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다방'에 해당되는 글 450건

  1. 소고기무국 4 2020.07.14
  2. 드림캐쳐 4 2020.07.05
  3. 유월의 근황 4 2020.06.23
  4. 금밤 10 2020.04.18
  5. 집밥 8 2020.04.05
  6. 따아와 라떼 4 2020.03.21
  7. 치통 2 2020.03.04
  8. 삼월 2020.03.02
  9. 20200202 6 2020.02.05
  10. 출국 2020.01.05

소고기무국

from 모퉁이다방 2020. 7. 14. 22:24

 

   일요일에는 비가 왔다. 혼자 있는 동안 자두를 두개 꺼내 먹고 티비를 보다 잠이 들었다. 선잠이었다. 책을 읽으려다 실패했다. 갑자기 소고기무국 생각이 났다. 냉장고에 반쯤 남은 무가 있었다. 맑고 깊게 국을 끓여 새로 한 밥을 말아 푹 익은 김치를 얹어 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귀리를 섞어 쌀을 씻은 뒤 밥솥을 닦고 취사 버튼을 눌러뒀다. 집에서만 입는 얇은 원피스 위에 가디건을 걸치고 츄리닝 바지를 입었다. 우산을 쓰고 정육점에 갔다. 롯데슈퍼는 휴무였다. 슈퍼에 갔으면 뭔가 더 살 게 있었는데 정육점이어서 국거리용 소고기만 샀다. 정육점에 들어가기 직전에 백종원 레시피를 검색한 터라 수입산 국거리 소고기 200g 주세요, 라고 정확하게 말했다. 아저씨는 냉동인데 괜찮아요? 물었고 좋다고 했다. 두덩이를 꺼냈는데 4천원 정도였다. 100g 더 달라고 했다.

  

   집에 오니 갑자기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다. 카모메 식당을 틀었다가 끄고 빵과 스프, 고양이와 함께 하기 좋은 날을 틀었다.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이들이 화면에 차례차례 등장했다. 영화는 여전했다. 등장인물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으며 무국을 끓였다. 아무도 말하지 않는 순간들도 있었다. 키친타올로 핏물을 살짝 빼고 저울을 꺼내 무의 무게를 재봤다. 껍질을 벗기고 꼭지를 떼어내면 레시피의 무게가 될 것 같았다. 무도, 양파도 먹기 좋게 잘랐다. 백종원의 레시피에는 양파가 들어갔다. 참고한 블로그에는 이 양파가 소고기의 누린맛을 없애주는 것 같다고 했다. 들기름을 두르고 핏물을 뺀 소고기를 넣었다. 소고기가 적당히 익어 썰어둔 무를 넣었다. 무가 적당히 익자 맥주잔 500cc에 물을 채워 세 잔을 냄비에 부었다. (그렇다. 집에 호프집 500cc 맥주잔이 있다!) 까나리액젓이 없어 멸치액젓과 국간장을 넣었다. 간마늘도 넣었다. 그리고 푹 끓였다. 아주 푹. 그렇게 혼자 만든 무국을 둘이서 나눠 먹었다. 과연 마지막에 넣은 파와 양파가 국을 더 깔끔하게 만들어 준 것 같았다. 일요일이니 이거면 되었다고 생각되는 맛이었다. 이상하게 이번주는 고되네. 화이팅, 이라고 조그맣게 외쳐보는 화요일 밤이다. 여름밤바람이 위안이 된다. 몬스테라 화분이 두 개 있는데, 하나가 잎을 펼쳤고 또 하나가 잎을 준비하고 있다. 식물들도 힘을 내고 있으니 인간들도 화이팅화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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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캐쳐

from 모퉁이다방 2020. 7. 5. 16:56

 

   모성애라는 거 낳았다고 바로 생기는 건 아닌가봐. 친구가 말한 적 있다. 지금에야 둘도 없는 엄마가 되었지만 출산을 하고 난 뒤 아직 엄마가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함께 시간을 오래 보낸 지금은 서로에게 둘도 없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안방에는 침대와 서랍장, 친구가 선물해준 화분이 있다. 서랍장 위에 티비가 있고 가습기가 있고 여름이 되어 자그마한 선풍기도 마련했다. 청첩장을 담은 나무액자도 올려놓았고 이제는 향이 나지 않지만 여전히 올려둔 보경이의 디퓨저와 다이소 시계, 언젠가 솔이의 마니또 선물이었던 자그마한 조명이 있다. 침대 양옆으로 작은 공간이 있어 각자의 물건을 올려놓을 수 있다. 나는 책도 올려놓고 스탠드도 올려놓고 고무줄과 안경도 올려놨는데 남편은 딱 핸드폰 충전기만 올려놓는다. 지난 달까지만 해도 내가 안쪽에서 잤다. 부부라는 것도 결혼했다고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닌 거겠지. 새벽에 나쁜 꿈을 꾸다 깨는 날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올해 늦봄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좋지 않은 꿈을 자주 꾸었고 그때마다 새벽에 깼다. 그러면 내 옆에 동생이 아닌 남편이 누워 있는 게 어색하게 느껴지곤 했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우리 둘이 어느 날부터 한 침대에서 자고 깨는 게 생경하게 느껴졌다. 싸우거나 안 좋은 일을 겪은 것도 아닌데 그 새벽에 땀을 조금 흘리며 깨고 나면 이상하게 그랬다. 결혼한 직후도 아니고 여러 달을 함께 살았는데도. 그럴 때면 친구의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옆사람에게 나쁜 꿈을 꾸었다고 말하고 다시 잤다. 그러면 잠결에 응? 그랬어? 라고 대답해줬다. 언젠가 동생이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날이 늘었다면서 침대가 딱딱해서 그런가봐 했는데 아마도 같은 이유일 것 같다. 늘 좁은 방에서 복작거리며 잤는데 혼자 자고 깨는 일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경해지는 새벽이 있을 것이다. 남편도 그럴테고. 

 

   그 날은 비가 오는 금요일이었는데 동생에게 줄 게 있어 퇴근하고 동네로 간다고 했다. 양꼬치가 땡겨 함께 먹기로 했다. 역시 양꼬치 좋아하는 남편이 여차여차해서 동생네 동네까지 온다고 했다. 셋이 만나 일차로 양꼬치를 먹고 이차로 멍게해삼을 먹었다. 시간은 늦었고 비도 오고 술기운에 몸이 느슨해져 동생네 집에서 삼차를 하고 자고 가기로 했다. 동생이 터를 잡은 동네는 오래된 곳이라 구석구석 맛있는 노포들이 많다. 동생은 우리를 좁은 계단이 있는 이층의 맥주집으로 데려갔다. 와 본적은 없는데 맛집이래. 그리고 능숙하게 차가운 소세지와 치즈를 포장해달라고 했다. 집에 와 그 안주를 늘어놓고 와인을 마셨다. 우리가 선물해준 커다란 나무 테이블에 셋이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동생이 칫솔을 꺼내줬고 침대 아래에 요를 펴줬다. 동생은 침대 위에서 우리는 침대 아래 요에 누워 셋이 한 방에서 잤다. 그야말로 숙면했다. 동생은 일찍 일어나 아침을 해먹인다고 식빵을 사왔다. 양배추 넣은 계란토스트 만드는 냄새에 잠에서 깼다. 남편은 그뒤로도 혼자 편안하게 계속 잤다. 토스트를 먹고 번갈아 샤워를 하고 커피까지 마시고 나왔다. 남편이 좋았다, 라고 했다. 편했다고. 그 밤의 풍경이 가끔 생각이 난다. 가습기를 틀어두고 자그마한 방에 셋이 옹기종기 모여 잔 밤. 동생은 그 날도 말했다. 또 와요, 형부. 어제는 방문에 달아두었던 소윤이의 언젠가의 선물을 창문 위에 옮겨 달았다. 방문을 늘 열어두니 잘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잘 보인다. 바람이 불면 살짝살짝 춤을 추는 모습까지. 드림캐쳐라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악몽을 걸러주고 좋은 꿈만 꾸게 해준다는 의미로 만들었던 토속 장신구이다. 지난 달에는 잠자리를 바꿨다. 남편이 안쪽에서 자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책이며 스탠드며 안경을 모조리 옮겼고 안쪽 공간에는 핸드폰 충전기 하나만 놓여져 있다. 남편은 옮긴 자리가 아주 마음에 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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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의 근황

from 모퉁이다방 2020. 6. 23. 22:22

 

  시옷의 독촉이 없었다면 이 글은 아마도 아주 나중에 쓰여지거나 아예 쓰여지지 않았을 거다. 평소처럼 저녁을 먹고 요즘 흥미롭게 보고 있는 왓챠의 <검사내전>을 보았을 거고 그러다 벌써 11시네, 자야겠다 그러면서 씻고 정리하다 12시가 되었을 거다. 그러다 진짜 잠들었겠지. 요즘은 정말 눕자마자 잔다. 아, 아니다. 지난 주에는 밤산책도 했다. 긴 출퇴근 끝에 군포에 입성하면 외식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거의 집에만 있는데 어느 날 동생이 자고가면서 동네 산책길을 알게 됐다. 밤에 굉장히 많이 먹고 잤는데 동생이 아침에 눈뜨자마자 걸어야겠다고 했다. 좀더 오래 걸어보고자 평소에 가지 않는 길로 갔는데 왠걸 일년 가까이 모르고 있던 멋진 산책코스가 있었다. 그 길에 몇백년 된 은행나무도 있고, 나무의자와 테이블도 있고, 물놀이 놀이터도 있었다. 노을을 멋지게 볼 수 있는 장소도 있었다. 물론 그 날은 노을을 보지 못했지만. 동생과 아침에 걸었던 길을 밤에 둘이서 걸었다. 곳곳에 조명이 들어와 아침과는 다른 느낌으로 근사했다. 주말에 혼자 아침산책을 해봐야지 했는데 그러지 못했네. 오늘은 남편이 약속이 있어 혼자 저녁을 먹고 밀린 설거지를 했다. 빨래까지는 개지 못하겠어서 바닥에 (하하) 그대로 뒀다. 식물들에게 안부를 물었고. (식물에게 말을 거는 것까진 괜찮은데 식물들이 답을 해오면 그건 정신이 이상한 거란다. 아직까지는 나만 말을 건다. 언니 왔어~ 잘 있었니? 오늘 더웠지? -_-;) 출퇴근길에 책을 많이 읽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고 핸드폰을 자주 본다. 사고 싶은 식물도 들여다보고 밤새 골라놓은 물건도 주문한다. 지난 주말에는 화원에 가 보경이가 향이 좋다며 추천했던 율마를 샀다. 세 포기로 나눠 심을 수 있을 것 같아 작은 화분과 흙도 주문했다. 집에 푸른 잎들 뿐이어서 꽃이 있는 자그마한 화분도 하나 샀다. 꽃이 오래 핀다는데 진짜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요즘 식물에 빠져있다는 이야기. 사실 이 글의 제목은 <썸원그레이트>였는데 그 영화 이야기는 시작도 못하고 끝나네. 제목을 바꿨다. 유월의 근황으로. 분류도 바꿨다. 극장에 가다에서 모퉁이다방으로.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이건 남겨둬야지, 이 이야기는 써둬야지, 하면서 두 달동안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못했네요. 후회막심입니다. 머릿속의 생각들은 연기처럼 사라지는 건데. 여름에는 더욱더 분발해서 기록을 남기겠습니다. 아, 요즘 왠일인지 여름이 조금씩 좋아지고 있어요. 여름맥주는 꿀맛이고, 해가 긴 것이 이렇게나 축복인지 몰랐네요. 그러니 올 여름도 화이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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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밤

from 모퉁이다방 2020. 4. 18. 14:16

 

    어제는 외식을 하기로 했다. 역에서 내려 마을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에 짧은 나무 길이 있는데, 그 옆으로 약국이 있고 치킨집이 있고 초밥집이 있다. 길과 가게 사이에는 작은 화단이 있는데 초밥집은 간이 테이블을 화단 너머 길가에 놓아놓고 회와 초밥을 포장해서 내놓고 팔고 있었다. 평소 지나가면서 맛집일 거라는 생각을 못했는데 어느 날 남편이 초밥집 얘길 꺼냈다. 너 걸어오는 길에 초밥집 있지? 거기 회사 사람들이랑 갔는데 꽤 맛있더라고. 언제 한번 가자.

 

   들어가보니 정말 작은 가게였다. 작은 테이블이 세 개 있고 한쪽 벽에 1인석 바가 있었다. 메뉴도 단촐했다. 회와 초밥, 산낙지 같은 국물 없는 메뉴들. 숙성회를 파는 가게였다. 작지만 천장이 높아 그리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주방장이자 사장님이신 나이가 꽤 많으신 남자 분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깔끔하게 흰색의 요리복과 모자를 쓰고 계셨다. 초밥 열피스 하나, 이만원짜리 모듬 회, 테라 한 병, 후레쉬 한 병. 사장님이 우리가 시킨 메뉴를 기분 좋게 한 번씩 소리내서 말했다. 잘 오셨어, 느낌이 드는 톤이었다. 미소장국이 나왔고 초록콩이 나왔다. 동그랗고 투명한 접시에 예쁘게 담긴 숙성회가 나왔고,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초밥 열 피스가 나왔다. 우리는 소맥을 말았다. 사장님이 보시더니 소맥, 좋지요, 말씀하셨다.

 

   남편은 이제 어린 시절 받았던 상처에 대해 조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한다. 처음 그걸 내게 말했을 때 만취한 상태에서 아주 많이 서럽게 울면서 이야기를 했었다. 그뒤로도 어두운 표정으로 그 이야기를 했었다. 어른이 왜 그랬을까. 나는 아무 잘못한 게 없는데.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많았다고 했다. 시골집에 가면 할머니도 고모님들도 아버님도 남편이 어릴 때부터 아주아주 착했다고, 순하고 뭐든 얘기하면 그대로 잘 따랐다고 칭찬을 많이 하신다. 어느 날 남편은 내게 왜 그랬는지 아냐고,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자신도 마냥 착한 아이라서 그랬던 건 아니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남편이 성질 부리는 나를 마냥 받아주지 않고 이따금씩 자신도 성질을 부릴 때 고맙다. 그래, 너도 성질 내. 마냥 착하게만 굴지 말고. 이제 나도 남편의 상처에 대해 조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한다. 어제도 그랬다. 아직도 왜 그랬을까 많이 생각한다고. 그러면 나는 괜찮어, 보이지 않지만 모두의 집에 각자의 문제들이 있어, 너만 그랬던 게 아니야. 우리집을 봐. 남편은 그래도 그건 너무 큰 상처였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는 이야기를 이어나가다가 술잔을 부딪힌다. 잘 살아보자고 다짐하면서. 그것 역시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

 

   사장님은 다 듣고 있었을 거다. 워낙 작은 가게이고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으니까. 정말 놀라웠던 건 밖에 내놓은 간이테이블 위의 회를 누가 사가나, 사가기나 할까 싶었는데 가게 안에 앉아 있어보니 많은 사람들이 회를 사갔다. 사장님은 단골들이 있다고 했다. 한번 맛본 사람들은 착한 가격에 맛도 좋아 꼭 다시 온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다시 와야지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뭔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우리만의 아지트가 생긴 기분이었다. 사장님은 우리에게 보기 좋아 보인다고, 남편에게 아내를 잘 얻은 것 같다고 인상이 좋다고 말해주셨다. 고맙게도. 우리는 회도 초밥도 정말 맛있다고 다시 또 올거라고 말했다. 사장님이 회를 뜨는 곳에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가만 보니 사장님의 아주 젊은 시절의 모습이었다. 심지어 잘 생기셨다. 내가 사장님이냐고 물었고, 사장님은 맞다면서 자신은 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줄곧 이 일을 했다고 했다. 장인이라는 게 따로 있겠냐면서 제주도의 큰 가게에서 주방장으로 일했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자신의 간식으로 싸온 자그마한 고구마도 두 개 챙겨주셨다. 연세가 많아 보였는데 중학교이나 고등학생 즈음인 아들이 있었다. 아들에게 어딘가로 배달을 시키는 것 같았는데, 갔다오면 아빠랑 같이 저녁 먹자, 라고 말씀하셨다. 아빠. 아빠. 나도 늘 부르는 호칭인데 나이가 지긋하신 사장님이 말하니 뭔가 더 의지가 되는 느낌이었다. 무척이나 다정하게 들렸다.

 

   또 가야지. 화원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있는 그 곳. 가서 또 천천히 금밤을 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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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밥

from 모퉁이다방 2020. 4. 5. 19:05

 

  집에 가려면 지하철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를 한번 타야 한다. 버스정류장까지는 일단 하늘다리식의 긴 통로를 지나 계단을 내려와 밖으로 나와야 한다. 요즘 자주 기웃거리는 화원을 지나 조그마한 다리를 지나고 나무길을 오분여 걸으면 횡단보도가 나온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정류장이 있는데, 정류장 가기 직전에 마트가 있다. 그리 크지 않은데 없는 게 없는 마트다. 마트 밖에는 세일하는 식재료와 과일들이 진열되어 있다. 나는 매번 그걸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유심히 들여다본다. 회원으로 전화번호를 등록해 놓은 덕분에 일주일에 두세번 세일 품목을 정리한 문자도 받는다. 한돈암돼지삼겹살 1근 9900원, 노르웨이자반 1팩(1손 2마리) 3980원, 시금치 1단 990원, 백오이(특) 1봉(5개) 2980원. 나는 이 정도의 소규모 마트가 딱 맞다. 큰 마트는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하게 된다. 당장 필요없는 걸 너무 많이 사게 되고. 이 마트는 들어서면 제철 채소가 한 눈에 보인다. 연근이 나올 때는 연근을 사다가 조림을 해먹었고, 무가 싸게 나올 때는 인터넷을 검색해 깍두기를 해먹었다. 요즘에는 달래도 나오고, 냉이도 나오고, 미나리도 나온다. 달래와 냉이는 사다가 된장찌개에도 넣고, 간장에 넣어 잘 구운 곱창김에 찍어 먹었다. 봄이 왔구나, 마트를 들어서면서 느낀다. 요즘 싱싱한 봄채소들이 그득하다. 금요일에는 빵빵하게 채워진 미나리 한 봉지를 990원에 사서 귀가했다. 부침가루와 튀김가루를 일대일로 섞고 얼음물을 넣고 살짝 데친 새우도 넣었다. 미나리는 따로 손질할 필요없이 싱싱하다. 찬물에 씻어 적당한 크기로 잘라 반죽에 넣었다. 남편이 머리를 자르고 8시쯤 온다고 했으니 그때 딱 부치면 되겠다. 귀리를 넣은 밥도 30분 전에 좋은 냄새를 풍기며 취사가 완료되었다. 어제 남은 미역국도 꺼내뒀다. 오늘 숙모가 전화를 주시면서 다음주에 잘 익은 파김치를 보내주신다고 했다. 어제는 계속 생각났던 알찜을 둘이 느즈막히 나가 먹고 왔다. 이번주에 다퉜는데 어제 외식을 하며 얘기를 많이 하고 말끔하게 풀었다. 처음 해보는 미나리 새우전은 어떤 맛이려나. 배가 슬슬 고파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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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아와 라떼

from 모퉁이다방 2020. 3. 21. 10:43

 

  매번 혼자 남겨지는 사람에게 마음이 쓰였다. 고등학교 때는 혼자 있는 아빠에게 그랬고, 최근에는 동생에게 그랬다. 대학교 때 나도 혼자였는데 그건 괜찮았다. 지난 주에는 치과 때문에 하루 연차를 냈다. 남편이 동생집이 치과와 가까우니 하루 자고 바로 가면 어떻겠냐고 그래서 그러겠다고 했다. (그는 내 아침 출근길 지하철 역까지 운전을 안해도 되는 것이다! 역시나 술약속을 잡았더라!) 마침 그날 휴가자가 많아 야근을 했고 동생집에 느즈막히 도착했다. 지하철 역에서 나오자 통닭을 파는 트럭이 보였다. 나는 세상의 모든 전기구이 통닭트럭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데 지금까지 최고는 응암역 길 건너에 있던 할아버지 통닭이다. 아주 바삭하고 아주 부드럽고. 포장해주실 때도 세심하게 까만봉지를 묶어 꽉 조여주신다. 가는 길에 냄새가 많이 날까봐, 라고 나는 생각했다. 2주 정도 안 나오셨을 때는 기다렸다고 고백까지 했을 정도. 전기구이 통닭을 사고 편의점에 들러 3개에 9900원 하는 빅웨이브 캔을 샀다.

 

  동생네 집은 골목을 여러 번 들어가야 한다. 들어가는 길이 여러가지인데 나는 늘 길이 헷갈려 멀리 돌아간다. 신축빌라에 방이 하나 있고 거실겸 주방이 하나 있다. 동생이랑 한달 넘게 돌아다니면서 집을 봤는데 이 집에 들어왔을 때 여기다, 하는 느낌이 들었다. 동생은 반신반의했지만 나는 확신했다. 방에는 나무침대가 있고 까만색 행거가 있고 티비가 있고 길쭉한 화장대가 있다. 티비를 제외하고 거의 다 새로 샀다. 동생은 이 집을 꾸미기 위해 엄청난 검색과 돈과 시간을 들였다. 거실 겸 주방에는 나와 남편이 사준 커다란 나무책상과 의자가 있다. 이렇게 큰지 모르고 주문했는데, 공간의 1/3 정도 차지하는 것이다. 처음엔 너무 큰 것 아닌가 싶었지만 지금은 동생의 힐링포인트라고. 블라인드를 살짝 올려놓고 창밖의 야경을 보면서 술을 마신다고 한다. 라디오가 동생의 말벗이라고. 틈새 빈 공간은 수납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검색에 검색을 거듭한 뒤 딱 맞는 수납장을 샀다. 방과 거실 겸 주방을 연결하는 문은 반투명 유리인데 거기에 와인을 좋아하는 동생이 와인산지 지도를 두 개 나란히 붙여뒀다.

 

  나는 통닭 봉지를 뜯었고, 동생은 맛난 화이트 와인이 남았는데 먹을겨? 하더니 잔을 내왔다. (이 와인을 어제 이마트 트레이더스 가서 총 다섯 병 구매했다. 세 병은 구매대행이지만. 진짜 맛났다.) 우리는 금요일 밤 동생이 그러듯이 라디오를 틀어놓고 블라인드를 살짝 올리고 창밖의 야경을 내다보며 와인을 마시고 통닭을 먹었다. 맥주도 마셨고, 나중에 동생이 치즈와 올리브 와인을 내와서 그것들도 먹었다. 반년 정도 혼자 살아 본 동생이 혼자 사는 삶의 좋은 점과 좋지 않은 점을 얘기해줬다. 좋은 점은 언니가 좋아하는 티비를 억지로 같이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고 (-_-;), 좋지 않은 점은 역시나 외로움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주말에 밖에 나가지 못하게 되면서 이것이 자신의 노년의 삶 아닐까 생각을 한다고.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명상에 대한 책을 많이 읽고 있다고 했다. 11시가 되자 동생은 침대 밑에 요를 깔아줬다. 나는 예의 티비를 억지로 같이 봐야하는 언니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티비를 켰다. 그렇게 가습기 두 개를 켜놓고 함께 잠들었다.

 

  다음 날 동생은 출근을 하면서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차가운 라떼를 만들어 각각 텀블러 안에 넣어두고 갔다. 전날 회사에서 받아온 수제김밥 두 톨과 함께. 나는 어제치의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이곳저곳 동생에게 보이지 않는 집안 때를 조금 제거해 준 뒤에 씻고 머리를 말리고 옷을 바꿔 입고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봤는데 집 전체가 한 눈에 보였다. 순간 동생이 잘 살고 있다, 이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다 생각이 들었다. 역시 내 확신이 맞았다. 안락하고 따뜻한 집이었다. 동생에게 커피가 맛났다고 말하니 이렇게 답이 왔다. "또와 코지하우스. 모닝커피저녁와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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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통

from 모퉁이다방 2020. 3. 4. 23:30

 

   주말부터 왼쪽 이가 욱신거렸다. 낮에는 아무 이상도 없는데, 밤에 자다가 너무 아파 깨곤 했다. 치아 상태가 엉망일 때가 있었는데, 그때도 이런 치통을 느낀 적은 없어서 주말 내내 불안했다. 다니는 치과에 전화를 했는데 화요일 야간진료 예약이 꽉 찼다고 했다. 아파서 잠을 못 잔다고 하니 와보란다. 얼마나 아픈가, 온도에 따라 통증이 있는가, 음식을 씹을 때도 아픈가 등등의 질문이 이어지고 결국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 씨티를 찍었다. 왼쪽 윗쪽 사랑니 앞의 이가 이상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뿌리에 염증이 생기기 시작한 것 같다고. 아무래도 신경치료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흑- 치아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게 또 후회된다. 정말이지 치아가 튼튼한 것은 복이다. 큰 복- 평일 오전에만 가능하다고 해서 날짜를 잡고 치통을 가라앉혀줄 약을 처방받았다. 약 먹고 잤음에도 어제 아파서 또 깼다.

 

   집에 화분이 여섯개 있다. 둘은 입주가 끝날 무렵에 떨이로 팔던 화분이고 셋은 선물받은 화분, 하나는 삭막한 집에 제일 처음 들인 로즈마리 화분. 로즈마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다섯 개의 화분은 큼지막하다. 제일 큰 화분은 파키라였는데, 과거형인 이유는 지금은 없어졌기 때문에. 화분만 남아있다. 무성했던 잎은 진작에 다 떨어졌고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나무기둥만 남겨두었는데 뿌리벌레가 계속 생기는 통에 지난 주말에 기둥과 흙까지 모두 버렸다. 결국 커다란 화분만 남았다. 원인은 과습. 잎이 무성해서 볼 때마다 뿌듯했는데 시드는 건 한순간이더라. 나머지 커다란 아이들은 잘 자라주고 있다. 파키라의 교훈으로 물은 주 주지 않는다. 겨울에는 좀 부족한 게 오히려 낫더라. 스투키는 물을 언제 줘야 하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는데 몸통이 어쩐지 너무 홀쭉해보인다 싶어 이때다 하고 주니 다음날 몸통이 굵어지고 단단해지더라. 주말이 되면 여인초와 몬스테라의 커다란 잎에 분무기로 물을 뿌려준다. 어쩐지 간지러운 등 긁어주듯 시원해하는 것 같다.

 

   파키라는 갔지만 남은 아이들에게는 새잎이 올라오고 있다. 잎이 넓은 식물들의 새잎은 신기하더라. 잎이 지금의 모습 그대로 솟아나는 게 아니라 동그랗게 말린 채로 솟아나더라. 돌돌 꼬여있는 잎들이 조금씩 커지면서 지금의 모양대로 사르르 펴진다. 여린 연둣빛을 하고서 새내기 티를 잔뜩 내다가 어느새 옆의 언니오빠들을 따라 원숙한 초록색이 된다. 그리고 누가 언니오빠이고 누가 동생인지 모르게 어느새 잘 어우러지더라. 치통 때문에 잠을 잘 수 없는 새벽이면 통증을 조금 가라앉히려고 거실로 나간다. 차가운 물을 떠놓고 소파에 가만히 앉아 천천히 물을 마신다. 그러다보면 그 새잎들이 보인다. 진짜 이쁘구나 싶다. 니네는 치통이 뭔지도 모르지? 그렇게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쩐지 통증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다. 다음 주면 말려있는 새잎이 예쁘게 펼쳐지겠지. 오늘은 약이 좀 받기를 바라며. 밤새 잘 자라, 얘들아. 오늘밤은 우리 만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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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from 모퉁이다방 2020. 3. 2. 22:07

 

   남기고 싶은 것들이 많았는데, 아무 것도 쓰지 못한 채 삼월이 왔네. 어느 날, 출근길인가 퇴근길에 가산디지털단지역 지하철 문이 열렸는데 순간 깨달았다. 이 역이 연애시절 남편네 동네에 왔다 돌아가는 길에 어쩔 수 없이 정차했던 역이었다는 걸. 주말 오전의 열차는 가산디지털단지에서 멈췄다. 이곳까지만 운영하는 열차라고 했다. 곧 기다리면 또다른 열차가 올 거라고. 그 열차는 멀리까지 갈 거라고 했다. 날씨가 흐렸다.  역사  바깥인지 안인지 그 경계선 즈음에 커다란 벚꽃나무가 있었다.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모두 그 벚꽃을 찍어댔다. 흐렸는데도 가득했던 벚꽃 때문인지 환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매일 지나는 역인데도 핸드폰을 보느라 잠을 자느라 그 흐린 봄날의 기억을 잊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핸드폰도 보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멍하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나뭇잎도 꽃잎도 없이 덩그라니 서 있는 나무를 보고 깨달았다. 아, 그곳이 이곳이었지! 이 나무에도 곧 꽃이 피겠구나. 하나 둘 피기 시작하다 꽃잎이 떨어질 정도로 가득해지겠구나. 사람들은 또 멈춰서서 너도나도 꽃사진을 찍겠구나. 그러다 열차가 오면 또 무슨일 있었냐는 듯 우르르 열차를 타고 멀리들 가겠구나. 저 멀리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봄이 오고 있구나.  이런 저런 소소한 생각들을 하면서 이 시기를 보내고 있다. 나중에 우리들, 이렇게 말하리라 상상하면서. 2020년 늦겨울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잘 견디고 있길. 그런데 <디디의 우산>은 좀 힘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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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202

from 모퉁이다방 2020. 2. 5. 22:20

 

 

 

  주례를 대신한 아버님의 말씀이 시작되고서야 알았다. 그날이 2020년 2월 2일이었다는 걸. 2를 살짝 돌리면 하트가 되는 예쁜 날 우리 아이들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은경이는 2월 2일에 결혼을 했다. 8월의 결혼식에 예의 그 발랄함으로 폴랑폴랑 뛰어와 언니 혼자 오기 그래서 남자친구와 같이 왔어요, 라고 해서 나를 놀래켰는데 그 뒤 6개월이 되기 전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 날 은경이 아버님은 단상에 올라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 누구의 아내, 누구의 사위, 누구의 며느리, 누구의 남편으로 살지 말고 본인의 이름 그대로 살라는 것이었다. 그 이름들은 부모님들이 몇 달 며칠을 고심해서 지은 소중한 이름들이라고. 그러니 그 이름으로 불리면서 살라고 했다. 은경이가 참 멋진 아버지를 두었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은 신랑 아버지의 축사가 아니라 신부 아버지의 축사가 틀림없구나도 생각했다. 내가 아는 은경이는 아버지의 당부처럼 자신의 이름 그대로 살아 갈 수 있을 사람이다.

 

  1월에는 남편과 크게 싸웠다. 결론이 난 일이라 생각했는데, 그 일이 언급될 때마다 서로 기분이 상했다. 어제는 이러기로 했는데, 오늘 다시 얘기하면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가 있었다. 결국 막내의 집들이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크게 싸웠다. 나는 집에 돌아와 책방 문을 잠그고 이불을 펴고 누웠다. 밖에서 문고리를 돌리고 노크를 하는 소리가 났지만 열어주지 않고 울다 잠들었다. 다음날 새벽에 화장실을 다녀왔는데 그새 들어와 장난처럼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문을 꽝하고 닫고 안방으로 들어와 누웠다. 그러고 학원으로 출근하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꼼짝도 않고 누워 잤다. 혼자 집에 있으면서 우리의 싸움을 지켜본 친구가 했다는 말에 대해 생각했다. 동생이 전해준 친구의 말은,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이야기만 계속 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 말을 곱씹고 곱씹었다. 다음날까지. 그러자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네, 정말 우리는 서로 자기 얘기만 하고 있었던 거네. 나는 내 상황을 이해해주지 않는 것에 서운했고, 남편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왜 저 말만 계속 하는거지 생각했다. 남편은 자신의 말에 동의해주지 않아 무척 속이 상했단다. 단지 그래, 그건 니 말이 맞아, 라는 말을 듣고 싶었단다. 우리는 그렇게 삼사일을 싸우다 내 말만 계속 해서는 결국 똑같은 사람만 되고 싸움이 끝이 나지 않는다, 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 싸움을 계기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한 템포 멈춰보기로 했다. 그리고 쉽지 않겠지만 서로의 말에 좀더 귀를 기울이고 서로의 입장을 좀더 이해해보기로, 그렇게 노력해보기로 했다. 우리도 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많이 다투는 문제로 다투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다투는 데는 이유가 있는 거였다. 앞으로가 중요하다. 같은 문제로 다시 싸우지 않는 것.

 

  그 일은 설 연휴에 언제 고성집에 내려가는냐로 시작이 된 건데, 결론은 잘 다녀왔다는 것. 버스를 타고 통영에 가서 엄마, 아빠, 동생과 함께 뜨근한 돼지국밥을 먹고, 대통령이 나올 동네라는 말이 돌 정도로 풍수지리가 좋다는 마을을 걸었다. 조용한 동네였다. 앞으로는 바다가 뒤로는 산이 있었다. 나즈막한 산길을 오르는데 이런 곳에 별장 하나가 있으면 좋겠다고 엄마가 말했다. 아빠는 안산에 안산땅 오천평이 있다고 급고백을 해서 우리를 설레게 했다. 남편은 속으로 안산땅이 있다면 이곳에 별장은 짓고도 남겠다고 생각했단다. 우리가 왜 지금껏 말을 하지 않았냐고 소리 높이자 안 산 땅 오천평이란다. 안 산 땅. 아... 그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피랑도 올랐다. 서피랑은 꼭대기에 오르면 가슴 속이 시원해진다. 사방이 뻥 뚫려 있어 바람이 얼얼할 정도로 시원하다. 통영 시내도 훤히 내려다보이고. 그렇게 만오백보 넘게 걸은 뒤에 예약해 놓은 다찌집에 가서 해산물을 먹고 맥주와 소주를 마셨다. 건배도 했다. 엄마는 내가 잘 삐져서 좀 힘들거다고 사위에게 말했고, 맞은 편에 앉은 사위와 동생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차를 타고 고성에 와 축구 볼 사람은 보고 졸린 사람은 일찍 잠들었다. 통영의 조용한 마을을 걸을 때 이제 맺기 시작한 콩알만한 꽃봉오리들을 보았는데, 엄마는 지금이 가장 이쁠 때라고 했다. 남편은 4월이나 5월 즈음 그 봉오리들이 활짝 피었을 때 다시 가자고 군포에 와서 말했다. 천천히 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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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국

from 모퉁이다방 2020. 1. 5. 17:40

 

 

   S씨는 남편이 내게 처음으로 소개해준 친구다. 팀장님 부부와 S씨 부부와 여섯이서 연애 초반에 만났더랬다. 그 날 S씨는 남편이 드디어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분이 너무 좋다고 자기가 결혼식에서 축가를 꼭 부르겠다며 방방 뛰었더랬다. 그때 결혼생각도 없었지만 만일 결혼식을 한다고 해도 축가로 S씨는 안되겠다고 노래방에서 생각했다. 그 뒤에는 내 생일에 만났다. 회사에서 몇달동안 안 풀리던 업무가 극적으로 해결된 밤이라고 했다. 남편네 동네에서 둘이서 한잔 하고 있는데 미안하지만 너무 기분이 좋아서 올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함께 이 기쁨을 나눠야 한다고 했다. 후배와 둘이 와서 결국 노래방까지 갔는데 그날의 S씨는 얌전했다. 남편 말이 술이 덜 취해서 그런 거라고 했다. 그 뒤 결혼을 하기 전에, 결혼을 한 후에 가끔 만났다. 어떤 날은 S씨 혼자, 어떤 날은 S씨와 와이프랑 같이, 어떤 날은 민망하고도 고맙게도 나를 언니라고 불러주는 귀염둥이 큰 딸, 작은 딸과 함께. 어떤 날 S씨는 지난 번에 그렇게 말한 건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사과했고, 어떤 날은 제수씨, 내 생각이 틀린 건지 들어봐요, 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편과 자신은 평생 함께 할 거고, 그러니 우리 두 가족이 친해야 하고, 나중에도 가까이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니 자기를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당연하게도 S씨를 미워하지 않는다. 그가 다소 보수적이긴 하지만 선한 사람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 S씨가 오늘 출국을 한다. S씨는 미국행이 결정나고 난 뒤에 늘 자신이 있었다. 열심히 해서 성공하고 싶다고 여러 번 말했다. 부인과 미국행 때문에 트러블이 있을 때도 자신의 결정이 맞다고 확신했다. 출국 전에 S씨 가족을 대접하고 싶어 지난 주말에 집으로 초대했다. 그 날이 마지막일 줄 알고 잘 다녀오라고 인사까지 했는데, 어쩌다 두 번을 더 만났다. 옆 아파트에 동료의 깜짝 집들이가 있어서 또 한 번, 어제 출국 전에 진짜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다고 또 한 번. 지난 주말, S씨와 둘만 거실에 남게 되었을 때 S씨가 말했다. 날짜가 가까워지니 실은 불안하다고. 혼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고. S씨는 일년 간 혼자 지내보고 가족들을 부르기로 했다. 남편은 S씨가 강해 보이지만 실은 여리다고 했다. 어제 대리기사를 부른 우리를 함께 기다려주며 S씨는 남편을 계속계속 안았다. 두 사람이 군대를 다녀온 이후 가장 오래 못 본 건 각자의 신혼여행 기간이란다. 대학시절 아르바이트를 하며 만나 함께 아르바이트를 하고, 방황하는 친구를 지켜봐주고 이끌어주고, 그 뒤로는 쭉 함께 회사를 다녔다고 한다. 늘 옆자리에 앉았고 이직도 함께 했다. 둘이 계속계속 안는데 왠지 내가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한 사람은 남아서 잘 해내고 있으라고 했고, 한 사람은 가서 절대 바로 돌아오지 말고 금방 돌아올 거라고 비웃었던 사람들 생각하며 열심히 하라고 했다. 너는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지금처럼만 하면 된다고. 오늘 남편은 학원에 가고, 엄마가 보내준 무우로 김치를 담그고 나서 침대에 누워 책을 뒤적거리는데 지금 공항에 있을 S씨 생각이 났다. 7시 출국이라고 했으니 곧 진짜 혼자가 될 텐데. S씨는 내게 처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수씨,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해보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일단 해보는 게 낫다고요." S씨가 멀리까지 긴 다짐을 하고 갔으니 꼭 잘 해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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