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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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 H에게극장에가다 2014. 5. 31. 16:20
반성한다. 나는 너의 그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지었었다. 그건 곧 끝나버릴 거라고, 너는 지금 그것에 미쳐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거라고 단정했었다. 달콤함은 곧 끝날 것이고, 현실이 코앞에 다가오면 너도 너의 지금 그 사랑이 힘겨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내가 옳다고 생각했다. 니가 틀렸다고 자만했었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극장 시간표를 보다 마침 시간이 딱 맞아 달려가서 본 이 영화를 볼 때도 그랬다. 그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무형의 컴퓨터와 하는 사랑. 영화는 달콤했지만, 나는 그 달콤함에 취해 곧 끝나버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끝을 기다렸다. 영화의 결말 부분, 내가 예상한 대로 사랑의 끝이 왔다. 사랑도 끝났고, 영화도 끝났다. 나는 내가 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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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고성여행을가다 2014. 5. 19. 22:18
연휴 때는 집에 내려가 있었다. 나는 집에 내려간다고 해서 편한 사람이 아닌데, 이번에는 이상하게 편안했다. 연휴 동안의 일기에 이런 문장이 있다. '꽉 찬, 밤이었다.' 첫 날에는 남산에 올라가 연등을 보았고, 둘째 날 일요일에는 통영에 다녀왔다. 셋째 날에는 오래된 무덤 사이를 걸었다. 6일의 일기는 이렇다. 토요일. 일요일. 월요일. 삼일 밤을 똑같은 침대 위에서 잤다. 때로는 둘이서, 때로는 혼자. 아빠가 아래 있기도 했고, 엄마와 아빠가 함께 있기도 했다. 아침에는 자명종 소리 대신, 엄마가 부엌에서 만들어내는 소리와 바깥의 새소리에 잠이 깼다. 빨간색의, 귤색의 이불을 덮고 잤다. 연휴 첫날이라 엄청 막혔다. 낮에 탔는데, 해질 무렵에 도착했다. 고성은 별 볼 일 없는 곳이다. 그리고 많이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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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지리산여행을가다 2014. 5. 17. 11:29
집으로 돌아와 지리산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꺼내 보는데, 왼쪽 아래 부분들이 뭔가 이상하다. 렌즈를 잘 닦고 찍었어야 했는데, 볕이 좋아서 렌즈가 뿌연지도 몰랐다. 4월에는 엄마와 지리산에 다녀왔다. 회식 자리에서 누군가 올해 가장 좋았던 일이요, 라고 물었는데, 곰곰이 생각하다 엄마와 함께 있었던 지리산의 주말이라고 말했다. 엄마랑 단둘이 여행을 간 건 처음이라고. 그게 뭐가 특별하게 좋은 일인가요, 라고 이야기하신 분이 잠시 후 말했다. 그러고보니 엄마랑 단둘이 여행 가본 적이 없다고. 정말 특별했겠네요. 우리는 기특하게도 다투지 않았다. 엄마와 나는 맨날 사소한 걸로 상처주고, 기분 상해하고, 속상해하는데. 이번 여행에서는 기분 좋게 이틀을 보냈다. 낯선 길을 함께 걷고,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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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일들모퉁이다방 2014. 5. 17. 00:10
4월의 일들. 흐드러졌던 벚꽃길이 이제는 연두빛으로 가득하다. 퇴근길. 불금. 교촌이 진리다. 사랑합니다, 교촌. 커피콩 이름. 친구가 보내준 유희열의 리스트를 다이어리에 적어뒀다. 약수역. 오르막길은 쉴 틈 없이 후다닥 올라왔는데, 내려올 때 풍경이 좋아 한 템포 쉬었다. 그렇게 생각해줬음 좋겠다. 지금의 니가. 약수역의 닭발. 약수역의 녹두전. 약수역의 통닭. 네, 모두 한날 저녁에 먹었습니다. 구몬 한자를 하다 갑자기 울컥해질 줄이야. 그건 잊을 망의 뜻 부분, 마음 심 때문. 다시 걷기 시작한 날의 불광천. 무지에서 득템. 괜히 마음이 설렁해지면 무지 매장에 간다. 비싸서 사지는 못하고 여러가지 만지작거리고 온다. 네, 오늘도 불금입니다. 이제 집에서 에스프레소를 만들어 따뜻한 물 섞어 아메리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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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전주여행을가다 2014. 5. 15. 19:26
차장님이 셔틀 안에서 그러셨다. 요즘은 다들 놀러 통영이랑 전주에 간대. 그런 전주에 다녀왔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오월 연휴 때 전주 한옥마을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고. 연휴 때 집에 내려가서 통영에 놀러갔는데, 정말 그랬다.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전주도 그랬겠지. 사람 많은 건 질색이라 영화제 마지막에 전주에 내려갔다. 영화 한 편 보고, 기념품 구경하고 하나 사오면 딱이겠다 생각했는데, 기념품은 벌써 철수한 상태였다. 기념품 보는 건 나의 낙인데. 아쉬웠다. 역시 전주는 덥고, 물이 부족한 도시였다. 잊고 있었는데, 마주하니 다시 새록새록 이 년전 영화제의 기억들이 떠올랐다. 딱 이 년 만에 봄의 전주에 왔다. 언니가 말했다. 오늘이 우리의 가장 젊은 날이야. 나는 언니에게 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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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다방의 강아솔무대를보다 2014. 5. 9. 22:29
2월, 우리는 신촌의 맥주창고에 앉아 있었다. 그날 언니와 헤어지면서 일기를 꼭 쓰고 자겠노라 말했다. 술집의 풍경이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우리가 맥주를 마시는 동안 손님이 거의 없었다. 새로 개업한 가게였고, 토요일 밤에 이렇게 술 손님이 없다니 곧 망할 것만 같았다. 그 가게에 한참 뒤에 등장한 세 팀의 손님이 모두 특이했다. 한 여자가 잔뜩 술이 취한 채 비틀거리며 혼자 들어와서 결국 맥주잔을 깼고, 의대생들이 우루루 몰려와 잘 빠진 몸매의 여자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았다. 그리고 또 한 팀. 한 쌍의 커플은 장애가 있었다. 그리고 서로를 무척 사랑하고 있었다. 그 속에 우리가 있었다. 나는 이 모든 풍경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뭔가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자꾸만 웃음이 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