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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토요일의 단상
    모퉁이다방 2013. 4. 7. 00:19

     

       어제는 모임이 취소되어서, 광화문에 있는 친구에게로 갔다. 나는 광화문이 참 좋다. 거기서 술을 먹다, 가게 이름에 취해 올드팝이라는 데를 들어갔다. 삼면이 바였고 손님들 모두 남자였다. 보통의 나는 그냥 나왔을 테지만, 내 친구는 나오지 않는 사람이다. 덕분에 나도 그 공간에 들어갔다. 한면의 바에 앉아 바텐더 언니들이 따라주는 맥주를 마셨다. 언니들은 엘피판을 닦고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남자손님들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어줬다. 맞장구도 쳐줬다. 셔츠를 끝까지 잠그고 리본타이를 하고 롱치마를 입은 언니들이었다. 화장실을 다녀왔더니 친구가 아사히 맥주를 시켜놓았다. 우리는 손님들이 남자들 뿐인 광화문 구석 바 한구석에 앉아, 바텐더 언니들이 엘피판을 분주하게 꺼내보고, 헝겊으로 판을 닦고, 그 판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친구는 아사히 맥주를 아껴마셨고, 눈치 없는 나는 한 잔을 다 마시고, 카스 맥주를 한 잔 더 시켰다. 카스 병맥주가 육천오백원이었다. 우리 옆으로 중년의 커플이 왔다. 우리 외에 또다른 여자 손님이 한 명 더 등장한 것이다. 굉장히 다정했다. 숏컷트를 한 여자분이 우리에게 계속 건배를 권했다. 이 언니들이 옆으로 비켜줘서 자리가 생겼어. 언니들, 이 노래 내가 시킨 노래야. 너무 좋지 않아? 오래된 팝송이 흘러나오는 바에서, 친구가 가요도 되냐고 바텐더 언니에게 물어봤다. 김광석 노래 아무거나 틀어주세요. 친구는 속삭이듯 서른 즈음에만 빼구요, 했는데. 서른 즈음에가 나왔다. 그래도 좋았다. 아사히 맥주 두 병과 카스 한 병, 그리고 스무 곡 즈음의 노래들. 계산할 때 너무 비쌀까봐 걱정했는데, 그래도 한 번의 경험치고는 괜찮은 가격이었다. 옆의 커플은 불륜이었다.

     

        오늘 낯선 사람을 만나, 익숙한 족발을 먹었다. 낯선 사람에게 내가 다녀온 여행 이야기를 하게 됐다. 생각해보니 많은 곳을 다녔다. 전주도 갔고, 부산도 갔고, 제천도 갔고, 속초도 갔고, 지리산도 갔고, 남원도 갔고, 후포도 갔고, 정동진도 갔고, 경주도 갔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 길의 풍경들이 생각났다. 가맥집에서 하이트 병맥주를 한껏 마시고 취해 걸어왔던 전주의 봄밤. 언니가 말했다. 집에 갈 걱정 없어 좋다. 경주의 숙소에서 친구와 술 마실 때도 친구가 그랬다. 택시 탈 걱정없이 이렇게 술 마시니 좋다. 우리는 린의 오래된 음악을 함께 들었다. 제천에서의 야외영화는 어땠고. 야외영화를 보고 버스에서 내려 걸었던 여름밤과 저수지로 향해 가던 아침버스 안에서의 바람은 어땠고. 부산 해운대에서 모래사장에 가만히 앉아 보았던 일몰은 어땠고. 영화 늦을까봐 죽기 살기로 뛰었던 마지막날 아침은 어떘고. 지리산에서 밤에 술 마시고 들였던 봉숭아물은 다 없어져버렸네. 정동진에서는 파라솔 의자를 가져다놓고 흐린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가는 걸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후포항에서는 세 끼 내내 대게를 먹고, 속초에서는 방파제를 자전거 타고 달리고, 대통령 선거 결과를 기다리며 먹었던 옥수수 동동주와 오징어 순대.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생각 나, 술을 많이 마시지 않았는데도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 여행을 나와 함께 해 준 친구들. 너무너무 고마웠다. 또 함께 가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봄날의 전주에, 여름날의 제천에, 가을날의 부산에, 겨울날의 정동진에. 내가 많이 의지하고 있다고. 우리는 정말 좋은 추억을 함께 하고 있다고. 더 좋은 추억을 함께 만들자고. 낯선 사람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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