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퉁이다방'에 해당되는 글 450건

  1. 요거트 2021.07.16
  2. 디카페인 2021.07.14
  3. 손톱 2 2021.07.06
  4. 착각과 오산 2021.07.02
  5. D+30 4 2021.06.30
  6. D-day 5 2021.05.31
  7. D-1 2021.05.30
  8. D-2 2021.05.30
  9. D-3 2021.05.28
  10. D-4 2 2021.05.27

요거트

from 모퉁이다방 2021. 7. 16. 11:13

 

  요즘 즐거움 중 하나는 바로 요거트. 시판 요거트는 너무 달고 그리 달지 않은 건 비싸고 해서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예전에 그릭요거트를 만들어 본 적 있는데 면보 걸러내고 냉장고에 숙성시키는 시간도 있고 해서 매번 해 먹기는 번거로웠었다. 요거트 만드는 법을 다시 검색해보니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리고 꽤 맛있어서 계속 만들고 있다. 넉넉한 밀폐용기에 1리터 우유를 붓고 마시는 요구르트도 붓는다. 닥터캡슐로 해봤는데 잘되더라. 나무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준 뒤 예열해놓은 전자렌지 겸 오븐에 넣어둔다. 잠들기 전에 넣어두고 아침에 꺼낸다. 밀폐용기를 흔들어 내용물이 단단해진 걸 확인한 후 냉장고에 넣어둔다. 아침밥을 허겁지겁 먹고 아침수유를 하고 아기가 잠이 들면 밀폐용기를 꺼낸다. 손잡이가 없어 잘 쓰지 않았던, 엄마가 준 고전적인 모양의 컵을 꺼낸 뒤 요거트를 가득 담는다. 여기에 다섯가지 베리로 만든 잼을 한 스푼 얹고 잘게 다진 견과류를 잔뜩 뿌린다. 얼마 전에 꽃집에서 산 메이드 인 타이 컵받침을 들고 집 안에서 제일 편한 공간에 가서 먹는다.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매일 아침 이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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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페인

from 모퉁이다방 2021. 7. 14. 16:15

 

 

  점심으로 샌드위치 세트를 시켰다. 닭가슴살 샌드위치와 디카페인 커피. 출산하고 커피는 두 번째다. 조리원에서 원장 선생님이 작은 종이컵에 따라준 걸 아껴 마셨더랬다. 수유를 끝내고 잠든 아이를 보듬어 트림을 시키려 노력한 뒤 침대에 눕혔다. 밤낮을 구별하게 하려고 낮에는 아기침대가 거실에 있다. 문밖으로 옅게 부스럭 소리가 났고 연이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문할 때 이렇게 남겼다. 아기가 있어 문앞에 두고 노크해주세요. 오늘은 커피가 간절했다. 샌드위치를 한 입 물고 그동안 참았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창 밖을 보니 그제서야 구름이 보였다. 초록으로 물든 산 위에 짙고 풍성한 구름이 가득 차 있었다. 근사한 구름이었다. 여행지에서 이런 구름을 만났더라면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었겠지 생각했다. 요즘 핸드폰 메모장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다른나라로 갈 수 있다면 사올 것들 목록을 적어두고 있다. 그 나라 비누 사오기. 요거트 사먹기. 특이하고 자그마한 접시 사오기. 그 나라 맥주 마시기. 잔뜩 사놓고 미처 못 마신 맥주는 트렁크에 담아오기. 요즈음 집에서 온종일 생활하면서 친구들에게 선물받은 물건을 자주 쓰게 되는데, 그때마다 그 사람의 마음을 떠올린다. 샤워를 하고 설거지를 할 때 수제비누를 쓰며 B를 생각하고, 접시에 음식을 담으며 S와 B를 생각한다. 잠옷을 입으며 M과 S를 생각하고, 화분에 물을 주며 H를 생각한다. 아직 몇일 쓰지 못한 5년 다이어리로 S를 생각하고, 아가에게 옷을 입히며 H씨를 생각한다.

 

  낮에 트림을 시켜줄 때 넷플의 영상을 조금씩 보고 있다. 갓 육아를 시작한 엄마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보기 시작했는데 재밌어서 트림을 시키지 않을 때도 보고 있다. 1시즌 마지막에 이런 대화가 나왔다. 실수투성이 초보엄마 주인공과 느긋한 나이의 육아교실 선생님과의 대화이다. 

 

-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요. 사람들이 운동하거나 제러미가 숨 쉬는 소리도 짜증 나요. 괴팍한 엄마가 되고 싶진 않아요.

- 당연히 그렇겠죠. 당신이 이상한 게 아니에요.

- 전 엄마가 되기엔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요. 지난주에 애랑 떨어져 있었는데 정말 편안하더라구요. 마루를 닦고 엄마랑 싸우는 것조차 괜찮았어요.

- 정상인 거죠. 진짜예요.

- 이러다 늘 애가 뒷전이 되면요?

- 어떻게 될 지 미리 사서 걱정하지 마요.

- 저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 그것도 정상이죠. 에스터가 이번주에 그러더군요. 엄마이기도 하지만 나는 나라는 걸 깨달았대요. 그게 사실이구요.

- 맞아요. 에스터는 똑똑하니까요. 정말 똑똑하죠. 좀 재수없긴 하지만.

- 그래도 에스터는...

- 정말 재수없죠.

- 맞아요.

- 영리하긴 해요.

- 계속 과거만 돌아보면 잃게 된 것만 자꾸 떠오를 거예요.

- 남편이랑은 어때요? 이름이 뭐였죠? 제러미였나요?

- 네. 사이가 좋진 않아요.

- 아기가 울면 꼭 안아주잖아요. 무슨 이유로 울건 간에 아기를 이해하려 하고 또 안심시키려 노력하죠. 그렇죠. 스스로나 다른 이에게도 똑같이 한다고 생각해봐요. 우린 그냥 다 큰 아기들일 뿐이에요.

 

  그리고 육아교실 선생님은 주인공에게 사람들과 계속 대화하라고 말한다. 육아교실 내내 시크한 태도를 유지하던 선생님이 눈물을 글썽이는 주인공의 등을 톡톡 두드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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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

from 모퉁이다방 2021. 7. 6. 05:27

 

   이번주 목요일이면 산후도우미 이모님의 도움도 끝난다. 처음 이모님이 오셨을 때 모든 게 서툴었고 3주 뒤에 혼자서 어찌하나 싶었는데 걱정할 때마다 이모님이 응원해주셨다. 산모님, 다 하실 수 있어요. 분명 다음주가 다르고 다다음주가 다를 거예요. 정말이었다. 1주차가 다르고, 2주차가 달랐다. 그리고 지금 3주차. 낮시간 동안 혼자서 할 수 있을 거라는 조금의 자신감이 몽글몽글 솟아오르고 있다. 지안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매일 얼굴이 변하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다. 3.04키로로 태어난 아기가 영유아1차검진 때 벌써 4.4키로. 또래보다 약간 빠르게 건강하게 성장 중이라고 했다. 

 

   막막하고 아득한 순간들이 있었다. 모유수유를 하러 처음으로 병원 수유실에 갔을 때. 수유 하는 방법을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이름이 뭐냐고 묻더니 신생아실에서 아가를 데려왔다. 순식간에 작디 작은 아가가 내 품에 안겨졌다. 작은 입을 가슴 쪽에 가져다대니 빠는 듯 마는 듯 서로 어색하게 품에 안겨 있던 순간. 바로 옆의 엄마는 어찌나 잘하던지. 나중에는 수유하길 포기하고 남은 시간동안 아기 얼굴을 요리저리 바라봤었다. 그리고 남편이 가고 조리원에 혼자 남게 된 순간. 이제 나혼자서 두 주동안 해내야한다는 생각에 왈칵 눈물이 쏟아지던 밤이었다. 사실 조리원은 천국이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여러 통증 때문에 잠 못 들던 밤들. 고작 한 달 지났는데 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오늘은 이모님과 아기의 손톱을 처음 잘랐다. 아기 손톱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러웠다. 이모님이 손수건을 동그랗게 말아 아기 손에 넣은 채 잡아주셨고 나는 아기 손톱용 작은 가위를 꺼냈다. 아기는 자고 있었다. 그냥 일자로 살에만 안 닿게 살짝 잘라주면 되요. 혹여나 살을 자르게 될까 자세를 여러 번 바꾸고 조심스레 가위질을 했다. 얇고 여린 것이 쓱 하고 잘려나와 바닥에 톡 하고 떨어졌다. 와, 생각보다 굉장히 부드럽네요. 지금 나는 온통 처음인 것들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첫 모유수유, 첫 분유타기, 첫 기저귀갈기, 첫 똥 씻어내기, 첫 배냇저고리, 첫 바디수트, 첫 예방접종, 첫 목욕, 첫 유산균 먹이기, 첫 콧속 청소, 첫 손톱깍기.

 

   이제는 모유수유에 아기도 나도 엄청 익숙해져서 둘 다 왠만하게 한 방에 딱하고 합체를 한다. 조리원에서는 매일 아침에 목욕을 시키고 아기를 방에 데려다줬다. 선생님들은 목욕하고 목 마를 때니까 엄마 젖 많이 먹고 와, 라며 아기를 수유쿠션에 눕혀 주셨다. 그러면 아가는 조금은 상쾌해진 표정으로 엄마인지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의 앞에 있는 나를 바라보다가 뭔가 자세가 잡히면 아기새처럼 작은 입을 쩍쩍 벌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여전히 어려웠던 모유수유를 열심히 해보려고 애를 썼었다.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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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과 오산

from 모퉁이다방 2021. 7. 2. 15:06

 


  이천이십일년 오월 마지막 날에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되는 건 한 순간이었다. 수술 두 시간 전에 병원에 갔고, 진료실에서 마지막 진료를 봤다. 분만실 침대에 누워 대기하고 있다 시간이 되자 수술실에 걸어 들어갔다. 수술대에 누워 이것저것 시키는 대로 했더니 주치의 선생님이 들어와 걱정말라고 손을 잡아 주셨다. 마취가 시작되었다. 아기가 나올 때까지 하반신 마취만 하는 줄 알았는데 물어볼 새도 없이 수면마취가 시작됐다. 눈을 떠보니 숨이 막혔다. 옆에 남편이 있어 여기가 어딘지 지금이 언제인지도 모른채 숨 막혀, 라고 말했다. 남편이 간호사를 불렀고 간호사가 호흡기를 떼어주고 마스크를 벗겨줬다. 수술이 끝났다고 했다. 회복실에 온지 몇시간이 지났다고. 아기는 잘 태어났다. 남편이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줬다. 동영상에서 간호사가 두꺼운 요를 감싼 아가를 데려왔고 아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나올 때 양수를 조금 먹었는데 괜찮다고 했다. 동영상을 보는데 눈물이 났다. 감격이나 뭉클 이런 격한 감정보다는 뭔가 내 인생에 정말 큰 일이 벌어졌구나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남산만 했던 배가 푹 꺼져 있었다. (나중에 다시 나왔다. 하하) 다리를 움직일 수 있으면 병실에 올라갈 수 있다는 말에 열심히 다리를 움직였다. 병실에 옮겨다 준 회복실 간호사들이 회복이 무척 빠르다고 했다. (무통 떼자마자 고통이 시작되었다 -_-)

  병원에서 보낸 4박 5일 동안 남편이 수발을 열심히 들어주었다. (수발의 사전적 뜻을 찾아봤다. 신변 가까이에서 여러 가지 시중을 듦.) 출산 뒤 나오는 오로 때문에 기저귀 패드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열심히 갈아주고 닦...(고맙습니다)아 주었다. 이틀을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배가 고픈 것보다 목이 무척 말랐다. 물을 마셔도 된다고 했을 때 세상에 물이 이렇게 맛있었었나 싶을 정도로 맛나게 미지근한 생수 한 통을 빨대로 꿀꺽꿀걱 마셨다. 누워 있는 동안 남편은 혼자 하루에 두 번 면회시간에 탕이를 보러갔다. 동영상과 사진을 찍어왔는데 매번 자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는 함께 보러 갔는데 그때도 매번 자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아이는 참 순하구나, 생각했다. 퇴원수속을 하는 동시에 알게 되었다. 그건 착각과 오산이었다고. 하하. 탕이의 이름은 지안이가 되었다. 지혜롭고 편안한 사람.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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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0

from 모퉁이다방 2021. 6. 30. 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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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y

from 모퉁이다방 2021. 5. 31. 09:59

 

  어제 자려고 누웠는데 역시나 잠이 오지 않았다. 푹 자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억지로 누워 있다 배도 불편하고 해서 일어났다. 갑자기 쏟아지는 비와 천둥번개 탓에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가 생각났다. 틀어놓고 소파에 기대 있다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고 거실로 나가고를 반복했다. 출산가방은 작은 방에 작은 기내용 캐리어를 펼쳐놓고 생각날 때마다 채워 넣었는데 지퍼를 잠그니 아주 빵빵해졌다. 생리대는 부피가 꽤 나가는데 무겁지가 않아 에코백에 따로 챙겼다. 집에 있으면서 책을 많이 읽지 못해 네 권을 챙겼는데 괜히 챙긴 거 아닌가 싶다. 아침에도 다정한 사람들의 메시지가 이어졌고, 남편은 느즈막히 일어나 지난 밤 설거지 중이다. 차분한 노래들을 듣자 싶어 강아솔 음악을 재생목록에 잔뜩 추가했는데 <사랑을 하고 있어>가 너무 좋아 계속 반복 중이다. <온앤오프>에 김윤아가 아들과 남편과 함께 여름카레를 만들어먹더라. 왜 여름카레인가 하면 여름에 나오는 채소들이 듬뿍 들어가기 때문. 양파, 가지, 파프리카, 돼지고기에 토마토 소스까지. 여름채소들을 잘게 썰어 넣더라. 우스타 소스와 간장도 넣고 이것저것 마지막에 추가하면 완성되는 여름카레. 이름이 너무 예쁘다, 여름카레. 오늘 물도 한 방울 못 마시는 상황에서 그 여름카레가 갑자기 너무 먹고 싶다. 쌀밥에 뜨끈뜨근한 카레 얹어서 한 입 가득- 후아.    

 

 

사랑을 하고 있어 

- 강아솔

 

제법 추운 밤이었지

창밖으로 별이 내리고

너에게 기대는 내게 말없이

어깨를 낮추어주던 너

엇갈리던 숨소리가 

어느새 하나로 들려와

이대로 우리 잠들 수 있다면

순해진 마음을

가만히 안고서

나 사랑이 믿어지던

시간들을 기억해

사랑이 사랑으로만 

설명되던 순간들을

어떤 물음도

단 하나의 답으로 충분했던

너를 보면 나 사랑을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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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

from 모퉁이다방 2021. 5. 30. 21:38

 

 

 

  늦은 점심을 먹고 집에 돌아와 다 마른 빨래를 개고 있는데 갑자기 거실에 있는 여인초 큰 잎들이 휘청거렸다. 날씨가 좋아 방 창문들을 다 열어놨는데 바람이 세게 불기 시작했다. 밖을 내다보니 작은 숲의 나무들이 세차게 출렁거린다. 오늘 날씨예보에 갑작스런 비가 있다고 했는데 진짜네. 마치 태풍 직전처럼 쏴아쏴아 바람소리가 들리니 이상하게 가슴이 시원해진다. 내일 수술 때문에 자정부터 물 포함 금식이라 세끼를 아주 기똥차게 먹기로 했는데 늦은 아침 덕분에 늦은 점심이 되고 엄청 늦은 저녁이 될 예정이다. 사실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렇게 튀어나온 배도, 배 안에서 꿈틀거리는 태동도, 뒤뚱거리며 걷는 것도 모두 마지막이라는 것이. 오늘 출산 전 마지막 엽서를 쓰다가 영화 <소울> 생각이 났다. <소울>에서 '태어나기 전 세상'에 있던 생명체들이 자신에게 딱 맞는 '불꽃'을 찾은 뒤 지구를 향한 비행을 시작하는 장면. 속도를 높이며 신나고 즐거운 표정으로 지구에 입성하는 장면. 아마도 탕이는 지금씩 마지막 불꽃을 찾았겠지. 엄마아빠를 만나러 즐거운 비행을 시작하겠지. 탕이는 어떤 표정으로 세찬 바람을 가르며 올까. 신나고 즐겁고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었으면 좋겠는데. 내일 수술 전 무서운 생각이 들 때면 그 표정을 상상해봐야지. 우리의 아이가 마침내 마지막 불꽃을 완성하고 신나게 바람을 가르며 오고 있다 생각해야지.

 

  예정일이 6월 12일 토요일이어서 매주 토요일마다 주수가 바뀌었다. 매주 토요일마다 우리는 늦잠을 잤고 침대에서 최대한 뒤적거리다 앱을 켰다. 앱에는 매주 아기의 주수별 특징이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14주에는 잇몸에 유치가 생겼다고 했고, 19주에는 엄마 아빠의 목소리를 기억한다고 했다. 24주에는 생식기가 발달하고 있다고 했고, 27주에는 눈을 뜰 수 있다고 했다. 30주에는 숨쉬기 연습에 열중이라고 했고, 32주에는 손발톱이 거의 다 자랐다고 했다. 37주에는 피부를 보호하던 태지와 솜털을 벗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38주에는 손가락을 빨고 하품도 미소를 짓거나 얼굴을 찡그릴 수도 있단다. 태어난 아기들이 하는 모든 배냇짓을 하며 엄마 아빠를 만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단다. 이런 주수별 특징을 침대에 나란히 누워 한 사람이 읽고 한 사람이 들었다. 그러면서 정말? 그걸 이제 할 수 있대? 하며 신기해했다. 전탕이 콩콩콩- 죤탕이죤탕이- 라고 부르며 즐거워했다. 이 토요일 아침시간도 마지막이네. 내가 좋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우리는 좋은 가정을 이룰 수 있을까. 아직까지는 물음표 투성이다. 내일 당장 아가가 태어난다는 것도 믿어지지가 않는데. 병원에 들어서면 실감이 나겠지. 심장이 마구 떨리기 시작하겠지. 잘 할 수 있다, 잘 할 수 있어,  스스로 되뇌어야겠지. 남편은 하루종일 차태현이 나왔던 <번외수사>에 빠져 드라마 시청 중이고, 아침부터 다정한 사람들이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고 있다. 교촌치킨과 참외를 마지막으로 오늘의 식사를 마무리해야지. 으으- 마흔 둘의 노산 엄마, 화이팅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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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

from 모퉁이다방 2021. 5. 30. 14:55

 

 

  아빠는 롯데팬인데, 야구 이야기를 하면 자신은 그리 팬이 아니라고 하신다. 그저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니까 그 시간마다 보게 되는 거라고. 신기하게도 이른 휴가가 시작되고 집에만 있게 되자 매일 야구를 챙겨보게 되었다. 아빠 말대로 월요일을 제외하면 매일 정해진 시간에 하니 보게 되더라. 미세먼지 가득한 날도 있지만 맑은 날들도 꽤 있어 푸른 잔디밭과 맑은 하늘, 뻥- 소리를 내며 멀리멀리 날아가는 공들도 볼 수 있고, 뭔가 축구나 농구와 달리 여유로워 보이면서도 긴장되는 경기의 흐름도 그렇고. 경기장 한가로운 자리에서 시원한 생맥주 한 잔하면 정말 좋겠다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러다 하루키 생각이 났다. 하루키가 한가롭게 야구경기를 보다 문득 소설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다는 것.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작가의 말에 그런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책은 이사를 하면서 중고서점에 팔아버렸다. 다행히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도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 이 책은 아직 다 읽지 못해 팔지 않았다. 

 

 

  1978년 4월의 어느 쾌청한 날 오후에 나는 진구 구장에 야구 경기를 보러 갔습니다. 그해의 센트럴리그 개막전으로, 야쿠르트 스왈로스와 히로시마 카프의 대전이었습니다. 오후 1시부터 시작하는 낮 경기입니다. 나는 그 당시부터 야쿠르트 팬이었고, 진구 구장에서 가까운 곳에서 살았기 때문에(센다가야의 하토노모리하치만 신사 옆입니다) 산책 나간 김에 자주 야구 경기를 보러 갔습니다. 

  그 무렵의 야쿠르트는 아무튼 약한 팀이어서 만년 B 클래스에 구단도 가난하고 화려한 스타 선수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인기도 별로 없었어요. 개막전이라고 해봐야 외야석은 텅텅 비었습니다. 나 혼자 외야석에 드러누워 맥주를 마시면서 경기를 봤습니다. 당시의 진구 구장 외야석은 의자가 아니라 잔디 비탈뿐이었습니다. 무척 상쾌한 기분이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하늘은 맑게 개고 생맥주는 완벽하게 시원하고 오랜만에 보는 초록빛 잔디 위에 하얀 공이 또렷이 떠올랐습니다. 야구란 역시 야구장에 가서 봐야 하는 것이지요. 진짜로 그렇습니다. 

  야쿠르트 선두 타자는 미국에서 온 데이브 힐턴이라는 호리호리한 무명의 선수였습니다. 그가 타순 1번이었습니다. 4번은 찰리 매뉴얼입니다. 나중에 필리스의 감독으로 유명해졌는데 그 당시 그는 실로 힘세고 무시무시한 인상의 타자여서 일본 야구팬에게는 '붉은 도깨비'라는 별명으로 통했습니다. 

  히로시마의 선발 투수는 분명 다카하시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야쿠르트의 선발은 야스다였습니다. 1회 말, 다카하시가 제1구를 던지자 힐턴은 그것을 좌중간에 깔끔하게 띄워 올려 2루타를 만들었습니다. 방망이가 공에 맞는 상쾌한 소리가 진구 구장에 울려 퍼졌습니다. 띄엄띄엄 박수 소리가 주위에서 일었습니다. 나는 그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문득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을지 모른다'라고.

  그때의 감각을 나는 아직도 확실하게 기억합니다. 하늘에서 뭔가가 하늘하늘 천천히 내려왔고 그것을 두 손으로 멋지게 받아낸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어째서 그것이 때마침 내 손안에 떨어졌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 됐건 아무튼 그것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일종의 계시 같은 것이었습니다. 영어에 epiphany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본어로 번역하면 '본질의 돌연한 현현' '직감적인 진실 파악'이라는 어려운 단어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어느 날 돌연 뭔가가 눈앞에 쓱 나타나도 그것에 의해 모든 일의 양상이 확 바뀐다'라는 느낌입니다. 바로 그것이 그날 오후에 내 신상에 일어났습니다. 그 일을 경계로 내 인생의 양상이 확 바뀐 것입니다. 데이브 힐턴이 톱타자로 진구 구장에서 아름답고 날카로운 2루타를 날린 그 순간에.

  시합이 끝나자(그 시합은 야쿠르트가 이겼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전차를 타고 신주쿠의 기노쿠니야 서점에 가서 원고지와 만년필(세일러, 2,000엔)을 샀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워드프로세서도 컴퓨터도 보급되지 않아서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매우 신선한 감각이 있었습니다. 가슴이 두근두근 설렜습니다. 만년필을 사용해 원고지에 글씨를 쓰다니, 나로서는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밤늦게 가게 일을 끝내고 주방 식탁 앞에 앉아 소설을 썼습니다. 새벽녘까지의 그 시간 외에는 내가 자유롭게 쓸 시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대략 반년 만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라는 소설을 썼습니다(당초에는 다른 제목이었지만). 초고를 다 썼을 때는 야구 시즌도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그해에는 야쿠르트 스왈로스가 대부분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리그 우승, 일본 시리즈에서 최고의 투수진을 거느린 한큐 브레이브스를 깨부쉈습니다. 그것은 실로 기적 같은, 멋진 시즌이었습니다. 

- p. 45-47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 현대문학

 

 

   독서대에 책을 펼쳐 45페이지에서 47페이지를 옮겨 적었다. 방 창문은 활짝 열려 있다. 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린다. 그리고 생각했다. 초여름은 뭔가를 시작하기에 좋은 계절이라고. 그러니 당신도, 나도 뭔가를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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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

from 모퉁이다방 2021. 5. 28. 18:24

 

열달동안 차곡차곡 받아온 마음들.

 

 

 


전탕이야, 소중한 마음들을 잊지않는 고운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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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4

from 모퉁이다방 2021. 5. 27. 11:31

 

 

  어제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그랬다. 좋은 와이프 얻어서 자기가 이런 호사도 누린다고. 친구는 엘리베이터에서 남편에게 봉투를 건넸는데 이건 너 거야, 금령이꺼 아니라 용효 너 꺼야, 그러니까 꼭 너를 위해서 써, 라고 했다. 봉투 안에는 상품권과 메모가 있었다. 아기와 나는 선물을 많이 받았으니 이건 꼭 너를 위해서 쓰라고, 지금껏 좋은 남편이었고 이제 좋은 아빠가 될 게 분명하다고 쓰여 있었다. 남편은 자기 친구들은 아기를 낳으면 선물 같은 건 하지 않고 아빠가 되는 사람이 술을 한 턱 쏜다며 내 친구들의 연이은 선물과 격려를 놀라워했다. 나도 결혼식 이후 이렇게 벅찬 감정을 느낀 건 오랜만이다. 모두들 너무너무 고맙다. 내가 이렇게 챙김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건지. 아기를 잘 낳고 길러서 고마움에 보답해야지. 

 

  어제는 역시나 친구가 멀리서 얼굴을 보러 와줬다. 버스를 세 번 갈아타고 왔다고 한다. 나는 동네를 빙 둘러서 둘이 먹을 빵과 샐러드를 사왔다. 동네에 좋아하는 꽃집이 있는데, 수요일마다 행사를 한다. 작은 꽃다발을 한정수량 만들어 오천원에 판다. 꽃다발을 두 개 사와 하나는 친구를 주고 하나는 유리컵에 꽂아뒀다. 내가 가진 꽃은 스토크, 비단향꽃무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찾아보니 이런 설명이 있었다. '영원히 아름답다'는 꽃말을 가지고 있다. 또 어떤 역경이라도 밝게 극복하는 강인한 사람을 뜻하기도 하며, 지금 그대로의 모습이 가장 훌륭하다는 뜻도 안고 있다. 

 

  이번주에는 어디에든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다. 동생이 오늘 아침 축하메시지를 보내며 둘이 보내는 마지막 생일이네, 라고 했다. 오늘은 출산 전, 진짜 엄마가 되기 전 마지막 생일. 마지막 목요일이기도 하고. 일찌감치 일어나 어제 배달온 갈비탕에 미역을 추가해 아침밥을 먹었다. 비가 촉촉히 내리니 마음이 차분해진다. 오늘은 책을 조금 읽어야지. 요즘 통 책을 읽지 못했다. 좋은 영화도 한 편 볼 수 있으면 봐야지. 저녁에 남편이 퇴근하면 같이 밥을 먹고.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하루를 보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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