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다방'에 해당되는 글 450건

  1. 빅슬라이드 1 2022.01.28
  2. 미드나잇 4 2022.01.26
  3. 보리굴비 2022.01.07
  4. 메리 크리스마스 2 2021.12.27
  5. 여인초 2021.12.09
  6. 양꼬치 4 2021.12.06
  7. 첫눈 2021.11.11
  8. 가을비 2021.11.08
  9. 산책 6 2021.10.13
  10. 오전시간 4 2021.10.05

빅슬라이드

from 모퉁이다방 2022. 1. 28. 23:16

  

  남편이 성대 낭종제거수술을 받고 왔다. 수술 전에 긴장되지 않냐고 하면 전혀- 라고 말했던 사람인데, 전신마취가 기계호흡인 줄 몰랐다고 알았으면 엄청 쫄았을 거라고 띄어쓰기 발음이 어색한 음성앱으로 말했다. 1-2주는 말을 아예 하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전신마취는 원래 이렇게 머리가 띵한 거냐며 이상한 거 아니지? 라고 메모장에 써서 보여줬다. 나는 호흡을 길게 하고 누워서 쉬라고 했는데, 왠지 아이를 보는 나를 두고 방에 들어가 버리는 게 미안한지 소파에 누워 일어나질 않더라. 남편이 기진맥진해 소파에 누워있는 동안 나는 아이 이유식을 먹이고, 분유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입속을 닦아주고, 침독이 가득한 입가에 로션도 발라줬다. 이제 자기만 하면 되는데 오래 칭얼대더라. 힘든 감정이 울컥하고 올라왔는데 꾹꾹- 잘 눌렀다. 한번 잠들었다 금방 다시 깼지만 참을 인자를 가슴에 새기며 토닥토닥을 수없이 하며 결국 재웠다. 거실의 남편을 방으로 보내고 아이가 침을 잔뜩 묻히고 논 장난감을 닦았다. 젖병과 이유식 용기, 우리가 먹는 저녁그릇을 닦고나니 갑자기 맥주 생각이 났다. 얼마 전에 술병이 난 이후론 (그렇습니다. 저는 최근 단유를 하였습니다) 생각이 난 적이 없는데. 아주 잘게 자른 마른 오징어도 생각이 났다. 가스레인지를 닦으며 생각했다. 일단 잔을 냉장고에 넣어두고 어제 방송에서 들은, 가사가 좋았던 윤도현의 음악을 이어폰으로 들으며 집앞 편의점에 다녀오자. 딱 한 캔, 아니 딱 두 캔만 마시자. 그러자 어디에 있었는지 모를 긍정의 기운이 마구마구 샘솟았다. 지금 그 맥주를 마시고 있다. 윤도현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라고 노래하는 걸 들으며 사 온, 냉장고에 차갑게 해 둔 잔에 따른 바로 그 맥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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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드나잇

from 모퉁이다방 2022. 1. 26. 00:40


  저녁밥을 먹으며 남편에게 어떤 이야기를 했는데 평소 같으면 그리 생각하지 말아라로 시작하는 말을 분명히 했을텐데 오늘은 왠일인지 그러지 않고 묵묵히 들어줬다. 정말 고마웠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을지 몰라도.) 오늘은 정말 그런 사람이 내게 필요했거든. 오후에는 지난 일요일에 보지 못한 <방구석 1열>을 봤다.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가 나왔던 비포 시리즈 마지막편 <비포 미드나잇>의 한 장면에 손미나 작가가 말했다. 줄리 델피가 산 너머 지는 석양을 보고 아직 있다, 아직 있어, 졌다, 라고 읊조리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해는 졌지만 원래 그뒤부터 하늘은 더 아름다운 법이라고. 그러니 <비포 선라이즈>로 시작한 이들의 사랑은 변했다기보다 농익었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것 같다고. 그 표현이 너무 좋아 휴대폰 메모장을 켜놓고 메모를 했다. 그리고 이런 말은 휴대폰이 아니라 수첩에 적어둬야 하는데 생각을 했다. 요 며칠 어떤 이유로 기분이 다운되어 있었는데 이제 떨춰버릴 때가 된 것 같다. 집에 수첩은 많지만 얼마 전 마음에 담아뒀던 작은 수첩을 하나 새로 주문했다. 그 수첩이 나의 새로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가 되길 바라며. 새해에는 남편처럼 마음이 단단해져서 잘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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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굴비

from 모퉁이다방 2022. 1. 7. 13:41

 

 

  지난주에는 몸과 마음이 피폐했다. 결국 남편에게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발악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밤에는 그 모습을 보인 걸 후회하지 않았으나 다음 날 바로 후회했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아무튼 그렇게 한 번 대대적으로 폭발을 하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그 뒤로 내가 한 건 열심히 요리를 한 것. 이상하게 그렇게 되었다. 냉장고에 있는 돼지고기와 고수를 꺼내 굴소스를 넣고 볶아봤다. 상암 양꼬치집의 좋아하는 메뉴를 최대한 간소화한 것. 밑반찬 하나에 김치 하나를 내어놓고 밥 한 그릇씩 뚝딱했다. 섭섭한 마음이 남아 있던 남편도 맛있다고 했다. 다음날 점심에는 베이컨을 꺼내 잘게 썰고 계란을 추가해 볶음밥을 만들었다. 지난주에 만들어둔 유자향 피클을 곁들여 먹었다. 간단한 요리였는데 맛이 있었다. 몸을 생각하면 차라리 그 시간에 쉬는 편이 나았을텐데 요리를 하는 동안 마음이 차분하고 편안해졌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몸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아이를 돌보는 것도 지난주보다 힘들진 않았다.

 

   그 다음날은 아이 이유식 재료를 시키며 볶음용 닭 한마리도 주문했다. 아이가 노는 동안 닭을 삶고 아이가 자는 동안 살을 발라냈다. 저녁에 파를 송송 썰어넣고 닭곰탕을 따뜻하게 먹었다. 그리고 대망의 어제! 냉동실에 있는 것들을 생각하다 지난 추석에 선물받은 보리굴비 생각이 났다. 보리굴비를 한 번도 요리해보지 못해 막내네가 왔을 때 그대로 쪄주었다가 너무 비려 나랑 제부는 손도 대지 않았었다. 정성이 많이 들어간 비싼 재료인데 요리하는 데에는 그렇지 못했구나 생각이 들었다. 작정을 하고 검색을 했다. 쌀뜨물에 해동을 시킨다. 지느러미를 자르고 비늘을 제거한다. 비늘을 제거할 때 사방으로 튀니 조심할 것. 배를 갈라 내장을 빼낸 뒤 월계수, 생강가루, 녹차잎 등을 넣고 20분 정도 쪄낸다. 후라이팬에 들기름을 두어 숟갈 두르고 바삭하게 구워낸다. 어제! 전혀 비리지 않은 보리굴비를 둘이서 뚝딱했다. 진정 밥도둑이더라. 둘 다 밥을 더 퍼서 먹었다. 오늘은 손님이 온다고 해 김하나 작가님 SNS에서 보았던 파나코타 디저트를 만들어 볼 생각. 우유와 생크림을 같은 비율로 섞어 젤라틴을 넣고 냉장고에 두면 끝이란다. 각기 다른 컵에 만들어 배달음식 먹은 뒤로 달달하게 먹어봐야지. 그러려면 생크림 사러 지금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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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크리스마스

from 모퉁이다방 2021. 12. 27. 01:01

 

   크리스마스에는 아이를 재우고 늦은 저녁을 준비했다. 평일에 혼자 점심을 먹을 때 배추와 냉동삼겹살에 기름을 살짝 두르고 냄비에서 익혔는데 맛이 꽤 괜찮았다. 조금 더 풍성하게 먹어볼 생각으로 이유식에 넣을 소고기를 사러 갔을 때 옆에 있는 야채가게에서 팽이버섯과 느타리버섯, 콩나물을 사왔더랬다. 크기는 작지만 깊이가 있는 후라이팬을 꺼내 물을 약간 붓고 야채와 고기 탑을 쌓기 시작했다. 이쁘게도 아니고 그냥 조금씩 적당히 쌓았다. 배추도 잘라 넣고 냉동삼겹살도 넣고 팽이 버섯과 느타리 버섯도 뜯어 넣었다. 콩나물도 넣고. 중간중간 소금과 후추도 적당히 뿌리고. 뚜껑이 안 닫힐 정도로 높게 쌓아놓고 뚜껑을 얹였다. 마지막에 맛술을 약간 두르고 가스불을 켰다. 약불에 천천히 익혔다. 익는 동안 남편의 소주를 꺼내고 내 사이다도 꺼냈다. 사이다를 따를 컵에 얼음을 가득 채워뒀다. 남편의 알타리와 파김치도 꺼내고 내 동치미 무도 꺼냈다. 소스는 정육점에서 준 참소스. 냄비를 확인해보니 야채 숨이 푹 죽어 붕 떠 있던 뚜껑이 제대로 덮혀 있었다. 뚜껑을 여니 맛있는 냄새가 훅-하고 솟아올랐다. 냄비를 식탁 중간에 두고 오목한 그릇에 각자의 소스를 담고 고기와 야채를 동시에 건져 푹 찍어 먹었다. 조금 심심한데 소스에 찍어먹으니 꽤 맛이 있었다. 손님이 오면 해줘야지, 라고 말하니 남편이 좋다좋아, 라고 했다. 건더기를 다 건져먹고 나니 기름기가 있긴 하지만 맛나 보이는 국물이 남았다. 국수를 넣기엔 양이 적었다. 남겨뒀다 내일 아침에 계란이랑 파 넣고 샤브샤브 죽처럼 만들어 먹자. 따듯하고 아침에 부담없게. 좋다좋아. 그렇게 조용히 크리스마스 밤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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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초

from 모퉁이다방 2021. 12. 9. 17:26

 

  아이는 이제 안다. 힙시트 꺼내는 걸 보면 자기를 안아줄 거라는 걸. 그래서 울다가도 울음을 멈춘다. 그리고 가만히 올려다보며 기다리고 있다. 오늘 그렇게 아이를 안아주려고 힙시트의 허리 부분을 매는데 갑자기 정인이 생각이 났다. 이제 6개월인 아이도 힙시트를 꺼내면 자기를 안아줄 거라는 걸 아는데, 그 아이도 알았겠지. 자기에게 또 나쁜 짓을 할 거라는 걸. 자기를 또 아프게 할 거라는 걸. 그리고 뉴스의 아이들 생각을 하다 눈물이 날 뻔 했다. 대신 아이를 꼬옥 안아줬다. 남편은 며칠 전 티비에서 <어린이에게 새 생명을> 시작 부분을 보더니 못 보겠다고 했다. 전에 본 안길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들 영상이 생각나 또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했다. 우리가 이렇게 부모가 되어가고 있나보다.

 

  아이는 이제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한다. 놀이공간을 확보해줘야 해서 매트 주변에 가드를 설치하고 화분을 창가로 모두 옮겼다. 키가 다른 화분들이 창가에 일렬로 줄지어 서 있다. 그 중 제일 키가 큰 화분 여인초의 잎이 옮긴 뒤에 또르르 말리길래 찾아보니 햇빛을 받는 면적을 최소화하기 위해 해가 뜨는 시간에는 스스로 잎을 만단다. 해가 지고 나면 풀고. 식물도 저렇게 스스로를 보호하는데. 그림책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나>를 아이에게 읽어주려고 꺼냈는데 관심도 없어서 혼자 읽었다. 그러다 또 눈물을 한 바가지. 아,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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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꼬치

from 모퉁이다방 2021. 12. 6. 18:19

 

 

  내일부터 이유식에 소고기를 넣어야 해서 정육점에 갔다. 가까운 정육점과 마트에는 한우를 팔지 않아서 (처음이라 비싼 한우를) 한 블럭 떨어져 있는 정육점까지 갔다. 날씨가 그리 쌀쌀하지 않아 유모차 방풍 커버 지퍼를 잠그지 않고 걸었다. 아이도 간만의 산책이라 주위를 이리저리 둘러보고 유모차에 가만히 있었다. 주말에는 결혼식이 있어 서울에 갔다. 정말 간만의 외출이었고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마음이 허했다. 이어폰을 가져가지 않아 음악을 듣지 못했고 책은 가지고 나갔는데 읽을 기분이 들지 않아 지하철 안에서 핸드폰만 봤다. 아이 동영상을 찾아 가만히 보고 있다 내려서 남편에게 영상통화를 했다. 아이가 나를 알아보고 싱긋 웃어주는 걸 보고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엄마 얼른 갈게, 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는데 참, 나도 별 수 없구나 싶었다. 육아만 하던 엄마들이 간절히 갈망하던 혼자만의 시간, 자유를 얻게 되어 떠나게 되었을 때 결국 호텔방에서 아이 동영상 보면서 시간을 보낸다더니. 그런 시간을 잠시 가졌다고 해서, 바깥세상의 허함을 잠시 경험하고 돌아왔다고 해서 혼자만의 육아 시간이 고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무튼 지난 주말에는 그랬고 오늘은 아이와 함께 잘 보내고 있다.

 

  한 시간 걷다 왔는데 벌써 저녁이네. 이 동네에 가게가 거의 없다가 최근에 많이 생기고 있는데, 산책을 하며 새로 생길 가게를 탐색하는 일이 재미나다. 동네 사람들도 모두 그런지 가게가 하나 생기면 오픈발이 장난 아니다. 그러다 맛없는 가게는 바로 한산해지고. 최근에 곱창집 두 군데와 미국식 햄버거집, 떡볶이집, 떡집, 양꼬치집이 문을 열었다. 양꼬치집은 문전성시다. 남편 친구 부부와 한 번 갔는데 희안한 메뉴가 많았다. 맥주를 마시게 되고 아이가 앉아 제 몫을 밥을 먹을 수 있게 되면 (흑흑 언제?) 자주 가게 될 것 같다. 양꼬치 하면 상암에 진짜 맛난 집이 있었는데 동생과 정말 자주 갔었다. 가면 너무 맛나서 배가 부른데도 음식을 더 시키고 술도 더 시키고 그랬더랬다. 나중에 남편도 데려가고, 독서모임 사람들도 데려가고, 고향친구도 데려갔는데 다들 맛있다고 했다. 고향친구는 얼마 전에 양꼬치를 먹는다고 오랜만에 연락을 해왔다. 상암 양꼬치 맛이 생각이 난다며, 정말 맛있었다며. 동생이 검색을 해보니 그 맛있는 상암집은 코로나 전후에 폐업을 한 것 같단다. 그 소식을 전하는 동생이나 듣는 나나 너무 안타까웠다. 추억이 많은 곳인데. 거리가 멀어졌지만 언젠가 작정하고 한 번 가볼 생각이었는데. 아무튼 오늘 산책을 하며 탐색을 해 본 결과 12월에 정육점이 집 가까이에 하나 더 생기고 1월에는 닭꼬치집이 생긴다. 

 

  창밖은 어두워졌고 아이는 오늘의 마지막 낮잠을 자고 있다. 아이 물건 가득한 거실을 마주하고 아델 노래를 틀어놓고 추억의 양꼬치집 생각을 하니 마음이 뭐랄까 이상해진다. 서글픈 것 같기도 하고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시간들을 가질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싶어 따듯해지기도 하고. 지하철에서 내려 그 가게로 가던 길, 문을 열면 문 바로 앞 테이블에서 기다리고 있던 동생, 숯불이 들어오고 양꼬치를 올리던 순간, 마늘을 시켜 다 먹은 꼬치에 끼우던 순간이 마치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북경소주는 거기서만 팔았다. 꼬치를 다 먹고 나면 고수가 가득했던 돼지고기 볶음요리를 시켜 칭따오와 함께 하곤 했다. 그 요리는 먹을 때마다 기가 막혀서 먹을 때마다 감탄사를 연발했다. 고향친구는 거기서 술을 마시고 택시에 겉옷을 두고 내렸다고 했다. 남희언니는 거기서 결혼선물을 건넸다. 크기가 다른 접시 두 개였는데 정말 잘 쓰고 있다. 접시를 쓸 때마다 언니 생각이 난다. 그 접시를 건네주며 언니가 했던 말들도. 동생이랑 나는 퇴근 후 거기서 만나 양껏 먹고 택시를 잡아 함께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갑자기 많이 그리워지네, 별 것 없는 시절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나보니 참 좋은 시절이었던 그 시절 우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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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from 모퉁이다방 2021. 11. 11. 00:15

 

   아침에 일어나 비몽사몽 수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창밖으로 무언가 보슬보슬 떨어지는 게 보였다. 눈이 오나봐. 기저귀를 갈고 있던 남편이 그럴리가, 하고 반신반의했다. 내가 서 있는 창 가까이 와서 보더니 어, 진짜네, 한다. 오늘 첫눈이 왔다. 군포에. 오다말다 오다말다 하더니 어느 순간 폴폴 쏟아지길래 남편이 지안이를 안고 창가에 섰다. 아니 내가 이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야겠다며 아이를 안고 창가에 서보라고 했다. 남편은 자세를 잡더니 지안이 등을 토닥거리며 말을 건넸다. 와, 눈이네 눈. 지안아, 눈이 오네. 첫눈이네. 첫누-운. 창가의 둘, 조금 떨어진 곳의 나. 그렇게 셋이 가만히 아침의 첫눈을 지켜봤다. 셋이 되어 보는 생애 첫 눈. 그리고 올 가을 들어 처음으로 보일러를 켰다. 천천히 따듯한 온기가 채워졌다. 이제 뒤집기도 되집기도 자유자재로 하는 아이는 커다란 침대를 만난 덕분에 어제 통잠을 잤다. 자다깼다 이리 움직였다 저리 움직였다 하며 아빠와 엄마의 토닥임없이 크게 칭얼대지 않고 열 시간 가까이 통잠을 잤다. 새벽에 깨지 않고 내리 잘 수 있다는 게 이리 행복한 일이었다니. 오늘도 잘 자주길. 다들 3월에 어린이집을 보내는 게 좋다고 해서 3월 입소로 신청해놓았는데 오늘 한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다. 아직 먼 일인데 마음이 뒤숭숭하네. 내일은 좀더 신나게 놀아줘야지. 오늘 아이를 힙시트 위에 세우고 위아래로 살짝 움직여주니 꺄르르 웃었다. 내일도 잘 놀자, 아가.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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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from 모퉁이다방 2021. 11. 8. 14:19

 

 

   비가 오니 예전에 살던 동네 생각이 난다. 11층이었던 오피스텔 앞문으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넌다. 바로 펼쳐지는 불광천 길. 오른편에 천을 두고 왼편으로는 자전거 길을 두고 천천히 걷는다. 큰 나무들에 노란색, 빨간색 단풍잎들이 그득하다. 기지개도 펴보고 숨을 힘껏 들이마시면서 이어폰을 꺼내 걷는다. 첫 곡은 루시드폴의 '아직, 있다'가 좋겠다. 걷다보면 이름모를 제법 커다란 새가 물 아래로 부리를 들이미는 모습도 보이고 나뭇잎들이 가을바람에 일제히 사르르 움직이는 모습도 보인다. 그렇게 삼십분 넘게 걷다 월드컵경기장 쪽 계단을 올라 극장에 간다. 찜해뒀던 영화 시간표를 다시 확인하고 무인발권기에서 티켓을 끊는다. 저녁이면 맥주 한 잔을 했을테지만 오전시간이니 따뜻한 커피를 주문한다. 날씨가 쌀쌀하니 라테가 좋겠다. 입장 시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가지고 간 책을 에코백에서 꺼낸다. 사람도 없고 한적하니 책이 잘 읽힌다. 입장 시간이 가까워지고 화장실을 다녀온다. 그리고 두 시간 동안 사람이 별로 없는 극장에서 집중해서 영화를 본다. 영화는 좋다. 시간을 내어, 일부러 걸어, 영화를 보러오길 잘했다고 생각이 든다. 극장을 나와 불광천으로 내려가기 전 다리 위에서 인증샷을 찍는다. 티켓을 꺼내 날짜와 좌석번호, 영화제목과 시간이 보이도록. 그리고 이 곳의 커다란 나무들이 나오도록. 이어폰을 다시 꺼내 방금 본 영화의 분위기와 비슷한 음악을 검색한 뒤 들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코끝에 닿는 바람이 쌀쌀한 것이 딱 내가 좋아하는 날씨다 생각하면서.

 

   엄마가 고구마를 보내면서 가지를 여러 개 함께 담아 보내주셔서 어쩌나 하다 검색을 해보니 이탈리아 가정식 음식으로 올리브오일가지절임이 있더라. 구운 가지를 마늘, 허브와 함께 올리브오일에 담아두고 빵 위에 올려먹거나 파스타를 만들어먹으면 맛있단다. 남은 오일은 파스타나 다른 요리 할 때 쓰면 맛나고. 집에 올리브오일이 있어 아이와 함께 유모차를 끌고 나가 마늘을 사왔다. 수퍼에 바질이 있었는데 너무 비싸 집에 있는 깻잎을 조금 넣자 싶었다. 페퍼론치노도 레시피에 있었는데 모유수유 중이라 아예 넣지 않을까 싶다가 약간 넣으면 맛있을 것 같아 세 개 정도만 잘게 부숴 넣었다. 집에 있는 자그마한 병을 세 개 꺼내 끓는 물에 소독했다. 후라이팬에 가지를 굽고 마늘을 굵게 으깨고 깻잎을 가늘게 잘랐다. 커다란 볼을 꺼내 모든 재료를 함께 버무렸다. 벌써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났다. 딱 세 개의 병에 담겼다. 작은 병 하나는 그 날 놀러온 민선이에게 줬다. 맛이 너무 궁금해 다음날 동네빵집에서 올리브가 박힌 치아바타와 말랑말랑한 바케트를 사왔다. 빵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그 위에 가지를 얹었다. 마늘향이 가득 밴 오일이 빵을 촉촉히 적셔줬다. 맛은 성공. 마늘을 너무 많이 넣어서 향이 강한데 다음번에는 마늘을 줄이고 향이 좋은 허브를 함께 넣어야겠다. 

 

   비가 왔다. 이 문장을 쓰고 창밖을 보니 다시 비가 오고 있네. 아까는 개었었는데. 이런 날이면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따뜻한 음료를 만들어 마시며 책을 읽거나 영화를 봤었는데. 다행이 아가가 자고 있어 몇 자 남긴다. 오늘은 꼭 무언가 쓰고 싶은 날이라. 집 앞 산에 단풍이 그득했는데 비와 바람 때문에 많이 지겠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산 덕분에 여름과 가을을 아가와 함께 집에서 잘 견딜 수 있었다. 고마워, 숲아. 여기까지 쓰니 아기가.... 울....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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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from 모퉁이다방 2021. 10. 13. 12:13

 

  어제는 아이가 계속 짜증을 부리며 울길래 산책을 나갔다. 하늘도 흐리고 바람도 쌀쌀해 산책은 생략하려고 했는데 부랴부랴 챙겨 나갔다. 긴팔 바디수트에 이번에 산 민트색 레깅스를 입혔다. 양말도 신기고 모자도 씌웠다. 혹시 유모차에서 울까봐 노란색 튤립 사운드북도 챙겼다. 튤립 사운드북이 여러 개 있는데 노란색 노래들이 경괘해서 그런지 유독 이 튤립을 좋아한다. 나가보니 맞은편 동네 구름이 심상치 않았다. 어둑어둑한 것이 금방 비가 쏟아질 것 같았는데 우리 동네 구름은 많기는 하지만 색이 괜찮아서 근처만 조금만 걷다 오자며 나섰다. 그리고 근사한 구름을 만났다. 유모차를 멈추고 말했다. 지안아, 진-짜 예쁜 노을이다. 그치? 다행이다. 집에만 있었으면 저 예쁜 노을을 못 봤을텐데. 보고 있는건지 그냥 밖에 나와서 좋은건지, 어쨌든 산책 내내 울지도 않고 엄마가 따뜻한 커피를 살 때도 맛나보이는 무화과 케잌을 추가주문할 때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가을의 시작. 어제는 딱 이 표현이 어울렸다. 막 추워지기 시작했으니. 가을이 시작되는 온도에 마음이 들떠 잠든 아이를 밀며 좀더 걸었다. 하늘에 자잘한 구름들이 가득했다. 군데군데 노을빛 하늘이 보였다. 저 멀리 반만 찬 달도 보였다. 가만히 걷고 있는데 그동안 남편이 내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남편은 자기가 애 쓰고 있는 게 보이지 않냐고 했다. 왜 내 생각만 하냐고 했다. 이상하다. 싸울 때는 잘 보이지 않던 남편의 애씀이 이렇게 아이와 함께 혼자 산책을 하고 있으니 뚜렷하게 보였다.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얼마나 힘이 들지. 셋이 잘 살아보자고 각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왜 나만 다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생각하고 생각했다. 오늘 지안이는 136일. 세상에 나온지 4개월 14일째. 우리가 부모가 된지도 4개월 14일째. 여전히 서툰 초보엄마아빠. 이렇게 한 시절이 지나가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이때를 뒤돌아보면 우리 그때 진짜 힘들었는데 잘 해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매일 집에 들어오면서 내 기분이 어떤지 눈치를 보게 된다던 남편을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렸다. 오늘은 기분이 무척 좋으니 안심하라고 미리 알려주려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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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시간

from 모퉁이다방 2021. 10. 5. 23:32

 

 

  아이가 다시 세네 시간마다 깬다. 이건 신생아 즈음에나 있었던 일인데 (그래봤자 이제 겨우 사개월차) 아홉시나 열시 부근에 자니까 세네 시간마다 깨면 새벽에 두 번을 일어나야 한다는 소리다. 아이를 재우고 약간의 휴식을 취하다 천근만근 몸을 이끌고 자정이 되기 전에 침대에 눕는데 잠든지 한 시간도 안돼 아이가 울기 시작하는 거다. 나는 아침잠 없는 사람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했었다(과거형). SBS 아침뉴스 1부 시작할 즈음에 자동기상하는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3부 끝날 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린다. 며칠 전 새벽에는 아이가 너무 심하게 울어 둘다 깨어있었다. 수유를 시작했고 남편은 이렇게는 안되겠다며 검색을 시작했다. 검색 끝에 찾은 것은 어떤 해결책이 아니라 4개월차 아이들의 원더윅스였다.

 

  그 밤에 내가 이해한 바는 이렇다. 아이는 4개월차가 되면서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꽤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된다. 뒤집기를 할 수 있게 되고 손을 쓸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폭풍 성장을 하며 독립적인 자기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엄마랑 연결된 자신이 아니라 독립된 하나의 개체로서의 자신을. 세상에 덩그러니 나와있는 자신을. 갑자기 무서워진단다. 그래서 엄마가 눈앞에서 없어지면 울고 엄마 품에 좀더 안겨있고 싶고 새벽에도 엄마 젖을 더 먹고싶어진다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그랬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그랬었구나. 왜 이리 안 자냐고 푸념을 하던 초보 엄마아빠는 급반성모드에 들어갔다. 우리 지안이가 무서웠구나. 엄마아빠가 몰랐구나. 이제 더 많이 안아줄게. 밥 많이 먹어, 우리 아가. (하지만 다음날 새벽에 어김없이 두 번을 깨고 금방 다시 푸념모드로 돌아갔다. 흑흑- 인간이여.)

 

  아이가 어제는 새벽 4시까지 한번도 깨지 않고 잤다. 사실 나는 2시쯤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 잠이 깼는데 시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볼일을 보고 돌아와 남편을 깨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지만 혹여 우리가 이야기하는 소리에 애가 깰까봐 그냥 잤다. 새벽 4시에 먼저 깬 남편은 흥분상태로 말했다. "혹시 중간에 지안이 깼어!? 아니야!? 지금 몇 신줄 알아!? 무려 4시라고!!" 나는 중간에 나만 깬 이야기를 하고팠는데 너무 졸려 수유하지 말고 좀더 재우달라 부탁하고 다시 잠들었다. 여섯시간을 연이어 자니 살 것 같았다. 주말에는 막내동생네가 왔는데 집에 있는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오늘아침, 막내가 가져온 베이글, 치즈, 잠봉햄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먹고 소윤이가 선물해준 어머니 머그컵을 찬장 깊숙한 데서 꺼냈다. 남편은 출근을 하고 아이는 아침 수유 뒤 잠시 놀다 자기 시작했다. 아, 좋구나. 오래오래 자거라. 책도 읽었다. 이런 문장들이 있었다.

 

- (...) 자정 넘은 시각, 눈이 쌓이고 집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취했고 춥고 내일은 지각을 할 거 같고 여전히 일이 많고 여전히 하기 싫지만 참 즐거운 밤이었다. - 139쪽

 

- (...) 그럴 줄 알았지만 공동 거주는 참 즐거웠다. 회사가 중심이 되는 삶에서 집이 중심이 되는 삶으로 내 중심이 옮겨지는 것이 좋았다. 퇴근하면 씻고 이거 저거 좀 보다가 자는 집의 생활에서 퇴근 뒤에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많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좋았다. 요리도, 대화도, 뜨개질도, 음주도, 무엇이라도 집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 140쪽

 

  오늘밤도 기대해봐도 될까. 앞으로 2시간 남았다! 얼른 누워야지. 요즘 아이는 귀를 만진다. 한 쪽 손을 옆으로 뻗어 자기 귀를 만진다. 처음엔 엄정화 몰라 포즈여서 어디가 아픈가 생각했는데 유심히 들여다보니 자신의 귀를 만지는 거였다. 손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몸 이곳저곳을 탐색하다 귀까지 간 것이다. 엇 여기 뭔가 튀어나온 게 있는데. 말랑말랑하고. 이게 뭐지? 신기해하면서 계속 만져보는 것 같다. 귀여운 녀석. 계속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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