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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퉁이다방 2021. 5. 18. 17:25

     

     

       진료실에 들어가면 매번 선생님이 제일 먼저 물어보신다. 돈 것 같아요? 내 대답은 항상 아니요. 초음파를 보신 선생님은 그러네, 아직 머리가 위에 있네. 오늘도 그랬다. 매번 아가 자세를 산모수첩에 그려두시는 선생님. 오늘의 그림은 제일 위 동그라미 그 아래 세로 한 줄 그 아래 산봉우리 두 개. 몸무게도 괜찮고 양수양도 괜찮고 아가는 잘 있단다. 목에 탯줄을 한 번 감고 있는데 별 문제는 없다고 하셨다. 수술 날짜를 확정했다. 5월 31일. 갑자기 디데이 날짜가 확 줄었다. 남편 전회사 동료가 있는데 나보다 예정일이 3주 빨랐다. 태명은 코코. 코코가 오늘 오전에 태어났단다. 지난주 일요일에 집에 가서 놀다왔는데 그 집 남편이 석가탄신일 하루 전에 나왔으면 좋겠다고 바랬는데 진짜 바램대로 되었다. 세 시간동안 진통하고 순산했다고. 저 세상 고통이었다고. 세상 모든 엄마는 위대하다.   

     

       어제 냉장고에서 수박을 꺼내 썰어두었는데 남편이 반통짜리 수박을 꺼내다 허걱했다. 엄청나게 무거운 수박이라고. 이 어마어마한 크기의 수박을 들고 지난주에 보경이가 놀러왔다. 딸기 한 소쿠리와 함께. 보경이는 수박을 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두고 시간이 조금 지나 시원해지자 꺼내서 반통을 잘랐다. 그리고 반통의 반통을 잘랐다. 두 통은 랩을 씌워 냉장고 안에 넣어두고 반의 반통을 먹기좋게 네모나게 잘라 락앤락통에 담아뒀다. 덕분에 나는 수월하고 편안하게 올해 첫 수박을 먹었다. 보경이랑 둘이 먹고 보경이가 간 뒤에는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꺼내먹었다. 남편이 수박을 좋아하지 않아서 수박 한 통이 온전히 내 차지가 되었다. 오늘은 점심으로 통통한 김밥 한 줄을 사와 먹고 후식으로 어제 잘라둔 수박을 꺼내 먹었다. 적당히 달고 적당히 시원한 여름의 맛이다. 온 집안 창문을 다 열어두고 방석과 수건을 빨았다. 초여름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보경이는 얼마 전 버스정류장에서 느낀 어떤 감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떤 광경을 보고 갑자기 왈칵 눈물이 났다고 했다. 다른 때에는 아무 느낌이 들지 않았을 광경인데 그 순간에는 정말이지 자기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고 했다. 시아버지의 임종 이야기도 해줬다. 갑자기 떠나시려는 시아버지 귓가에 조용조용 마지막 인사를 건네던 시어머니. 당신과 같이 살아서 참 행복했어요, 로 시작하는 따듯한 말들. 코끝이 찡해졌다. 보경이의 이 이야기들이 기억에 아주 오래 남겠다고 생각했다. 네 시 즈음 보경이가 이제 가봐야되겠다고 했고 함께 집앞 버스정류장에 나갔다. 마을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 의자에 둘이 나란히 앉아 있는데 이 평일 오후의 시간이 무척이나 평온하게 느껴졌다. 영종도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와준 사람의 마음을 오래오래 기억해둬야지. 쉬운 일 같지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걸 아니까. 

     

       지난주 진료때 물어보려고 했는데 못 물어 본 질문. 이제 움직여도 될까요? 선생님이 답해주셨다. 그럼요~ 아주 경쾌하게. 후아, 이 말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병원을 나와 택시를 타고가며 보았던 스타벅스로 걸어 가 디카페인 커피와 에그베이컨 샌드위치를 시켰다. 얼마만에 커피집에서 커피를 마시는가. 그것도 혼자서. <무라카미 T>는 양장에 너무 좋은 종이를 쓴 것 같다. 내용을 보면 장정도 종이재질도 책의 여백도 (그러므로) 가격도 과한 느낌. 가벼운 내용이니 더 가볍게 만들었음 좋았을 것 같다. 무엇보다 내용이 너무 가벼워서 읽기 전의 기대감을 채워주지 못했다. 좋았던 부분은 있었는데, 하루키가 미국에 갈 때마다 꼭 햄버거와 생맥주로 첫 끼니를 해결한다는 부분. 별 것 아닌데 이 구절들을 읽으면서 왠지 설레였다. 내게도 자주 가는 나라와 그 나라에서 꼭 먹는 첫 끼니가 있었으면 좋겠다. 여행이 그립다는 이야기. 

     

      여행으로 미국에 간다. 세관을 통과하고 공항을 빠져나와 시내에 자리 잡자마자 '어디 가서 햄버거부터 먹어야 해'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신은 어떠신지? 적어도 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지극히 당연한 본능 같기도 하고. 또 어떤 의미에서는 형식적인 의례 같기도 하다. 어느 쪽이든 좋다. 어쨌든 햄버기를 먹으러 간다. 

       오후 1시 반 쯤에 손님이 얼추 빠진 햄버거 가게로 들어가 카운터에 홀로 앉아 쿠어스 라이트 생맥주와 치즈버거를 주문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패티의 굽기 정도는 미디엄, 버거와 치즈 외에는 양파와 토마토와 양상추과 피클. 사이드 메뉴는 갓 조리한 감자튀김. 마음의 친구로 역시 콜슬로도 주문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소중한 단짝, 머스터드(디종)와 하인즈 케첩.

       시원한 쿠어스 라이트를 차분하게 마시고 주위 사람들의 술렁임과 접시나 잔이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혹은 이국의 공기를 주의 깊에 들이마시면서 치즈버거 접시가 나오기를 기다린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비로소 '아, 그렇지, 또 미국에 왔구나...' 하는 실감이 솟아난다. 

    - p.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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