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는 참 이상한 일>을 읽고 한수희 작가의 책은 챙겨 읽어야지 다짐했었다. 그녀의 글에는 시원시원한 면이 있었다. 솔직했고. 이번에 교토 여행 책이 출간되었다기에 바로 주문을 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제목을 잘 지었다는 걸 알겠더라. <아주 어른스러운 산책>. 여행지가 사람의 기운을 달리 만드는 걸까. 그녀의 말대로 나이가 들어서 이전의 여행과는 달라진 걸까. 차분하고 고요하다. 30대가 된 후 작가는 해마다 교토를 찾는다고 한다. 교토를 위해 한달에 얼마씩 저축을 하고, 예정했던 돈이 다 모이면 1년 동안 고생한 나를 위한 여행을 떠난다고. 교토로. 


   책은 교토라는 장소보다 교토를 거니는 작가 자신에 집중한다. 두 아이를 키우는 고단함에 대해, 카페를 열었다 접을 수 밖에 없었던 사연에 대해, 밥벌이의 어려움에 대해, 글쓰기의 즐거움에 대해, 지금 살고 있는 동네의 호적함에 대해, 치열했던 젊은 날에 대해, 일본에서 한때 힘들게 살아갔던 친구에 대해, 함께 교토를 여행하는 엄마에 대해. 아, 더 추가해야 겠다. 이번 책은 이전의 글보다 차분하고, 고요하고, 편안하다. 그리고 다음 구절을 읽고 솔직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나는 사람도, 글도 솔직한 것이 좋다. 그래야 믿을 수 있고, 위로받을 수 있다. 사람에게도, 글에게도. 




  "사람들은 글을 쓸 때 좋은 것에 대해서, 아름다운 일들에 대해서, 자랑할 만한 경험들에 대해서만 쓰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를 위로하는 것은 사실 인생의 여기저기에 널린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거나 때로는 웅덩이에 몸이 흠뻑 젖도록 빠진 일들에 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우주의 유일한 실수투성이 피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들이 우리를 힘내어 살아가게 한다. " 

- 22쪽


   교토의 이야기는 내가 기대했던 한수희 작가의 시원시원한 글은 아니었지만, 이런 구절들을 읽으면서 그녀를 더 신뢰하게 되었다. 다음 책도 기다릴 것이고, 읽을 것이다. 그녀는 좋겠다. 든든한 독자 한 명이 생겼으니. 흐흐- 



  예전의 나는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매년 교토라는 도시에 가고 그럴 때는 누군가와 함께이다. 친구, 엄마, 남편. 나는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거의 매일 나는 나 자신과 싸운다. 놀고 싶은 나와 싸운다. 앞날이 캄캄한 나와 싸운다. 멍청한 나와 싸우고, 거짓말을 하려는 나와 싸우고, 모르는 체하려는 나와 싸우고, 근사한체하려는 나와 싸운다. 내가 지긋지긋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그래서 나는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고 또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사람이 되고 싶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인상을 쓰고 싶지 않다.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싶지도 않다. 진지한 이야기도 지겹다. 

   마음이 잘 맞는 친구와, 굳이 괜찮은 인간처럼 보이지 않아도 좋을 친구와 함께 걸으면서 수다나 떨고 싶다. 수다 떨기도 지겨워지면 각자의 시간을 좀 보내도 좋겠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그냥 멍청하게 공상에 빠져 있거나, 그래도 좋을 정도로, 그래도 서로를 불안해지게 하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친구와 함께 여행을 하고 싶다. 그런 친구와 함께 타국에서 서로를 의지하고 즐거운 일을 함께 겪고 기분 나쁜 일도 함께 겪고 말할 수 없이 사치스러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다. 이런 여행에서 종종 나타나곤 하는 완벽한 순간에 고개를 돌려 "정말 좋다, 그렇지?"라고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교토는 바로 그런 순간에 적당한 도시인 것 같다. 

- 12-13쪽


   그런 내가 이제 마흔이 되어버렸다. 누가 "저는 40이 가까운 나이에..." 라는 식으로 말할 때마다 '아아, 저 사람 나이 들었구나' 라고 생각하다가 내가 마흔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깜짝 놀라는 일의 연속이다. 아이들은 종종 나를 놀린다. "엄만 늙었어!" 그게 놀릴 거리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상한데 아마 나도 어릴 적에 그랬겠지. 직접 당해보니 나이 먹는 건 해가 바뀌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감정과는 무관하다. 그러다 나는 문득 내가 어린 시절의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책 나이가 들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37쪽


   자전거를 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균형 잡기이다.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 아빠가 뒤에서 나를 밀어주었는데, 어느 순간 등 뒤가 휑한 느낌이 들었다. 무섭고도 짜릿한 느낌이었다. 돌아보니 아빠가 자전거를 잡은 손을 놓고 저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아빠의 얼굴은 재미있는 것 같기도 했고 뿌듯한 것 같기도 했다. 사실 나는 돌아보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한 단계를 통과했다는 것을. 자랐다는 것을. 

- 76-77쪽


   그런데 내가 살아가면서 배운 일은 오직 기다림에 관한 것이다. 예전에는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잘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원하는 것은 빠르게 손 안에 들어와야 했다. 되고 싶은 것은 빨리 되어야 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떤 일을 할 때는 열정과 재능 외에도 시간의 힘을 믿는 배짱이 필요한 법이다. 하루아침에 쓸 수 있는 책도, 하루아침에 만들 수 있는 영화도, 하루아침에 짓는 건물도, 하루아침에 성공하는 가게도, 하루아침에 익힐 수 있는 기술도 없다. 몇 번은 운이 좋아 빠르게 이룰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운이 다했을 때는 결국 시간이 이긴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시간과 사이좋게 지내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 삶은 불행해진다는 걸 잘 알기에 나는 의도적으로 내 시간을 늘리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생활의 여기저기에 끼워 넣는다. 느리고 비효율적인 일들을. 천천히 산책하기. 천천히 달리기. 커피를 볶기. 빵을 굽기. 식물을 기르기. 차를 마시기. 수건을 삶기. 텃밭에 농사를 짓기. 책을 읽기. 지하철을 타기. 적금을 붓기. 1년에 한 번 교토로 여행을 가기. 

- 105-106쪽


   내가 <I Love Paris>라는 영화에서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도 코언 형제나 알렉산더 페인이나 알폰소 쿠아론의 단편들이다. 이 이야기들은 파리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전제에서 시작해 그대로 끝난다. 다분히 냉소적인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는 마음이 따뜻해지거나 슬퍼지는 것들이 숨어 있다. 코언 형제는 파리의 한 역에서 이상한 커플을 만나는 미국인 관광객을, 알렉산더 페인은 짧은 일정으로 파리 여행을 온 외로운 중년 아주머니를, 알폰소 쿠아론은 아침마다 자기 아이를 공동 탁아소에 맡기고 부잣집 아이를 돌보는 일을 하러 다니는 이민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들에게는 각자 자신만의 파리가 있고, 감독들은 그들의 눈과 마음을 통과한 도시 파리를 그린다. 나는 이 감독들의 냉소적인 정직함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정직할 때 비로소 사람은 냉소적일 자격을 얻는 게 아닐까. 

- 147쪽


   꼭 장사가 아니더라도, 어떤 일을 하건 그 일은 처음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초라할 것이다. 가끔은, 아니 꽤 자주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을 느낄 것이고, 아무리 해도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들을 견뎌내야 한다. 아니,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그런 일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179-180쪽


   그런데 여행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며칠이 지난 후 다시 내 나라로 돌아왔을 때 나에게 기대하지 못했던 선물을 준다. 이를테면 그곳에서 배워온 사소하고 즐거운 습관과 그곳에서 본 풍경들이, 내 여행 가방 속에 몰래 숨어든 작은 벌레처럼 나를 따라오는 것이다. 

   광저우에서는 차를 마시는 습관이 나를 따라왔다. (...) 피피 섬에서는 빈둥대는 법이 나를 따라왔다. (...) 인도에서 나는 맛있는 짜이가 어떤 것인지를 알았다. (...) 파리에서는 아침을 맛있는 크루아상이나 뺑 오 쇼콜라와 진한 커피 한 잔으로 시작하는 습관이 쫓아왔다. 

- 218-220쪽


    이제 나는 무거운 배낭 같은 건 매지도 않고 미지의 땅으로 떠나지도 않는 재미없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지금의 내가 원하는 것은 그때와는 조금 다른 것들이다. 나는 나이가 들었다. 더 이상 나 자신이 그렇게 궁금하거나 내 가능성들이 절박하지 않다. 이제 나는 그저 아름다운 오래된 것들 속에서 시간의 연장선상에 있는 나 자신을 느끼며 편안히 지내다 조용히 사라지고 싶다. 좋은 세상에서, 좋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다. 

   교토에 다녀온 나를 늘 바란다. 내가 걷는 골목이 아름답기를, 집집마다 자신이 사는 장소에 대한 애착이 묻어나기를, 자신뿐만 아니라 이 골목을 걷는 이웃의 마음도 한 번쯤 생각해주기를, 무슨 일을 하건 남이 시키거나 내가 이것밖에 안 되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나의 일이라는 자부심으로 충만하기를, 그럴 수 있기 위해서 이 사회가 먼저 달라지기를, 내 아이가 자라서 배관공이나 그 외의 없어서는 안 되는 일을 하는 노동자가 되었을 때 그 아이가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잃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면서 건강히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그리고 이런 세상을 꿈꿀 수 있는 힘을 나는 교토라는 도시에서 가져오는 것 같다. 

- 228-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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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덧, 다 읽은 책은 중고서점에 팔고 있는데, 이 책은 읽다 물을 흘러버려서 팔 수가 없게 되었어요. 자국이 있지만 깨끗합니다. 좋은 책이었으니, 나눌 수 있음 좋겠어요. 읽고 싶으신 분께 보내 드릴게요. 주소와 전화번호 남겨주세요. 저와 소통하셨던 분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읽었던 오키로북스의 <제가 이 여자와 결혼을 한 번 해봤는데요>도 읽고 싶으신 분 있으면 남겨주세요. 짧고 재미납니다요.




  1. 2018.08.17 09:1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비밀댓글입니다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8.17 17:31 신고 BlogIcon GoldSoul

      넵, 보내드릴게요!
      나이 많은 아줌마라니요. 제가 근 5년간 배운 건 나이에 상관없이 다정한 마음만 가지고 있다면 누구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반갑습니다! 헤헤 :-)
      딱이에요. 이 책이 차분한 교토 여행기예요. 읽으시면 어땠는지 얘기해주세요.

  2. 은단 2018.08.17 22:14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그렇게 말씀해주니 감사합니다^^
    금령씨 글을 읽게 된 계기가 도쿄 여행기였을 거에요. 그리고 책 읽고 쓴 글들도 좋아서 잘 보고 있어요. 덕분에 '여름은 오래 그 곳에 남아'도 사서 잘 읽었죠~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8.21 20:52 신고 BlogIcon GoldSoul

      그 소설 너무 좋죠? 아, 정말 그 소설의 배경처럼 깊은 숲속에 있는 별장에서 한달 지내면 어땠을까 상상하게 되는 그런 무더운 여름이었어요! 저는 쌀쌀해지는 걸 좋아하는데, 그런 날이 점점 다가오는 것 같아 좋아요. 책은 조금 천천히 보내드릴게요. 기다려주세요. :-)

  3. 은단 2018.09.18 14:07 신고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금령씨, 책 잘 받아서 읽었습니다.
    늦지 않았어요. 제가 한달에 한번 중국에서 한국으로 다니는데 딱 있을 때 받았습니다.
    책만으로도 감사한데 마음 담은 글과 차까지 보내주시고...
    책 참 좋았습니다. 교토를 가봐야지 하면서 책만 읽고 있는데, 아무래도 가긴 할 것 같네요^^
    올려두신 '잘돼가~'나 '괜찮아지는 중입니다'도 교보에 가서 다 읽고 왔죠.
    좋은 책 소개 감사해요~

    •  address  modify / delete 2018.09.18 21:49 신고 BlogIcon GoldSoul

      와, 벌써요? 두 권도 서점에서 읽으시다니.
      세 권 모두 책장이 잘 넘어가는 책이긴 하지만, 책 빨리 읽으시는구나! :)
      저도 교토는 진짜 짧게 다녀와서, 언젠가 길게 가보고 싶어요. 단풍이 질 때 무척 이쁘다던데.
      다행이에요! 잘 받으셔서요. 중국에서 한국으로 한달에 한번씩 다니시는 일이 무얼까 궁금하지만, 언젠가 알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보아요.
      요즘 아침저녁으로 쌀쌀한데, 감기 조심하셔요.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