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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볼루셔너리 로드 - 소설과 영화 사이
    서재를쌓다 2009. 3. 22. 21:25

    (스포일러 있어요)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두 번 봤다. 한 번은 왕십리 CGV에서, 한 번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아트하우스 모모는 처음 가봤는데, 그 곳의 분위기에 반해버렸다. 근데 좌석이 좀 불편하긴 했다. 앞뒤 좌석의 간격이 좁고, 앞자리에서 보면 목 아프겠다는 느낌이. 아무튼.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본 건, 예매권이 생겨서 한 번 더 본 거였는데, 보길 잘했다 싶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말이다. 두 번째 보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완전히 다르게 다가왔다. 이건 정말 특이한 경험이었는데, 두 번째로 볼 때 그 마지막 장면에서의 해석이 달라지면서 뭔가 가슴이 벅차왔다. 다시 시작할 수 있겠구나, 희망을 가져도 되겠구나,는 생각이 드는 거다. 윈슬렛 언니는 실패했지만, 우리는 꽤 괜찮게 살아갈 수 있겠구나,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 날 오후 내게 '다괜찮아질까요?'라고 문자를 보낸 그이에게 '괜찮아질거예요,분명히'라고 답했다. 괜찮아질 거예요. 정말.

        두 번째 영화를 본 건 소설을 읽고 난 뒤였다. 나는 이 소설을 한 달 가까이 들고 다녔다. 요즘 책이 잘 안 읽히고 있는 탓이기도 하지만, 진도가 쉽게 나가는 종류의 소설도 아니였다. 분량의 반 정도가 지나면서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러다 마지막 장면에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영화를 봤을 때 나는 케이트 윈슬렛, 에이프릴이 마지막에 행한 그 행위가 거의 자살에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파리의 꿈이 날아갔다. 이제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일상이 계속 될 거고. 허무하고 희망이 없는 미래가 펼쳐질 거다. 무언가를 절실히 꿈꾸는 날도 없을 거다. 이건 그녀에게 절망적이다. 살아갈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에이프릴이 술집에서 셰프에게 한 말, 굳이 파리로 가고 싶었던 건 아니였어요. 이제 떠날 수도, 머무를 수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 날' 완벽한 아침식사는 마치 집 나가는 엄마가 그 사실을 애써 숨기며 차려주는 마지막 만찬처럼 서글프기만 했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영화는 소설을 거의 그대로 따랐다. 소설의 압축본이라 해도 되겠다. 영화를 본 뒤, 소설을 읽으면 영화에서 보여지지 않았던 디테일한 묘사들을 읽을 수 있다. 그 중, 가장 마음에 남았던 부분은 243페이지. 이 부분은 에이프릴도 프랭크도 아닌 기빙스 부인에 대한 묘사다. 기빙스 부인, 헬렌이 에이프릴에게 정신병원에 있는 아들을 한 번 만나봐달라고 부탁을 하고 돌아온 뒤, 남편에게 그 일을 이야기하다 잠시 옷을 갈아입는다고 2층으로 올라와서 그녀가 느끼는 감정. 

     
       그 날 기빙스 부인은 에이프릴에게 기빙스 부부의 아들 존을 기꺼이 만나겠다는 말도 듣고, 훨러 부부가 곧 유럽으로 떠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예정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2층에 올라와 옷을 갈아 입기 시작할 때만 해도 그녀의 마음은 안정적이었다. 오히려 조금 흥분되어 있는 상태였다. '시설이 좋은 집에 사는 날렵하고 유연하 소녀'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아버지 집으로 되돌아와서 차를 대접하는 오후의 무도회에 가려고 분주하고 드레스로 갈아 입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벗어놓은 옷과 자신의 벗은 몸을 보니 거기에 '두 마리의 두꺼비'같은 발이 있었다.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울지 않으려 애썼지만, 5분 후 그녀는 침대 기둥을 잡고 울기 시작한다. 영화에는 기빙스 부인에 대한 이런 묘사가 없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의 밀리의 반응이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에도 밀리가 훨러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침실에서 울기 시작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었던가? 예쁜 옷을 차려입고 기품있고 우아하게 앉아  우린 유럽으로 갈 거예요, 파리로. 거기 가서 꿈을 찾을 거예요, 라고 말하던 순간의 밀리의 표정(영화에서의)은 한동안 잊지 못할 거다. 나는 그 순간 밀리의 표정을 백퍼센트,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다시, 영화의 마지막 장면 이야기. 소설을 보면 마지막 장면에서 에이프릴이 자살을 한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에이프릴은 혹시나 잘못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그래서 만약,을 대비해서 프랭크에게 메모까지 남겨 놓았다. "친애하는 프랭크,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제발 당신 자신을 탓하지 마요." 이 메모는 원래 몇 장의 긴 편지였지만, 결국 이 짧은 메모 하나로 남았다. 에이프릴은 '다시' 잘 해보기 위해서, 여기에서의 '제대로' 된 새 삶을 시작해보기 위해서 그 일을 거행한 거다. 혹시나 잘못될 수도 있지만, 여기 머물 수도 떠날 수도 없기에, 그 일을 행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실패해도 어쩔 수 없지만, 그 일을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상태였던 거다. 하지만 아무 일 없이 성공하기를 바랬던 일인 거다. 그랬던 거다. 두 번째 영화를 보는 데 그게 보였다. 완벽한 아침 식사에서 에이프릴은 그런 표정을 여러 번 지어보인다.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이제 정말 나를 미워하지 않는 거지?'라고 묻는 프랭크에게 '그럼요 (우린 다시 시작할 수 있어요)'라고 답한다. 

       소설에는 영화에 없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에이프릴을 잃은 프랭크는 셰프와 밀리 몰래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다. 거기서 에이프릴의 핏자국을 본다. 자신을 끊임없이 자책하고 있었던 그는 에이프릴의 메모를 본다. 그로 인해 나중에 그는 죄책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났을 거다. 메모를 보기 전, 프랭크는 에이프릴의 핏자국을 지운다. 순간 에이프릴의 목소리로 환청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세제를 묻혀서 닦아요. (아, 그런데 지금, 이 부분을 찾아보기 위해서 책을 뒤적거렸는데 에이프릴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난 '당신이' 저 타월을 신문지에 둘둘 말아서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면 된다고, 그러고는 욕조를 깨끗이 씻어 내리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괜찮죠?' 이 '당신이' 부분에 갑자기 혼란스러워지지만, 이건 프랭크의 환청이니까. 그녀는 분명 '새로' '잘' '다시' 살아보고 싶었다고,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본 영화에서 에이프릴이 그 일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왔을 때 커다란 창 밖을 내려다보며 지었던 평온한 표정은 그걸 의미하는 거라고. 그리고 카메라가 뒤로 빠지면서 보여줬던, 에이프릴이 내려다보고 있었던 그 초록의 물결들이 그걸 의미하는 거라고. 그런데 지금 이 글을 끄적거리면서, 또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정말 에이프릴은 어떤 마음이었나? 끝을 생각했나? 새로운 시작을 바랬던 건가? 아무래도 소설을 한 번 더 읽어야 겠다. 아니면, 소설을 읽지 않아도 어느 날 우연히 떠오르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래, 그러는 편이 더 낫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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