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다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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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페인모퉁이다방 2021. 7. 14. 16:15
점심으로 샌드위치 세트를 시켰다. 닭가슴살 샌드위치와 디카페인 커피. 출산하고 커피는 두 번째다. 조리원에서 원장 선생님이 작은 종이컵에 따라준 걸 아껴 마셨더랬다. 수유를 끝내고 잠든 아이를 보듬어 트림을 시키려 노력한 뒤 침대에 눕혔다. 밤낮을 구별하게 하려고 낮에는 아기침대가 거실에 있다. 문밖으로 옅게 부스럭 소리가 났고 연이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문할 때 이렇게 남겼다. 아기가 있어 문앞에 두고 노크해주세요. 오늘은 커피가 간절했다. 샌드위치를 한 입 물고 그동안 참았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창 밖을 보니 그제서야 구름이 보였다. 초록으로 물든 산 위에 짙고 풍성한 구름이 가득 차 있었다. 근사한 구름이었다. 여행지에서 이런 구름을 만났더라면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었겠지 생각했다. 요즘 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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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모퉁이다방 2021. 7. 6. 05:27
이번주 목요일이면 산후도우미 이모님의 도움도 끝난다. 처음 이모님이 오셨을 때 모든 게 서툴었고 3주 뒤에 혼자서 어찌하나 싶었는데 걱정할 때마다 이모님이 응원해주셨다. 산모님, 다 하실 수 있어요. 분명 다음주가 다르고 다다음주가 다를 거예요. 정말이었다. 1주차가 다르고, 2주차가 달랐다. 그리고 지금 3주차. 낮시간 동안 혼자서 할 수 있을 거라는 조금의 자신감이 몽글몽글 솟아오르고 있다. 지안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매일 얼굴이 변하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다. 3.04키로로 태어난 아기가 영유아1차검진 때 벌써 4.4키로. 또래보다 약간 빠르게 건강하게 성장 중이라고 했다. 막막하고 아득한 순간들이 있었다. 모유수유를 하러 처음으로 병원 수유실에 갔을 때. 수유 하는 방법을 누구도 알려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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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과 오산모퉁이다방 2021. 7. 2. 15:06
이천이십일년 오월 마지막 날에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되는 건 한 순간이었다. 수술 두 시간 전에 병원에 갔고, 진료실에서 마지막 진료를 봤다. 분만실 침대에 누워 대기하고 있다 시간이 되자 수술실에 걸어 들어갔다. 수술대에 누워 이것저것 시키는 대로 했더니 주치의 선생님이 들어와 걱정말라고 손을 잡아 주셨다. 마취가 시작되었다. 아기가 나올 때까지 하반신 마취만 하는 줄 알았는데 물어볼 새도 없이 수면마취가 시작됐다. 눈을 떠보니 숨이 막혔다. 옆에 남편이 있어 여기가 어딘지 지금이 언제인지도 모른채 숨 막혀, 라고 말했다. 남편이 간호사를 불렀고 간호사가 호흡기를 떼어주고 마스크를 벗겨줬다. 수술이 끝났다고 했다. 회복실에 온지 몇시간이 지났다고. 아기는 잘 태어났다. 남편이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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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y모퉁이다방 2021. 5. 31. 09:59
어제 자려고 누웠는데 역시나 잠이 오지 않았다. 푹 자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억지로 누워 있다 배도 불편하고 해서 일어났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와 천둥번개 탓에 영화 가 생각났다. 틀어놓고 소파에 기대 있다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고 거실로 나가고를 반복했다. 출산가방은 작은 방에 작은 기내용 캐리어를 펼쳐놓고 생각날 때마다 채워 넣었는데 지퍼를 잠그니 아주 빵빵해졌다. 생리대는 부피가 꽤 나가는데 무겁지가 않아 에코백에 따로 챙겼다. 집에 있으면서 책을 많이 읽지 못해 네 권을 챙겼는데 괜히 챙긴 거 아닌가 싶다. 아침에도 다정한 사람들의 메시지가 이어졌고, 남편은 느즈막히 일어나 지난 밤 설거지 중이다. 차분한 노래들을 듣자 싶어 강아솔 음악을 재생목록에 잔뜩 추가했는데 가 너무 좋아 계속 반복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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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모퉁이다방 2021. 5. 30. 21:38
늦은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와 다 마른 빨래를 개고 있는데 갑자기 거실에 있는 여인초 큰 잎들이 휘청거렸다. 날씨가 좋아 방 창문들을 다 열어놨는데 바람이 세게 불기 시작했다. 밖을 내다보니 작은 숲의 나무들이 세차게 출렁거린다. 오늘 날씨예보에 갑작스런 비가 있다고 했는데 진짜네. 마치 태풍 직전처럼 쏴아쏴아 바람소리가 들리니 이상하게 가슴이 시원해진다. 내일 수술 때문에 자정부터 물 포함 금식이라 세끼를 아주 기똥차게 먹기로 했는데 늦은 아침 덕분에 늦은 점심이 되고 엄청 늦은 저녁이 될 예정이다. 사실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렇게 튀어나온 배도, 배 안에서 꿈틀거리는 태동도, 뒤뚱거리며 걷는 것도 모두 마지막이라는 것이. 오늘 출산 전 마지막 엽서를 쓰다가 영화 생각이 났다. 에서 '태어나기 전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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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모퉁이다방 2021. 5. 30. 14:55
아빠는 롯데팬인데, 야구 이야기를 하면 자신은 그리 팬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저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니까 그 시간마다 보게 되는 거라고. 신기하게도 이른 휴가가 시작되고 집에만 있게 되자 매일 야구를 챙겨보게 되었다. 아빠 말대로 월요일을 제외하면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니 보게 되더라. 미세먼지 가득한 날도 있지만 맑은 날들도 꽤 있어 푸른 잔디밭과 맑은 하늘, 뻥- 소리를 내며 멀리멀리 날아가는 공들도 볼 수 있고, 뭔가 축구나 농구와 달리 여유로워 보이면서도 긴장되는 경기의 흐름도 그렇고. 경기장 한가로운 자리에서 시원한 생맥주 한 잔하면 정말 좋겠다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러다 하루키 생각이 났다. 하루키가 한가롭게 야구경기를 보다 문득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는 것. 작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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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4모퉁이다방 2021. 5. 27. 11:31
어제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그랬다. 좋은 와이프 얻어서 자기가 이런 호사도 누린다고. 친구는 엘리베이터에서 남편에게 봉투를 건넸는데 이건 너 거야, 금령이꺼 아니라 용효 너 꺼야, 그러니까 꼭 너를 위해서 써, 라고 했다. 봉투 안에는 상품권과 메모가 있었다. 아기와 나는 선물을 많이 받았으니 이건 꼭 너를 위해서 쓰라고, 지금껏 좋은 남편이었고 이제 좋은 아빠가 될 게 분명하다고 쓰여 있었다. 남편은 자기 친구들은 아기를 낳으면 선물 같은 건 하지 않고 아빠가 되는 사람이 술을 한 턱 쏜다며 내 친구들의 연이은 선물과 격려를 놀라워했다. 나도 결혼식 이후 이렇게 벅찬 감정을 느낀 건 오랜만이다. 모두들 너무너무 고맙다. 내가 이렇게 챙김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건지. 아기를 잘 낳고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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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6모퉁이다방 2021. 5. 25. 22:50
오늘은 수술 전 마지막 정기검진일. 태동검사를 하고 진료를 봤다. 검사 이십분 여 동안 탕이는 조금씩 꼼지락거렸다. 이런 사랑스런 태동도 이번주가 마지막이다. 사람 많은 토요일보다 그나마 사람이 적은 평일이 병원도 간호사 분도 선생님도 여유로우시다. 선생님은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물으셨다. 아직도 머리가 위에 있을까요? 네, 그런 것 같아요. 역시 탕이는 돌지 않았다. 처음으로 선생님이 진료 외 다른 이야기를 건네셨다. 오늘의 날씨에 관한 것이었는데, 밖의 날씨가 어떤가요? 바람이 많이 불어요. 날씨 때문인지 오늘따라 손이 많이 차가운데 배에 손 올릴 때마다 걱정이 된다고. 선생님이랑도 어느새 팔개월 째다. 다 정상이란다. 오늘은 얼굴을 좀더 자세히 보여 주셨다. 뭔가 저번 진료 때보다 얼굴이 성숙해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