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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인
    서재를쌓다 2019. 3. 24. 21:09



    (...) 나는 글을 쓴다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도 글을 쓰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믿으면서도 한 번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닫힌 문 앞에서 기다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 34~35쪽


       이 모든 것에 대해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삶의 원칙, 즉 우리의 불행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배웠다. 그러고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도 입을 다물게 되었다. 첫 번째 고백을 듣는 사람들은 우리의 연인들이다. 근무지 밖에서 만날 때, 처음엔 사이공 거리에서, 다음에는 정기 여객선에서, 기차에서, 그 후에는 아무 곳에서나, 우리는 속내 이야기를 무한정 풀어 놓는다. 

    - 75쪽



        스무 살 때 내게 하루키 소설 읽는 순서를 알려준 사람이 있었다. 생애 첫 하루키 책으로 어떤 책을 골랐는데, 그것보다 다른 책을 읽는 게 더 좋다고 추천해줬다. 그는 하루키의 열혈 팬이었다. 작가의 작품을 읽는 데 스무 살 적 그 사람처럼 순서가 있다고 생각하는 주의가 아니지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읽으면서, 그 전에 읽었던 <이게 다예요> 생각이 났다. <이게 다예요>는 나의 첫 뒤라스 책이었는데, 대부분의 글귀들이 마음 깊이 와닿지 않았다. 그저 책에 여백이 많아서 빨리 읽을 수 있었다. <연인>을 읽을 수 있었던 건, 제임스 설터 때문이다. <소설을 쓰고 싶다면>에 이런 문장들이 있었다. "책을 읽는 동안 눈에 보이거나 귀에 들리는 건 아무것도 없지만 우리는 보고 듣고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연인>을 읽고 있었을 때 내가 프랑스령 인도 차이나에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선 대로를 보았고, 흰옷 입은 사람들과 중국인 거리를 보았습니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와 오빠를 알고 있고, 엘렌 라고넬의 믿을 수 없는 알몸을 알고 있고, 애처로운 연인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과거에 있었던 일이지만 동시에 이 글을 쓴 여자의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어요. 그 소설은 1인칭 시점으로 쓴 작품입니다. 그것은 고백적인 글이지만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지요. 하지만 나는 그걸 믿었어요. 그것은 나의 세계사의 일부가 되었지요." (11~12쪽) 통영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프랑스령 베트남의 무더위 속에 있었다. 설터의 말처럼 정말 그랬다. 책을 읽다 고개를 들면 2019년 한국의 풍경이 펼쳐졌지만, 다시 고개를 숙이면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그 시절 동남아 더위가 느껴졌다. 뒤라스는 어머니와 오빠가 세상을 모두 떠난 뒤에야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온 이 자전적인 이야기를 쓸 수 있었다고 한다. 비로소. 


       <연인>을 읽은 뒤에 마치 예정이라도 되어 있었던 것처럼 경향신문에 뒤라스의 생애에 대한 글이 올라왔다. 글 쓰는 여성을 다루는 연재글이었다. '여성, 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거기에 <연인>에도 나왔던 어머니의 투자실패 이야기, 무능하고 폭력적인 큰 오빠 이야기가 있었다. 기사의 제목에 뒤라스의 생애가 함축되어 있었다. "가난.모친의 멸시 극복한 작가, 문학은 결코 나를 저버리지 않았다." 어머니는 뒤라스가 자신과 달리 멋지게 살게 되면 자신이 너무 초라해질까봐, 그렇게 언젠가 자신을 홀연히 떠나버릴까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나는 이 부분이 이해가 안 가기도 했지만, 어느 면에서 이해가 되었다. 어머니는 약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어머니를 떠난 그녀가 평생 글을 써 온 이야기가 그 기사에 짧게 함축되어 있었다. 고작 작품 한 권 더 읽고, 그녀를 다룬 기사 한 편을 읽었을 뿐이지만 다시 <이게 다예요>를 읽는다면, 그때와 다르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이게 다예요>는 유서와도 같은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말년에 서른다섯살 연하의 남자와 십오년을 함께 했다고 한다. 정말이지 어머니와는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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