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8'에 해당되는 글 9건

  1. 하루의 취향 (10) 2018.08.26
  2. 우리, 아이 없이 살자 (2) 2018.08.25
  3. 잘돼가? 무엇이든 (4) 2018.08.21
  4. 말복 (6) 2018.08.16
  5.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 (6) 2018.08.15

하루의 취향

from 서재를쌓다 2018.08.26 23:07



   어제는 시옷의 모임이 있었다. 이 책은 출간하자마자 읽었는데, 어제 을지로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포스트잇을 붙여놓았던 구절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이런 문장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마주앉아야 한다. 술 한 잔을 앞에 두고, 술이 아니라면 차를 앞에 두고, 마주 앉아야 한다. 그리고 별 거 아닌 오늘 하루를 말해야 한다. 당장은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일지라도, 쌓이면 견고한 '우리'가 되니까. '우리'는 함께 즐거울 것이다. 함께 어려움을 넘을 것이다. 오해가 쌓일 틈은 없을 것이다. 서운함이 쌓일 겨를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마주앉아 오늘을 이야기하기 시작한 이상." 어제 우리는 을지로 노가리 골목 만선호프의 야외자리에 앉아 생맥주와 노가리, 닭똥집 튀김, 두부김치, 오징어 숙회, 김 안주를 차례대로 시키면서 늦여름 토요일 밤을 즐겼다. 을지로 골목에는 맥주 마시는 사람들로 그득했고, 달은 동그랬고, 바람이 간간이 불었다. 책은 멤버의 반은 읽었고, 반은 읽지 않았다. 그 반은 김민철 씨의 책을 모두 읽었는데, 한 작가를 다같이 이렇게 같은 시기에, 같은 속도로 알아가고 있다는 게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튼 책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고, 간만에 만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이야기하며 먹고 마셨다. 둘은 새로운 직장에 출근을 했고, 또 둘은 이사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연애가 계속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늘 에너지가 넘치는 N은 금요일마다 오리발을 들고 출근을 한다고 했다. 수영과 필라테스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 G는 내게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글을 써보라고 했다. 2차로 종로의 포장마차까지 간 우리는 각자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술은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 새벽 시간까지 깨어 있는 게 정말 오랜만이라 뭔가 피곤하면서도 조금은 벅찬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어제의 우리도 <하루의 취향>의 어느 한 챕터를 차지 할 수 있었을 거다. 우리 각자의 <하루의 취향>에. 책날개에 이런 글이 있다. "취향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실패와 시도 끝에 생겨나는 결과물이다. 고상하고 우아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 속에서 계속 스스로와 마주하게 된다는 점. 이 책은 그 과정에 관한 것으로, 그날그날 마음이 이끄는 쪽을 바라보며 쓴 글이다. 좋아하는 음악, 책, 취미처럼 단편적인 것에서 시작해 사람 취향, 싫음에 대한 취향, 나라는 사람에 대한 취향까지, 흔들림의 과정을 통해 선택한 가치들이 삶의 중심이 된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시옷의 모임을 하고 나면 늘 나를 마주보게 된다. 그리고 어제보다 좀더 나은 오늘을 살고 싶어진다. 이상하게 그렇다. 이 책도 그런 책이다. 나다운 하루, 좀더 나답기 위해 하는 노력들이 담겨 있다. <모든 요일의 기록>, <모든 요일의 여행>, <하루의 취향>까지. 삼 년여에 걸쳐 김민철 작가를 조금씩 알아왔다. 여전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책은 <모든 요일의 기록>이지만, <하루의 취향>까지 읽고나니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우리가 바짝 가까워진 느낌이다. 작가의 일상 이야기가 이 책에 제일 많다. 궁금했던 남편 이야기도. 제일 좋았던 글은 지하철에서 다시 읽어보니 '우리도 사랑일까'. <봄날은 간다>의 상우 이야기로 시작해 <우리도 사랑일까>의 루 이야기를 거쳐 자신의 남편 이야기로 끝나는 그 글. 그 글의 끝은 이렇다. "상우의, 루의 사랑 취향을 가진 나는 어떤 남자와 결혼했냐고? 언젠가 남편이 내게 말했다. "사랑은 한 사람을 평생 알아가는 과정이야." 여기, 이 사람의 사랑에 관한 가치관이 모두 들어 있다. '한 사람을', '평생', '알아가는', '과정'. 이 단어들의 의미 하나하나는 설명하지 않도록 하겠다. 어쨌거나 나는 그 말을 한 사람과 결혼했다. 자랑은 여기까지." <우리도 사랑일까>를 다시 봐봐야겠다. 순전한 루의 마음으로.  


-


  그 말을 오래오래 곱씹었다. 그렇다. 이 집은 우리의 선언이었다. 과도한 대출을 받아서 비싼 동네에 비싼 집을 사고 그게 오를 거라 기대를 하며 하루하루 빚을 갚으며 지금의 행복을 유예하는 삶에 대한 거부. 우리 깜냥의 대출을 받아서 오를 거라는 기대도 없이 나중에 부자가 될 거라는 희망도 없이 지금 잘 꾸며놓고 지금 잘 살겠다는 선언. 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우리 둘이 괜찮으면 괜찮다는 우리 삶에 대한 선언.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음을 단단히 묶었다. 그렇게 공사가 시작되었다. 

- 29쪽


   몇 주 후 엄마와 이모가 우리 집에 다녀갔다. 가장 반대하던 그들이었기에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하지만 기우였다. 그들은 우리가 꾸며놓은 집을 보는 순간, 단숨에 우리의 선언을 이해했다. 그때 알았다. 원하는 대로, 내 취향대로 살아버리는 것은 그 어떤 말보다 강력한 선언이라는 것을. 내 인생을 선언할 권리는 결국 나에게 있다는 것을.

   그렇게 망원호프는 우리 삶에 대한 선언이 되어버렸다. 

- 29-30쪽


  "어젯밤, 벚꽃 산책 진짜 좋았어요."

  "벚꽃 산책?"

  "응."

  "누가? 우리가?"

  이럴 수가. 설마 기억을 못하는 것인가. 완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선배에게 말했다.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있고 나쁜 날도 있는데, 좋은 날이 오면 최대한 길게 늘려야 한다며, 그래서 나 데리고 나갔잖아요."

  "아, 아. 기억난다. 거기 벚꽃 너무 좋지?"

  "완전 완전 완전 좋았어요. 선배는 좋다면서 풀밭에서 막 뒹굴었잖아."

  선배의 표정이 갑자기 굳었다. 그러더니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내가 뒹굴었다고? 그 풀밭에서?"

  "응. 한강 내려다보이는 그 풀밭에서. 나도 같이 뒹굴까하다가, 나는 관뒀지 뭐."

  "진짜 내가 뒹굴었어? 거기에?"

  "응. 기억 안 나요?"

  "거기 완전... 온 동네 개들이 나 와서 볼일 보는 풀밭이야... 내가... 거길... 뒹굴었다고?"

  나도 완전 굳은 표정으로 선배를 잠깐 바라봤다. 또 선배의 필름이 끊어졌던 것이다. 이제 내가 뒹굴 차례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배를 잡고 뒹굴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 

- 42-43쪽


   "저 너무 대충하죠?"
   선생님은 싱긋 웃더니 대답했다.
   "민철 씨는 스스로에게 참 관대한 것 같아요."
   뭔가 나의 핵심을 순간적으로 간파당한 느낌이었다. 스스로에게 관대하다니, 이건 욕인가 칭찬인가 잠깐 고민을 하다가 칭찬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살면서 나 스스로에게 관대한 분야가 하나쯤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았으니까. 스스로에게 관대한 그 시간이 나의 숨구멍이 되어주고 있으니까. 물론 바로 옆자리 아저씨에겐 스스로에게 엄격한 그 시간이 숨구멍이 되어주고 있었지만. 숨구멍의 모양도 살아가는 방식만큼 다양한 건 당연한 것이다. 어쨌거나 스스로에게 관대한 마음으로, 이번 주에도 나는 공방 문을 연다. 
- 57쪽

무언가로 향하는 마음이
취향이라면
사람만큼 자신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게 또 있을까

입꼬리가 예뻐서,
눈매가 선해서,
반바지가 잘 어울려서, 
말이 잘 통해서,
혹은 
침묵이 편안해서,
입맛이 비슷해서,
농담이 잘 맞아서,
실수까지 귀여워서,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서.

모든 사랑에 붙는 
모든 이유는 결국 하나가 아닐까.

당신이라는 사람이 
너무 내 취향이라서.
- 79쪽

   루루는 가장 슬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간다.
   "우리가 늙으면 내가 매일 이 짓을 해왔다는 걸 고백하려고 했어. 당신을 웃게 해주려고."
   아, 나는 이보다 더 극진한 사랑 고백을 알지 못한다.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 한 사람을 보며, 매일 같은 장난을 쌓으며, 늙었을 때 그 장난을 고백하는 장면까지 생각하는 사랑. 늙은 그 사람이 단 한 번 깔깔 웃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매일 마음은 간질거리고 그 마음으로 오늘치 차가운 물을 준비하는 사랑. 한 순간의 떨림은 사랑의 도입부라 인정하고, 같이 쌓는 시간에 더 많은 마음을 내주는 사랑. 둘만 알아듣는 농담담 하나가 생길 때마다, 귀중한 보석 하나를 얻는 기분이 드는 사랑. 물론 완벽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은 사랑에 이런 구멍이 생기고, 내일은 또 다른 부분에 구멍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그 부분까지도 사랑이라면? 그 구멍이 우리 둘의 사랑에 독특함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라면?
- 86-87쪽

   대단한 깨달음을 주는 스승을 만나지 않아도, 위대한 책을 만나지 않아도, 때론 시간이 훌륭한 스승이 되곤 한다. 20대의 치기 어린 나에 대한 깨달음도, 그때의 치기 어린 나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말할 수 있는 용기도 결국 시간과 함께 온 것처럼. 
- 93쪽

   삼십 이전에는 고통과 격정에 완전히 자신을 맡겨야 한다.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그렇다! 털 뽑힌 호랑이가 되어야 한다. 안 그럴 경우, 맥없는 고양이일 뿐이다. 
- 루이제 린저, <삶의 한가운데>
- 105쪽

   학생의 세계에서 직장인의 세계로 옮겨간다는 건 단순히 돈을 버는 세계로 편입한 것이 아니었다. 그 돈이 허용하는 수많은 경험들의 세계로 동시에 입장하는 것이었다. 3천 원짜리 학교 앞 밥집에서 1만 2천 원짜리 파스타의 세계로, 천 원짜리 커피에서 5천 원짜리 아메리카노의 세계로 물 흐르듯 입장했다. 못 먹던 것을 먹기 시작했다.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 들리던 것이 들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내가 들어온 광고 분야는 그 모든 감각들의 최전선에 있는 세계였다. 알지 못했던 그 모든 감각들과 소개팅 하느라 나는 외로울 틈이 없었다. 매 순간 눈과 귀와 코와 입은 바빴다. 그중 특히 입이 바빴다. 
- 109쪽

   "몇 년을 노력했더니 이제 와인을 따면 와이프가 한 잔까지는 마셔. 든든한 노후 준비 하나를 마친 느낌이야." 선배의 말을 듣다가 무릎을 탁 쳤다. 술 한 잔이 노후 준비라니. 근사한 표현이었다. 정확한 표현이었다. 저녁에 마주앉아 술 한 잔을 같이 마시며 하루의 일을 두런두런 말하는 시간을 확보한 것이 노후 준비가 아니라면 무엇이 노후 준비겠는가. 
- 131쪽

   "광고가 제 인생에 훌륭한 수단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수단'이라는 말 앞에 선배의 표정이 일그러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다만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내 생각은 더 명확해졌다. 누군가에겐 일이 인생의 목적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일은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단이 되었으면 했다. 그것이 단순히 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이것을 훌륭한 수단으로 만드는 건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 149쪽



  1. BlogIcon wonjakga 2018.08.27 23:38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저도 읽었어요 :) 한 번 더 읽어보려구요. 저는 작가를 이 책으로 처음 만났는데 다른 책도 찾아봐야겠어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9.02 19:34 신고 BlogIcon GoldSoul

      아, 그렇구나.
      읽어보세요. 좋아요- :)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9.20 19:52 신고 BlogIcon wonjakga

      이번주에 김민철 작가의 강연이 있어서 갔었어요. 요즘 일에 치여사는지라 갈까말까 고민 많이 했는데 가길 잘했다 생각했답니다. 금령님 생각도 났어요 헤헷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9.21 08:18 신고 BlogIcon GoldSoul

      앗! 저도 갔었어요. 광화문 교보 맞죠?
      와와, 우리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네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9.21 08:24 신고 BlogIcon wonjakga

      대애박!! 완전!! 넘 신기해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9.21 13:16 신고 BlogIcon GoldSoul

      진짜요! 저는 살짝 늦었는데, 엄청 말 잘하셔서 놀랐어요.
      기록을 꾸준히 해야겠다 생각했고, 나를 자주 들여다 봐야겠다고도 생각했고, 왜? 라는 질문도 자주해야지 생각했더랬어요. ㅎㅎ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9.21 17:32 신고 BlogIcon wonjakga

      제가 그곳에서 금령님 생각이 났던 건 이미 일상의 기록을 근사하게 하고 계신 분이기에 :) 같은 곳에 있었다니 더 반갑네요. 연휴 잘 보내시구요 나중에 또 어디선가? 뵈어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9.21 18:43 신고 BlogIcon GoldSoul

      앗, 근사한이라니, 너무나 좋은 것! 헤헤
      현정씨도 추석 잘 보내요. 연휴 시작전 금요일 저녁,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아요. 으하하!
      우리 좋은 가을 보내보아요.
      그리고 또, 만나요! ㅎㅎ

  2. 2018.08.29 02:4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동상이몽>의 한고은 편을 챙겨 보고 있는데, 이번주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포장마차에서 골뱅이탕에 레몬소주를 마시며 더위 때문인지 취기 때문인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한고은이 말했다. 여보, 나랑 결혼해줘서 정말 고마워. 이 말을 세 번쯤 한 것 같다. 그날의 대화에 의하면 평소에도 남편에게 자주 했던 말이었다. 한고은은 여보가 없었으면, 이라고 말하더니 울컥해져서 술잔을 놓았다. 이를 본 남편이 한고은의 등을 토닥여줬고, 한고은은 울 것같은 표정으로 남편을 안았다. 그리고 말을 이어나갔다. 결혼하기 전에는 나한테 가장 쉬운 일은 죽는 거였어. 여보랑 결혼하고나서 가장 달라진 건 세상에서 죽는 게 제일 무서워. 한고은은 지난 날이 너무 힘들었고, 지금이 너무 행복해서 남편이 그동안 고생한 자기에게 수고했다며 준 선물같다고 했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서 이 행복을  누리고 싶다고 했다. 지금이 너무너무 행복해서 이 행복을 누가 앗아갈까봐 겁날 정도라고 했다. 처음 만날 때부터 남편은 한고은에게 자잘한 칭찬들을 계속 해주었단다. 그게 자존감이 낮았던 한고은이 자기자신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단다. 어쩌면 이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나는 진짜 괜찮은 사람인 지도 몰라. 그렇게 자존감이 쌓여가고, 자신도 남편처럼 칭찬을 많이 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단다. 한고은은 남편을 만나 삶의 소소한 즐거움을 알아간 것 같았다. 아침 6시에 일어나 출근준비를 하는 회사원의 삶, 매달 나오는 월급, 집-회사-집으로 이어지는 쉴틈없는 평일을 보낸 뒤 맞이하는 달콤한 불금과 주말, 함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먹고 술잔을 기울이는 즐거움. 그래서 비록 살은 쪘지만 더 행복해졌다고 말했다. 


   <우리, 아이 없이 살자>. 이 책도 나는 자존감의 이야기로 읽었다. 남자와 여자는 같은 호텔에서 근무를 했고, 연애를 하다 결혼했다. 아이를 가지고 싶었지만,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무척 다른 사람이었고, 완벽한 하나가 되고 싶었던 여자는 그렇게 되지 않아 힘들었다. 몸에 이상이 왔고, 마음에도 이상이 왔다. 점점 더 예민해져갔다. 결국 아이는 생기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이혼 밖에 없을 것 같은 시간이 이어지고, 남자는 결심을 했다. 우리, 1년동안 세계여행을 가자. 남자는 회사를 그만 두겠다고 했고, 여자가 운영 중인 게스트하우스도 타인에게 넘기자고 했다. 남자의 결심에 여자는 쉽게 동조할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상태 그대로 살아가는 것도 힘들다고 생각했다. 결국 두 사람은 1년동안 여행을 떠난다. 남자에게는 세계여행의 꿈이 있었다. 여자는 비행공포증이 있었고, 생리통도 심했고, 장 트러블도 있었다. 여행 초반 여자는 모든 상황이 무섭고, 싫고, 불평스러웠고, 서러웠다. 그래서 눈 앞의 것들을 잘 즐기지 못했다. 그러다 여행 기간이 길어지고, 적응이 되면서, 비로소 받아들이게 된다. 눈 앞의 광경들을, 다시 못 할 이 시간 경험들을, 나와 다른 남편을. 여행지나 여행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여행을 하는 여자의 마음을 깊게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었다. 피폐했던 마음이 어떻게 회복되어 갔는지, 어떤 상황들을 겪어나가며 둘이 단단해졌는지, 아이가 꼭 있어야 완벽한 가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여자가 아이 없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게 되기까지. 결국 자존감을 높이는 건 좋은 사람이 곁에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그런 준비가 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걸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나저나 남미는 정말 축복인가 보다. 이 책의 저자도 남미의 자연을 보면서 가장 많은 위안을 받았다.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다. 


   30번이 넘도록 비행기를 탔지만 그때마다 너무 힘들었다. 힘들 필요가 없는 일인데, 무언가에 사로잡혀 두려워하는 내 모습이 한심하고 안쓰러웠다. 그러나 여행을 하고 한 가지 깨달은 게 있다. 불안장애를 가진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분명 힘들었던 시간이 헛되지 않으리란 믿음은 있었다. 그 믿음은 나로 하여금 극도의 무서움을 이겨내고 다시 도전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 세상에 100퍼센트 나쁜 일은 없다. 시련은 인간을 성숙시키기 때문이다. 시련의 늪에 빠져 있을 때는 그 시간이 힘들기만 하고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 과정이 내 인생에 얼마나 필요한 것이었고, 나를 성장시켰는지 깨달았다. 

    이제는 힘든 일이 있어도 크게 좌절하거나 감정이 바닥을 칠만큼 심하게 우울해하지는 않는다. 또 하나를 배우고 성장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 68-69쪽


   우리 부부는 더욱 외로움과 친해져야 할 의무가 있다. 나이 들어 찾아올 자식이 없는 우리는 노년에 남들보다 더 외로워할 지도 모른다. 게다가 언젠가는 둘 중 한 명은 혼자 남을 것이다. 그때를 잘 이겨낼 수 있도록 외로움과 친해져야 한다. 

- 191쪽


  10여 년의 치열한 전투와 상처, 1년간의 여행,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통해 그는 잘못한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 또한 못난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다름을 받아들이는 게 서투를 뿐이었고, 어디서도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스스로 깨우치며 배우고 있었다. 10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결코 헛되지 않았다. 아픈 만큼 성숙해졌다. 내가 편안해지니 그가 편안해 보였다. 그를 배려하려고 노력하니 그가 알아주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니 상대방이 보였다.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 206쪽




  1. 하진 2018.08.31 01:47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언니. 한고은 남편 너무 괜찮지? 티비로밖에 볼수 없지만 너무 괜찮았어..



    책을 살 생각은 없었는데, 동생이 출근길에 이 책의 첫 글인 '눈물병'이 실린 페이지를 보내줬다. 서른 여섯살 여동생이 결혼을 했다. 가족 모두 울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경미 감독 혼자서만 울었단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여동생네와 식사를 하고 동생네는 돌아가고 엄마와 함께 뒷산을 실렁실렁 올랐던 시간에 대해 쓴 글이다. 감독은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 정말 다 짝이 있을까?" 그리고 말한다. "내 짝은 왔다가 갔어, 이미." (그런데 책을 끝까지 읽으면 이 말은 당연하게도 사실이 아니다. 흐흐-) 그리고 이 구절이 있다. "사랑을 잃었다고 무너지면, 나는 끝난다. 나한테는 나밖에 없다. 매일 매시간 매초, 나를 때리며 악으로 버텨왔는데, 창피한 줄 모르고 아무 때나 울음을 터뜨렸다. 그래도 그렇게 매번 눈물을 흘리고 나면 마음은 편해졌다. 숨 쉴 수 있어서 좋았다. 그냥 내가 마흔을 목전에 둔 서른아홉 가을에 그랬었다는 이야기." 시큰해지더라. 다른 글들도 궁금해졌다.


   두 편의 장편영화를 만드는 동안, 아니 그 전, 그 후, 감독의 일상과 생각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읽으면서 내가 좀더 묵직한 걸 기대했었나 생각이 들었다. 술술 읽힌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변 사람이 아빠와 엄마, 그리고 결국 남편이 된 백인 필수씨인데, 다들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엄마의 문자를 따로 모아놓은 페이지들이 있는데, 킥킥대면서 읽다가 마음이 짠해졌다. 직설적이고, 외모와 건강에 대해서 잔소리하고,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경고 문자를 주의하라고 꼭 전달하는 걸 보면 꼭 우리 엄마 같기도 하고. "어두운 망망대해 위에 혼자 남은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 때, 엄마의 문자는 그날 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빛이었다." 책은 여동생의 결혼으로 시작해 감독 본인의 결혼으로 끝난다. 초반에 혼자 지낸 힘든 시기들이 많이 적혀 있어서 그런가, 동반자를 찾은 (무려 13살 아래!) 이야기로 끝나니까 해피엔딩인 것만 같다. 이 책이. 한밤중에 마지막 장을 넘겼는데, 뭔가 긍정의 기운이 마구 솟아나는 느낌이랄까. 긍정적인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 아닌데,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참 신기했다. 이상한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

나는 나를 믿는 일이 제일 어렵다.


어쨌든,

아주 조금씩 가고 있다. 

2010.04.04


- 254쪽




  1. BlogIcon wonjakga 2018.08.27 23:39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아, 이것도 읽었는데. 헤헷 두 권이나 겹쳤네요 :)

말복

from 모퉁이다방 2018.08.16 21:19




   세상에나. 퇴근길, 지하철역에서 올라왔는데 바람이 분다. 큰 바람이 분다. 시원한 바람이 분다. 세상에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올 여름이 가고 있다. 절기라는 것이 어쩜 이리 신기한지. 말복에 시원한 바람이 분다. 올 여름 우리들 무척이나 수고했다며 바람을 보내주셨네. 집에 와 동생이 틀어놓은 에어컨을 껐다. 여름내 꽁꽁 닫아두었던 창문을 활짝 열고, 맞바람이 불 수 있게 현관문도 걸개를 채우고 열었다. 세상에, 바람이 분다. 


   지난 주였나. 지지난 주였나. 오늘보다 덜했지만 바람이 분 날이 있었다. 그날 연신내로 콩물을 사러 갔었다. 바람이 불어 걷기도 할 겸 간 거였는데, 그날따라 두꺼운 청바지를 입었고 조금 걷다 보니 땀이 주르륵 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간간이 바람이 불어주었고, 해가 지기 시작하는 하늘이 무척 예뻐서 시장에서 콩물과 두부를 사고 응암역까지 지하철 두 정거장을 땀을 흘리며 걸었다. 요즘은 음악을 통 듣지 않고 있는데, 간만에 음악도 들었다.


   그 전 주에 메시지를 받았는데, 내가 좋아할 만한 음악을 우연히 라디오를 듣다 발견했다는 거였다. 차 안에서 늘 걸그룹 음악만 듣는 사람인데, 이유는 신이 나서. 우울한 노래는 듣기 싫고, 경쾌하고 즐거운 노래가 좋다고 했다. 그래야 졸리지도 않고, 힘도 나고. 차에 타면 늘 함께 걸그룹 음악을 연이어 들었다. 그 중에 '해피'라는 단어가 반복되는 팝도 있었는데, 엄청 신나게 불러대더니 말했다. 이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랗고 조그만 아이들이 행복한 보금자리를 향해 우르르 이동을 하는 장면이 생각나서 막 행복해진다고. 영화 <미니언즈> 이야기란다. 


   라디오를 듣다 발견한 노래는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 내가 지난 몇년동안 수도 없이 들었던 노래. 결국 최백호의 공연까지 다녀오게 한 곡. 한번도 가본 적 없고, 겪은 적 없는 어떤 장면과 마음이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곡. 그 메시지는 핸드폰의 오른쪽과 아랫쪽 버튼을 눌러 저장해뒀다. 신기했다. 영화고 노래고 접점이 없는 우리가 조금씩 서로의 취향을 이해해 가고 있다는 게. 아, 바람이 이리도 시원하게 분다. 이제 땀 흘리지 않고 걸을 수 있겠다.



 

  1. BlogIcon wonjakga 2018.08.17 02:51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오늘 하늘이 이리 이뻤나요? 놓친 하늘을 여기서 보네요! 고마워요 :)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8.17 18:51 신고 BlogIcon GoldSoul

      앗! 이 하늘은 땀을 뻘뻘 흘리고 콩물 사왔던 날의 하늘이에요. 엄청 예뻤어요. 헤헤- 어제 하늘도 분명 이뻤을 거예요! 그리 고운 바람님이 와주셨으니. :-)

  2. 2018.08.17 10:0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8.17 17:35 신고 BlogIcon GoldSoul

      저도 완전 좋아하는 노래예요!
      지금의 실연으로 너무나 힘든데, 그래도 다시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의 곡-
      오늘 저녁에도 바람이 불어준다면, 간만에 들어봐야겠어요. 바람이 분다~
      쓸쓸해지지 마세요! 우리가 지난 한여름, 얼마나 원했던 바람인가요! :-)
      흑흑- 올 여름은 정말이지 더웠어요. 바람이 분다~

  3. 2018.08.22 00:1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8.22 22:22 신고 BlogIcon GoldSoul

      언니, 축하해요! 출퇴근은 괴롭지만, 행복한 일이기도 하니까.
      월급을 생각해보아요. 때론 그것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아니, 자주. 흑-
      민결이 떼어놓고 나오는 길이 힘들겠어요. ㅠ.ㅠ
      언니, 언니에게 출근 축하 기념 치맥 1회권이 생겼어요. 헤헤-
      행복할 때나 쓸쓸할 때 언제든 사용해주어요. :)



   <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을 읽고 한수희 작가의 책은 챙겨 읽어야지 다짐했었다. 그녀의 글에는 시원시원한 면이 있었다. 솔직했고. 이번에 교토 여행 책이 출간되었다기에 바로 주문을 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제목을 잘 지었다는 걸 알겠더라.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 여행지가 사람의 기운을 달리 만드는 걸까. 그녀의 말대로 나이가 들어서 이전의 여행과는 달라진 걸까. 차분하고 고요하다. 30대가 된 후 작가는 해마다 교토를 찾는다고 한다. 교토를 위해 한달에 얼마씩 저축을 하고, 예정했던 돈이 다 모이면 1년 동안 고생한 나를 위한 여행을 떠난다고. 교토로. 


   책은 교토라는 장소보다 교토를 거니는 작가 자신에 집중한다. 두 아이를 키우는 고단함에 대해, 카페를 열었다 접을 수 밖에 없었던 사연에 대해, 밥벌이의 어려움에 대해, 글쓰기의 즐거움에 대해, 지금 살고 있는 동네의 호적함에 대해, 치열했던 젊은 날에 대해, 일본에서 한때 힘들게 살아갔던 친구에 대해, 함께 교토를 여행하는 엄마에 대해. 아, 더 추가해야 겠다. 이번 책은 이전의 글보다 차분하고, 고요하고, 편안하다. 그리고 다음 구절을 읽고 솔직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사람도, 글도 솔직한 것이 좋다. 그래야 믿을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다. 사람에게도, 글에게도. 


  "사람들은 글을 쓸 때 좋은 것에 대해서, 아름다운 일들에 대해서, 자랑할 만한 경험들에 대해서만 쓰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사실 인생의 여기저기에 널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때로는 웅덩이에 몸이 흠뻑 젖도록 빠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주의 유일한 실수투성이 피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이 우리를 힘내어 살아가게 한다. " 

- 22쪽


   교토의 이야기는 내가 기대했던 한수희 작가의 시원시원한 글은 아니었지만, 이런 구절들을 읽으면서 그녀를 더 신뢰하게 되었다. 다음 책도 기다릴 것이고, 읽을 것이다. 그녀는 좋겠다. 든든한 독자 한 명이 생겼으니. 흐흐- 



  예전의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매년 교토라는 도시에 가고 그럴 때는 누군가와 함께이다. 친구, 엄마, 남편. 나는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거의 매일 나는 나 자신과 싸운다. 놀고 싶은 나와 싸운다. 앞날이 캄캄한 나와 싸운다. 멍청한 나와 싸우고, 거짓말을 하려는 나와 싸우고, 모르는 체하려는 나와 싸우고, 근사한체하려는 나와 싸운다. 내가 지긋지긋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또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사람이 되고 싶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인상을 쓰고 싶지 않다.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싶지도 않다. 진지한 이야기도 지겹다. 

   마음이 잘 맞는 친구와, 굳이 괜찮은 인간처럼 보이지 않아도 좋을 친구와 함께 걸으면서 수다나 떨고 싶다. 수다 떨기도 지겨워지면 각자의 시간을 좀 보내도 좋겠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그냥 멍청하게 공상에 빠져 있거나, 그래도 좋을 정도로, 그래도 서로를 불안해지게 하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와 함께 여행을 하고 싶다. 그런 친구와 함께 타국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즐거운 일을 함께 겪고 기분 나쁜 일도 함께 겪고 말할 수 없이 사치스러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 이런 여행에서 종종 나타나곤 하는 완벽한 순간에 고개를 돌려 "정말 좋다, 그렇지?"라고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교토는 바로 그런 순간에 적당한 도시인 것 같다. 

- 12-13쪽


   그런 내가 이제 마흔이 되어버렸다. 누가 "저는 40이 가까운 나이에..." 라는 식으로 말할 때마다 '아아, 저 사람 나이 들었구나' 라고 생각하다가 내가 마흔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깜짝 놀라는 일의 연속이다. 아이들은 종종 나를 놀린다. "엄만 늙었어!" 그게 놀릴 거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데 아마 나도 어릴 적에 그랬겠지. 직접 당해보니 나이 먹는 건 해가 바뀌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감정과는 무관하다. 그러다 나는 문득 내가 어린 시절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책 나이가 들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37쪽


   자전거를 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 잡기이다.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 아빠가 뒤에서 나를 밀어주었는데, 어느 순간 등 뒤가 휑한 느낌이 들었다. 무섭고도 짜릿한 느낌이었다. 돌아보니 아빠가 자전거를 잡은 손을 놓고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아빠의 얼굴은 재미있는 것 같기도 했고 뿌듯한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나는 돌아보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한 단계를 통과했다는 것을. 자랐다는 것을. 

- 76-77쪽


   그런데 내가 살아가면서 배운 일은 오직 기다림에 관한 것이다. 예전에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잘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원하는 것은 빠르게 손 안에 들어와야 했다. 되고 싶은 것은 빨리 되어야 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일을 할 때는 열정과 재능 외에도 시간의 힘을 믿는 배짱이 필요한 법이다. 하루아침에 쓸 수 있는 책도,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영화도, 하루아침에 짓는 건물도, 하루아침에 성공하는 가게도, 하루아침에 익힐 수 있는 기술도 없다. 몇 번은 운이 좋아 빠르게 이룰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운이 다했을 때는 결국 시간이 이긴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시간과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 삶은 불행해진다는 걸 잘 알기에 나는 의도적으로 내 시간을 늘리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생활의 여기저기에 끼워 넣는다. 느리고 비효율적인 일들을. 천천히 산책하기. 천천히 달리기. 커피를 볶기. 빵을 굽기. 식물을 기르기. 차를 마시기. 수건을 삶기. 텃밭에 농사를 짓기. 책을 읽기. 지하철을 타기. 적금을 붓기. 1년에 한 번 교토로 여행을 가기. 

- 105-106쪽


   내가 <I Love Paris>라는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도 코언 형제나 알렉산더 페인이나 알폰소 쿠아론의 단편들이다. 이 이야기들은 파리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해 그대로 끝난다. 다분히 냉소적인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는 마음이 따뜻해지거나 슬퍼지는 것들이 숨어 있다. 코언 형제는 파리의 한 역에서 이상한 커플을 만나는 미국인 관광객을, 알렉산더 페인은 짧은 일정으로 파리 여행을 온 외로운 중년 아주머니를, 알폰소 쿠아론은 아침마다 자기 아이를 공동 탁아소에 맡기고 부잣집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하러 다니는 이민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들에게는 각자 자신만의 파리가 있고, 감독들은 그들의 눈과 마음을 통과한 도시 파리를 그린다. 나는 이 감독들의 냉소적인 정직함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정직할 때 비로소 사람은 냉소적일 자격을 얻는 게 아닐까. 

- 147쪽


   꼭 장사가 아니더라도, 어떤 일을 하건 그 일은 처음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초라할 것이다. 가끔은, 아니 꽤 자주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을 느낄 것이고, 아무리 해도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들을 견뎌내야 한다. 아니,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그런 일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179-180쪽


   그런데 여행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며칠이 지난 후 다시 내 나라로 돌아왔을 때 나에게 기대하지 못했던 선물을 준다. 이를테면 그곳에서 배워온 사소하고 즐거운 습관과 그곳에서 본 풍경들이, 내 여행 가방 속에 몰래 숨어든 작은 벌레처럼 나를 따라오는 것이다. 

   광저우에서는 차를 마시는 습관이 나를 따라왔다. (...) 피피 섬에서는 빈둥대는 법이 나를 따라왔다. (...) 인도에서 나는 맛있는 짜이가 어떤 것인지를 알았다. (...) 파리에서는 아침을 맛있는 크루아상이나 뺑 오 쇼콜라와 진한 커피 한 잔으로 시작하는 습관이 쫓아왔다. 

- 218-220쪽


    이제 나는 무거운 배낭 같은 건 매지도 않고 미지의 땅으로 떠나지도 않는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지금의 내가 원하는 것은 그때와는 조금 다른 것들이다. 나는 나이가 들었다. 더 이상 나 자신이 그렇게 궁금하거나 내 가능성들이 절박하지 않다. 이제 나는 그저 아름다운 오래된 것들 속에서 시간의 연장선상에 있는 나 자신을 느끼며 편안히 지내다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 좋은 세상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 

   교토에 다녀온 나를 늘 바란다. 내가 걷는 골목이 아름답기를, 집집마다 자신이 사는 장소에 대한 애착이 묻어나기를, 자신뿐만 아니라 이 골목을 걷는 이웃의 마음도 한 번쯤 생각해주기를, 무슨 일을 하건 남이 시키거나 내가 이것밖에 안 되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나의 일이라는 자부심으로 충만하기를, 그럴 수 있기 위해서 이 사회가 먼저 달라지기를, 내 아이가 자라서 배관공이나 그 외의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노동자가 되었을 때 그 아이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면서 건강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그리고 이런 세상을 꿈꿀 수 있는 힘을 나는 교토라는 도시에서 가져오는 것 같다. 

- 228-229쪽


-


   덧, 다 읽은 책은 중고서점에 팔고 있는데, 이 책은 읽다 물을 흘러버려서 팔 수가 없게 되었어요. 자국이 있지만 깨끗합니다. 좋은 책이었으니, 나눌 수 있음 좋겠어요. 읽고 싶으신 분께 보내 드릴게요. 주소와 전화번호 남겨주세요. 저와 소통하셨던 분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읽었던 오키로북스의 <제가 이 여자와 결혼을 한 번 해봤는데요>도 읽고 싶으신 분 있으면 남겨주세요. 짧고 재미납니다요.




  1. 2018.08.17 09:1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8.17 17:31 신고 BlogIcon GoldSoul

      넵, 보내드릴게요!
      나이 많은 아줌마라니요. 제가 근 5년간 배운 건 나이에 상관없이 다정한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누구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반갑습니다! 헤헤 :-)
      딱이에요. 이 책이 차분한 교토 여행기예요. 읽으시면 어땠는지 얘기해주세요.

  2. 은단 2018.08.17 22:14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그렇게 말씀해주니 감사합니다^^
    금령씨 글을 읽게 된 계기가 도쿄 여행기였을 거에요. 그리고 책 읽고 쓴 글들도 좋아서 잘 보고 있어요. 덕분에 '여름은 오래 그 곳에 남아'도 사서 잘 읽었죠~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8.21 20:52 신고 BlogIcon GoldSoul

      그 소설 너무 좋죠? 아, 정말 그 소설의 배경처럼 깊은 숲속에 있는 별장에서 한달 지내면 어땠을까 상상하게 되는 그런 무더운 여름이었어요! 저는 쌀쌀해지는 걸 좋아하는데, 그런 날이 점점 다가오는 것 같아 좋아요. 책은 조금 천천히 보내드릴게요. 기다려주세요. :-)

  3. 은단 2018.09.18 14:07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금령씨, 책 잘 받아서 읽었습니다.
    늦지 않았어요. 제가 한달에 한번 중국에서 한국으로 다니는데 딱 있을 때 받았습니다.
    책만으로도 감사한데 마음 담은 글과 차까지 보내주시고...
    책 참 좋았습니다. 교토를 가봐야지 하면서 책만 읽고 있는데, 아무래도 가긴 할 것 같네요^^
    올려두신 '잘돼가~'나 '괜찮아지는 중입니다'도 교보에 가서 다 읽고 왔죠.
    좋은 책 소개 감사해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9.18 21:49 신고 BlogIcon GoldSoul

      와, 벌써요? 두 권도 서점에서 읽으시다니.
      세 권 모두 책장이 잘 넘어가는 책이긴 하지만, 책 빨리 읽으시는구나! :)
      저도 교토는 진짜 짧게 다녀와서, 언젠가 길게 가보고 싶어요. 단풍이 질 때 무척 이쁘다던데.
      다행이에요! 잘 받으셔서요. 중국에서 한국으로 한달에 한번씩 다니시는 일이 무얼까 궁금하지만, 언젠가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아요.
      요즘 아침저녁으로 쌀쌀한데, 감기 조심하셔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