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그림 같은 신화 - 이제 난 신화를 읽어야겠어
    서재를쌓다 2009. 5. 21. 08:31

    그림 같은 신화
    황경신 지음/아트북스



        5월 7일 목요일 저녁 7시 반에 나는 황경신 앞에 앉아 있었다. 그곳은 이리카페였고. 황경신은 크게 갈 지자를 그리며 걸어가면 세 걸음이면 닿을 만한 거리에 앉아 내게 신화 이야기를 들려줬다. 예쁘고, 슬프고, 아름다운 그림들도 보여줬다. 나는 황경신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무척 발랄해서 (옷차림도 발랄했다) 놀랬고, 우리 만남의 초반부가 생각보다 지루해서 놀랬고, 어느새 내가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푹 빠져 있는 것에 놀랬고, 살까말까 망설였던 책을 결국 사게 만들었던 그림 같은 신화 이야기에 놀랬다.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행복했다. 이 책은 12명의 신화 속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다. 황경신이 그 인물들에 엮인 이야기들을 조근조근 들려주고, 그 신화 이야기를 그린 화가의 작품도 보여준다. 공부하기 위한 신화 이야기,라기 보다는 느끼기 위한 신화 이야기,라고 할까. 목요일의 만남의 마지막에 황경신이 한 말이 있는데, 그 말이 이 책과 잘 어울린다. 자신의 책으로 인해서 신화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 속 어느 인물의 이야기가 더 궁금해져서 다시 어떤 책을 뒤적거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아니면 어떤 화가의 작품이 좋아서 그의 작품들을 더 찾아보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자신은 만족한다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녀의 꽤 괜찮은 독자다. 나는 표지 그림을 그리기도 한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라는 화가의 작품을 더 많이 알고 싶어졌고, 언제나 사랑에 빠져 있어야 하는 새벽의 신, 에오스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으니까.


        이 책을 읽는 동안 여섯 개의 하늘색 포스트잇을 붙였다. 첫 번째 포스트 잇. 이 부분을 읽을 때의 상황은 확실히 기억한다. 지하철 안이었고, 5월 8일의 아침이었다. 나는 이 부분을 읽고 그 맑은 아침에 눈물이 고였었다. 아마도 그 부분에 딱 맞는 음악까지 듣고 있었으면, 그 맑은 아침부터 나는 울었을 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나 사랑하게 될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에로스는 알고 있다. 이 부분. 신화의 거의 모든 이야기가 그렇듯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도 사랑이야기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를 이용하고 배신했다. 하지만 배신 당한 줄도 몰랐던 아리아드네. 저 글에서 언급된 워터하우스의 그림에는 평온한 표정의 아리아드네와 그 순간 그녀를 떠나가는 남자의 배가 저 멀리 보인다. 아니다, 다시 보니 그녀의 표정도 평온해보이지 만은 않구나. 혹시 그녀는 그 순간, 그가 그녀를 떠나버리는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사랑의 시작은 찬란하나, 사랑의 끝은 언제나 어느 한 사람이 지독하게 아픈 운명이므로, 슬프고, 아리고, 시리다.   

        두 번째 포스트 잇. 이런 에로스의 화살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너와 내가 만나게 된 것이 둘도 없는 운명,이라 믿는 사람들의 코 앞에 대고 사랑에 대해 스물 네살 이후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내가 들려주고 싶은 구절.

        세 번째 포스트 잇.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는 사랑했고, 그래서 결혼을 했다. 신혼의 단꿈에 빠진 것도 잠시, 들판에서 길을 걷다 뱀에서 물린 에우리디케는 죽고,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데려오기 위해 지하세계로 향한다. 오르페우스가 연주하는 리라 소리는 지하세계를 감동시켰고, 결국 그는 그녀를 지상으로 데려온다. 하지만 결국 지상으로 완전히 나가기 전까지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명을 어기는 순간, 그에게서 그녀는 연기처럼 사라진다. 이별의 순간은 언제나 그러하다. 한 사람이 먼저 연기처럼 사라지고, 한 사람의 마음만이 온전히 남는 법. 오르페우스는 연기처럼 사라진 그녀를 더욱 사랑했고, 하늘이 이에 감동하여 어쩌고 저쩌고. 해피엔딩이니깐. 더 말하고 싶지 않다. 난 어쩌면 비극을 사랑하는 사람인가봐.

       이제 네 번째 포스트 잇. 

        메두사는 괴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무척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녀의 아름다운 겉모습에만 눈독을 들인 남자는 그녀를 범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녀의 아름다운 겉모습만을 질투한 또 다른 여자는 그녀의 미모가 자신보다 빛나지 않도록 마법을 걸었고, 아주 먼 곳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어느 날, 그럭저럭 행복하게 살고 있던 그녀에게 그녀와 아무 상관이 없는 남자가 찾아와 눈을 감고, 그녀의 아름다운 눈조차 바라보지 않고 그녀를 죽였다. 그리고 그는 영웅이 되었다. 메두사는 괴물이 아니었다. 그녀를 사랑하고, 질투하고, 죽였던 사람에게만 그녀는 괴물이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여섯 번째 포스트 잇. 두 포스트 잇은 메아리에 대한 이야기다. 에코라도 불리는 수다쟁이 님프에 관한 이야기다. 에코는 헤라로부터 '다른 사람이 한 말의 마지막 말만 되풀이해야 하는' 벌을 받았다. 그녀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아이였으므로, 질투의 여신 헤라는 바람피는 제우스의 행방을 알려주는 대신 지가 하고 싶은 말만을 끝없이 늘어놓아 결국 제우스의 현장을 덮치는 것에 실패한 분풀이를 에코에게 한 것이다. 역시 헤라는 현명한 여자가 아니야. 그리하여 에코는 남이 한 마지막 말만 되풀이 하는 벌을 받은 것이다. 그녀는 나르키소스를 사랑했고, 그래서 자신의 마음을 달콤한 사랑의 말로써 나르키소스에게 전할 수 없었기에, 어느 날 연기처럼 사라졌다. 자신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의 열기로 인해 팔이 녹고, 다리가 놓고, 머리카락이 녹고, 두 눈까지 녹아버렸다. 그리고 남은 단 하나. 에코에겐 목소리뿐이었다. 

       정확히 다섯 번째 포스트 잇이 붙여져 있는 곳. 에코가 말한다 "우리가 그를 사랑했듯이, 그 역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해주세요. 하지만 그 사랑을 이룰 수 없게 해주세요. 그가 사랑의 아픔을 알도록 해주세요." 전할 수 없는 사랑을 간직한 이는 이렇게 집착한다. 그런 사랑을 해 본 사람만이 에코의 진심을 알 수 있다. 나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신 그러진 않을 거다. 응.

       여섯 번째 포스트 잇. 마지막이다. 에코도 마지막이란다. 

        사실, 내가 이 책에 반한 건 여섯 개의 포스트 잇이 붙여진 구절이기 보다는, 처음에 있는 황경신의 프롤로그였다. 제목은 '안녕하세요?'이다. 프롤로그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제 난 신화를 읽어야겠어.' 어느 가을, 길을 걷는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봄이었을지도 모른다. 거리에는 투명하고 건조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조금 외로웠던 것 같다. 단지 심심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네 번째 문단에 이런 문장들이 적혀져 있다. "신화를 읽고 났더니 겨울이 되어 있었다. 여름이었는지도 모른다. 신화를 읽은 후의 나는 신화를 읽기 전의 나와비슷했다. 나의 생활도 그랬다. 나는 늘 그랬듯이 밥을 지어먹고 사람을 만나고 또 다른 책을 읽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에 귀를 기울이고 밤이면 오래된 토끼 인형과 함께 꿈 많은 잠을 잤다." 그리고 신화를 읽은 후, 아주 작은 무언가가 바뀌었구나, 느끼는 그녀. 여덟 번째 문단과 아홉 번째 문단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 살아 있구나,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에 연결되어. 이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밥을 지어먹고 사람을 만나고 또 다른 책을 읽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에 귀를 기울이고 밤이면 토끼 인형과 함께 꿈이 많은 잠을 잤다. 토끼 인형은 아주 오래되었지만 우리가 함께 꿈은 매일 달랐다. (...) 나는 가끔 울었고 자주 웃었다."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드는 문장들이 꽤 많아 이런 생각을 했다. 5월 7일 수요일 7시 반의 이리카페에서 곧 내가 좋아하게 될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그림을 배경으로 그 문장들을 베토벤이나 슈베르트의 음악에 맞춰 황경신이 읽어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 그러면 난 그 시간을 한껏 더 사랑했을 거다. 그녀에게 언젠가 편지를 쓰게 된다면 말해줘야지. 다음번에는 그런 만남을 기대한다고. 아, 그 날 그녀는 책의 앞 날개에 있는 작가 사진과 똑같은 옷을 입고 우리를 만나러 와주었다. 앞 날개의 사진에는 그녀의 얼굴이 안 보이지만, 난 그 날 앞 날개의 옷 위 밝고, 생각보다 활달한 그녀의 얼굴을 두 시간동안 마주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녀는 내 이름 밑에 연필로 사각사각거리며, '가장 아름다운 신화는 살아 있는 우리라고'라고 써 주었다. 연필인가요?, 라고 내가 물었고, 그녀는 생각보다 활달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연필을 좋아해요,라고 말해주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