없이 이야기하신다. 그래서 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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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모퉁이다방 2020. 12. 6. 08:37
종로에서였다. 길을 가는데 누군가 반갑게 인사를 했다. 처음엔 정말 누군지 몰라 대꾸도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려 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내 뒤통수에 대고 엄청 섭섭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 사람을 한 번 더 쳐다봤는데 생김새가 조금 달라졌지만 아무개를 닮은 거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냥 지나치려 했다. 아무개가 그동안 무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무개는 특유의 엄청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고 옆에 있던 누군가가 나를 쫓아왔다. 그 누군가는 빠른 걸음으로 쫓아오며 나를 혼냈다. 누군지 아시잖아요, 사람이 사람을 그렇게 모른 척 하면 안되죠. 나를 훈계했다. 나는 그 누군가에게 무슨 말을 했는데 그 사람이 순간 얼더니 맞아요, 하며 울음을 참는 모습을 보였다. 나는 순간 서러워져 엉엉 울었다. 그렇게 엉엉 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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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여름에서 늦가을모퉁이다방 2020. 11. 28. 09:39
이번주 바람이 무척 거세졌다. 버스를 기다리며 찬바람을 맞고 있는데 손이 시렸다. 이제 겨울이 왔구나 싶었다. 늦잠을 자리라 다짐했지만, 6시에 눈이 떠졌다. 이불 속에서 지난 사진들을 보다가 늦여름에서 늦가을 사이 사진들을 정리해두자고 생각했다. 많은 일이 없었지만 많은 일이 있었던. 올 가을은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좋았던 재택근무 시절. 아끼는 엄마잔을 꺼내 커피를 진하게 내리고 근무 준비. 주말에는 살 뺀다고 밥이 일체 들어가지 않은 김밥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아직, 여름. 아직, 초록. 실버스타의 소주 칠링. 평일에 집에서 이런 구름을 볼 수 있었던 건 재택 덕분이었다. 동생이 각자 술과 안주를 준비해서 랜선술자리를 갖자고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책 사고 받은 사은품 잔.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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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코짱모퉁이다방 2020. 10. 9. 05:26
하얀색 페코짱 일러스트 에코백을 메고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는 할머니를 봤다. 에코백도, 할머니도 무척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길이었는데 왠지 힘이 났다. 나도 귀여운 일러스트가 그려진 에코백을 메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번주에는 차를 뜨거운 물에 우려내 오래 마시고 있다. 남아프리카 원주민들이 마셨던 차라는데, 붉은 덤불이라는 뜻이란다. 면역력에 좋다고. 텀블러에 담아 놓고 뜨거운 온기를 느끼며 호로록 한 모금씩 마시면 마음이 안정이 된다. 차는 정말 커피와 다른 것 같다. 커피도 좋지만 차도 좋다. 다 쓴 길쭉한 토마토 소스 병을 잘 씻어 말린 뒤 티백 하나를 넣고 냉장고에 냉침도 해두었다. 오래전 읽은 책들의 기록을 남겨두고 싶은데 어디 메모를 남겨두지 않으니 느낌들이 잘 기억나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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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선모퉁이다방 2020. 9. 24. 07:38
4호선 안이었다. 자유로가 막힌터라 지하철 안에 자리가 드문드문 있었다. 그 날 나는 작은 숄더백을 메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다리 위에 올려뒀다. 책을 읽고 있었는데 핸드폰 메세지가 계속 와 책을 봤다 핸드폰을 봤다 했다. 다시 책을 읽는데 아주머니가 왼쪽 팔을 만지며 혼잣말로, 그러나 내게 다 들리게 아씨 뭐라뭐라하면서 짜증을 냈다. 그제야 아차, 내 가방 끈이 팔에 닿았구나 싶었다. 사과를 할까 싶었지만 너무 기분 나쁘게 짜증을 내서 말았다. 마치 내가 일부러 그런 것처럼. 대신 끈이 안닿게 얼음상태로 있었다. 왠지 끈위치를 바꾸는 것도 싫었다. 아주머니는 씩씩거리며 주위 빈 자리를 둘러보다 (빈 자리는 많았다) 두어 정거장을 더 앉아있다 마땅한 자리가 생겼는지 내 앞을 지나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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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택모퉁이다방 2020. 9. 13. 17:14
2주간의 재택근무가 끝났다. 지난 금요일에는 운동 할겸 동네 산책을 했는데 새로 생긴 삼겹살집에 사람들이 그득했다. 2주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외식도 하지 않은 사람도 있는데, 사람들은 잘도 돌아다니는 구나. 출퇴근시간이 아예 없어지니 책도 많이 읽고 영화도 많이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네. 동생이 추천해 줘서 를 넷플릭스에서 봤는데 귀엽고 두근두근했다. 십대들의 사랑 이야기에 아직도 가슴이 콩닥거리다니. 김민철 씨의 치즈책을 읽고 거금을 들여 치즈 네 개를 주문했고, 보경이는 이웃의 책이라며 연두색 책을 보내줬다. 상주로 내려간 서울아가씨의 이야기다. 텀블벅에서 한수희 작가님의 새 책도 구매예약했다. 어느 저녁에는 대패 삼겹살을, 어느 저녁에는 LA갈비를 구워먹었다. 동생과 친구와 랜선술자리를 갖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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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요모퉁이다방 2020. 9. 3. 19:35
쏴아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어제는 비가 오고 있었고, 오늘은 숲 속 나무들이 엄청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어제는 태풍이 올라오는 중이었고, 오늘은 태풍이 지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태풍에 스친 바람은 얼마나 센지 나무들이 쏴아하고 대나무 소리를 냈다. 멀리서도 그게 들렸다. 속이 시원했다. 그 바람을 다 맞고 싶어 방마다 창문을 다 열어두었다가 방문 하나가 쿵하고 큰소리를 내며 닫혀 황급히 모두 닫았다. 책방 문만 남겨두고. 이번주는 재택근무 중이다. 생애 처음이다. 재택근무는. 정말이지 재택근무 체질이라고 느껴지는 일주일인데, 다음주면 다시 출근을 해야 하니 몸이 이 편안함에 익숙해지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아침에도 원래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난다. 그러고 나면 꽤 많은 시간이 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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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무국모퉁이다방 2020. 7. 14. 22:24
일요일에는 비가 왔다. 혼자 있는 동안 자두를 두개 꺼내 먹고 티비를 보다 잠이 들었다. 선잠이었다. 책을 읽으려다 실패했다. 갑자기 소고기무국 생각이 났다. 냉장고에 반쯤 남은 무가 있었다. 맑고 깊게 국을 끓여 새로 한 밥을 말아 푹 익은 김치를 얹어 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귀리를 섞어 쌀을 씻은 뒤 밥솥을 닦고 취사 버튼을 눌러뒀다. 집에서만 입는 얇은 원피스 위에 가디건을 걸치고 츄리닝 바지를 입었다. 우산을 쓰고 정육점에 갔다. 롯데슈퍼는 휴무였다. 슈퍼에 갔으면 뭔가 더 살 게 있었는데 정육점이어서 국거리용 소고기만 샀다. 정육점에 들어가기 직전에 백종원 레시피를 검색한 터라 수입산 국거리 소고기 200g 주세요, 라고 정확하게 말했다. 아저씨는 냉동인데 괜찮아요? 물었고 좋다고 했다. 두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