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 - 그런 것들 뿐이예요
    서재를쌓다 2009. 5. 3. 21:02
    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
    하성란.권여선.윤성희.편혜영.김애란 외 지음/강

        이 소설집에는 모두 9편의 소설이 들어 있다. 이혜경, 하성란, 권여선, 김숨, 강경숙, 이신조, 윤성희, 편혜영, 김애란의 소설이다. 모두 서울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다. 서울에 머물고 있거나, 서울에 입성하려 하는. 각 소설의 앞에는 작가의 작은 사진과 함께 서울이란 공간에 대한, 서울이란 공간에 대해 쓴 이 소설에 대한 짧은 '작가의 말'이 있는데. '나는 서울에서 나고 자랐다.', '강이 없었더라면 당신과 나는 어떻게 만났을까', '나는 자주 서울에 간다. 영화를 보러 서울에 가고, 술을 마시러 서울에 가고, 어슬렁거리기 위해 서울에 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서울에 간다', '올해로 서울에 산 지 십 년이 됐다. 그사이 다섯 번의 이사를 다녔다'와 같은 글들이다. 그들을 흉내되어 나도 한토막. 
     
       올해로 서울에 산 지 십 년이 됐다. 이건 김애란과 내가 같구나. 그 사이 세 번의 이사를 다녔다. 처음 서울에 와서 나는 반지하의 하숙방에서 살았다. 아직도 기억 나는 건, 그 겨울 룸메이트 없이 혼자 그 방에서 겨울을 났고, 나는 언제나처럼 가난했지만 내겐 하얀색 오래된 어학전문용 라디오가 있었다. 나는 겨울방학동안 서울에 있는 내내 그 라디오를 끼고 살았다. 그 라디오를 들으며 가끔 걸레질을 할 때면 뭔가 충만한 기분이 들곤 했다. 외로웠지만, 외롭지 않았다. 서울에서 처음으로 맞는 겨울이었다. 친구는 서울의 겨울은 끔찍하게 추워서 견딜 수 없을 지경이라고 그 겨울 내게 말했다.

       두 번째 이사는 같은 하숙집 2층의 방으로였다. 친구와 나는 그 때 함께 살았다. 우리는 거의 매일 밤 술을 마셨고, 그 술병을 내다 버리지 않고 커다란 창문 뒤 쇠창 앞 공간에 차곡차곡 쌓아뒀었다. 둘이 아니라, 셋이 마실 때도 있었고, 넷이 마실 때도 있었다. 그런 밤이면 창가의 병 수가 더 늘어났다. 우리는 낮에 바깥에서 그 창문의 반짝거리는 술병들을 올려다보며 뿌듯해 했었다. 하숙집 할머니가 그 병들을 당장 치우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세 번째는 같은 동네의 작고 깔끔한 하숙집이었다. 그 곳에 친구들이 살았다. 다른 층, 다른 방에서. 그 하숙집에 살 동안 나는 실연을 당했고, 친구도 실연을 당했다. 집 앞 포장마차에 자주 들러서 여름비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술을 마셨고, 처갓집 통닭집 아저씨는 둘이 오면 닭 반마리도 흔쾌히 튀겨 주셨다. 곧 동생이 올라왔고, 티비랑 앉은뱅이 책상, 작은 수압공간을 빼고 둘이 누으면 꽉 차는 그 방에서 몇 년을 살았다. 그 집에서는 빨래를 넣어놓으면 옷이 없어졌고, 신발장의 구두가 없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아주 가끔있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둘이서 그 좁은 방에서 어떻게 살았나 싶지만, 그 시절 나름대로 따뜻했고 행복했다. 친구들이 아침이며 밤이며 같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의 집이다. 처음으로 가지게 된 자취집. 세 자매가 함께 살고 있다. 오래되고 낡은 주택의 2층이지만, 나는 이 집이, 이 동네가 좋다. 햇볕도 잘 들어오고, 외지지 않고, 재래시장도 가까이 있고, 마트도 가까이 있고, 술집도 많고, 공원도 있고, 조금만 걸으면 중랑천이다. 걸어서 30분 거리에 약수터도 있고, 자그마한 산도 있다. 이 동네에서 산 지가 벌써 몇 년이지? 나는 그동안 이 동네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어느 집 맥주가 맛있고, 어느 집 채소가 싱싱하고, 어느 집이 친절하고, 어느 길이 빠른지. 어느 길이 한적하고, 어느 길이 아름다운지, 어느 길의 바람이 시원한지 다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동네를 산책할 때 행복하다. 그렇게 서울에서 산 지 십 년이 되어간다. 나는 그 십년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많은 커피와 술을 마셨다. 어떤 사랑도 경험했고, 어떤 이별도 치뤘다. 행복했고, 부끄러웠으며, 아팠고, 비로소 편안해졌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서울에서 걸어온 길들을 생각했다. 내가 살았던 동네들도. 아빠는 아직도 총각시절 잠시 살았던 서울의 어느 곳의 이야기를 곧잘 하신다. 그 곳에서 먹었던 자장면, 그 곳의 사람들. 명절 때마다 삼촌은 자신이 발을 디뎠던 서울의 그 곳이 잘 있느냐고 물으신다. 그 우리들의 서울이, 소설이 되어 이 팬시한 표지의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북촌, 남산, 재개발 구역, 강이 보이는 오피스텔 등등. 내가 걸었던, 혹은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창 밖으로 보았던 곳의 풍경들이 책 속에 담겨 있다. 그 풍경들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마지막 장을 덮고서도 기억에 남았던 소설은 권여선과 윤성희, 편혜영의 소설. 권여선의 소설을 읽으면서는 왠지 이 소설을 읽으면서 누군가 마음 한 구석이 쿡쿡 찔리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묘하게, 아주 얄밉게 (그렇지만 어쩔 수가 없이) 줄다리기를 하는 사람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윤성희의 소설은 위독하신 친구 할머니를 위해 옛날 학창시절 때 흔적을 찾아 캠코더로 이런 저런 영상을 찍는 중년들의 이야기다. 지하철에서 키득키득 웃다가 마지막에 숙연해졌다. 꼭 서울이 아니더라도, 중년이 된다는 거, 나이가 들어 먹고 산다는 거, 그런 친구들을 바라본다는 거, 그건 가슴 한 구석이 뜨끈해지는 일 같다. 새벽두시 삼십칠분에 육만사 천원을 계산하는 일과 같은. 편혜영의 소설은 또렷하게 이미지가 남는 작품. 서울이 코 앞인 도로 위에서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기다리는 이는 오지 않고, 마침내 칠흑같이 깜깜해졌을 때 찾아오는 공포. 서늘함. 두려움. 희망으로 가득찼던 낮의 활기찬 기운이 저녁이 되면 서늘해질 때. 그 모습의 이미지. 

       소설을 읽고 5월에는 경복궁에 가야지, 생각했다. 북촌에도 가야지, 생각했다. 어린이 대공원에도 가야지, 생각했다. 봄의 서울은 활기차다. 지난 목요일에는 시청 잔디밭에 앉아 징거버거랑 커다란 캔맥주를 마셨다. 금요일에는 친구 집에 가는데 늘 가던 2호선 시청 방향이 아닌, 2호선 잠실 방향의 전철을 탔다. 낮이었고 햇살이 밝았다. 자리도 있었다. 그 가운데서 책을 읽었다. 음악도 들었다. 그 길이 따스했다. 지난 주에는 누군가 내게 물었다. 좋은 일 없을까요? 나는 없어요, 라고 단번에 말해버리곤, 아, 라고 말을 이었다. 남산에 걸어 올라가서 캔맥주를 마시면 좋아요. 그 사람이 그랬다. 그건 좋겠네요. 또 있어요. 뚝섬에서 돗자리 깔고 맥주를 마셔도 좋아요. 그리고 내가 말했다. 그런 것들 뿐이예요. 그 사람이 말했다. 그 말 좋네요. 그런 것들 뿐이예요, 라는 말. 남산도, 한강도, 서울에서 가능한 일. 서울이 징글징글할 때도 있지만, 이런 일을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이런 두서없는 글을 이렇게 길게도 쓰고 있구나. 이런.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