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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전히 카미노를 걷는다
    서재를쌓다 2019. 4. 3. 22:30



        스페인 순례길에 침대와 식사를 제공하는 <스페인 하숙>이 시작되었다. 재미나게 보기 시작했는데, 마침 S가 이 책을 주고 갔다. 순례길을 걸은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이다. 순례길 위에 선 사람들의 이야기는 꽤 읽었는데 또 읽어도 새롭고 흥미롭다. 똑같은 길이라고 해도 그 길을 걷는 사람과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 다르기 때문이겠지. 이번에는 십년 전에 걸은 길을 십년이 지난 뒤에야 정리한 이새보미야 씨의 여정이다. 대학교 3학년 때 2학기 등록금 낼 돈으로 무작정 비행기표를 예매한 젊은 순례자는 잘도 걷는다. 그 긴 길을 별로 힘들어하지 않고 잘 걷는다. 부상만 없었다면 더 잘 걸었을 거다. <스페인 하숙>의 첫번째 하숙생이 유해진에게 그랬다. 힘든 현실을 뒤로 하고 이곳에 왔는데 매일매일 걷고 걷고 또 걷다보면 고민이 해결되거나 하진 않고, 그냥 고민 자체를 잊게 된다고. 그냥 매일을 걷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게 된다고. 새보미야 씨도 그랬다. 그 길 끝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조금 달라진 내가 있었다. 그것으로 인생 자체가 달라지거나 커다란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십년 동안 품은 이야기가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었으니 이 얼마나 근사한 일인가. 그렇게 완성된 책을 이렇게 열심히 읽은 독자가 있고. 언젠가 나도 걸을 수 있을까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 장을 넘겼다. 걷기 욕구가 마구마구 생기는 책. 일기를 열심히 쓰고, 필름 사진을 열심히 찍어둔 탓이겠지만 십년이 지났는데도 십년 전의 일을 풀어내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면 시간이 꽤 지났다고 해도 그것을 풀어내는 것에 주저하지 말자는 교훈도 얻었다. 



       이날의 일은 카미노에서 겪은 최초의 후회였다. 같이 걷고 싶은 친구를 만났음에도, 일정 안에 가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지나쳐버린 일 말이다. 나는 이후로도 한참을 더 걷고 나서야 비로소 '걸어야한다'가 아닌 '걷는다'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다른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오롯이 걷는다는 건 정말로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 43쪽


       종교가 없는 나는, 신이 위대한 건 수많은 사람들의 믿음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의 마음은 너무도 특별해서, 엄청난 효과를 내곤 한다. 신이 있다면 그건 어떤 길이나 어떤 규칙 그 자체가 아니라, 수천 년 동안 길을 걸어오며 켜켜이 쌓인 순례자들의 발걸음, 규칙을 세우고 그것을 지키려 노력하는 마음이어야 한다. 

    - 47쪽


      대부분의 구간을 혼자 걸었다. 이따금 자전거를 탄 순례자들이 지나가며 인사를 건넸다. 혼자 걷는 건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카미노에 오기 전 기대한 것과 달리 혼자 걷는 길은 심오한 고민이나 깨달음과는 영 멀다. 대부분 언제쯤 휴식할지, 다음 마을은 얼마나 가야 나올지, 남은 식재료를 가늠하며 슈퍼마켓에선 무엇을 살지, 화장실은 언제쯤 쓸 수 있을지를 생각하며 걷기 때문이다. 물론 때때로 나의 남은 대학생활이나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생각했고, 한국에 돌아간 후 영어 공부를 하거나 꾸준히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당장 발 앞의 돌부리를 피하는 일, 당장의 잠자리와 먹거리를 생각하는 일, 바로 지금 여기의 일이다. 이것이 카미노다. 

    - 56-57쪽


       나의 카미노는 아직 스마트폰이 없는 시대였다. 애초에 아예 휴대폰조차 들고 가지 않았다. 굳이 필요가 없으니까.

      스마트폰이 있는 카미노를 생각하면 아주 생경하다. 구글맵이 있는 카미노, 맛집을 검색하는 카미노,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서 다른 순례자들과 소식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카미노, 침대에 누워 화면을 보는 카미노...

      앞서 말한, 짝사랑했던 친구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내게 카미노 사진을 보여주었다. 폰으로 찍은 것들이었다. 나는 그 친구 앞에서 대부분 멍청이처럼 굴었지만 그중에서도 카미노에 대해 얘기했던 날이 가장 못났던 것 같다. 

       나는 가을에, 그 친구는 봄에 카미노를 걸었다. 나는 거의 혼자였고, 그 친구는 시작 무렵부터 뭉친 크루가 있었다. 나는 나보다 오래된 필름카메라 한 대를, 그 친구는 스마트폰을 갖고 걸었다. 나와 그의 차이는 우리가 각자 걸었던 카미노만큼이나 달라서, 그가 나를 좋아할 일은 영원히 없을 것만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70쪽


       이탈리아인 부부 호스피탈레로는 친절하고, 무엇보다 이곳의 분의기가 정말 멋지다. 일기장에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흘러나오는 라디오, 비스듬하고 높은 지붕,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 체스판, 피아노, 계단... 다락에 깔린 매트리스가 오늘의 잠자리인 것도, 지붕창을 통해 하늘이 보이는 것도 낭만적이다. 

    - 74쪽


       토산토스는 따뜻하고 아주 아늑하다. 호스피탈레로들은 장난스럽고 유쾌하다. 생각해보면 어떤 장소를 아름답게 하는 건 공간 자체보다도 그곳에 있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들에겐 내가 스쳐지나가는 많은 순례자 중 한 명이겠지만, 내겐 그들이 너무나 특별하고, 그래서 이곳도 몹시 특별한 것이다. 

    - 79


       이제 조금 익숙해졌는지 기상 시간이 점점 늦어진다. 아침엔 몹시 행복해서, 거대한 전나무 숲 사이 자갈길을 걸으며 연신 노래를 불렀다. 미묘하게 음치박치인 나의 노래는 다른 순례자들을 퍽 즐겁게 해주었다. 

    - 81쪽


       故최진실의 뉴스를 들었을 때 주변엔 다른 나라의 순례자들도 몇 있었지만, 이 소식의 무게를 제대로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우리뿐이었다. 최진실이 죽었다. 아주머니가 손으로 눈물을 닦았던 순간은 내 카미노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장면 중 하나다. 

    -85쪽


       산 후안 데 오르테가 알베르게는 너무너무 추워서, 새벽 6시도 훨씬 되기 전에 잠에서 깨고 말았다. 침대 속에 있어도 어차피 추우니, 차라리 일찍 걸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대강 짐을 꾸려 문을 나섰는데- 하늘에 별이 너무 많았다! 마치 바다처럼. 이렇게 별이 많은 하늘은 열 살 무렵 시골의 이모할머니 댁 앞에서 야영했던 밤 이후 처음이었다. 하늘은 너무 넓고, 깊고, 까맸다. 엄청나게 깊은 바다 끝 어딘가 같았다. 나는 그 광경에 압도되어, 알베르게의 문을 등지고 몇 번이나 출발하려고 시도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내겐 심해 공포증이 있는 모양이다. 한 발 내딛는 순간 다른 세계로 훅 빠져들어 그대로 사라져버릴 것 같았다. 수십 분 동안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두 명의 순례자가 나왔다. 스페인 중년 부부였다.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만 어쨌든 그들은 내가 무서워한다는 것을 알았고, 하늘이 바다 같다는 것도 이해했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서 손을 잡고 걸었다. 잠시 후 별은 빛을 잃고, 천천히 동이 텄다. 하늘 좋아하세요? 정말 멋지네요! 고맙습니다. 

    - 86쪽


       길을 잃고 잠시 헤맬 때 양떼를 치던 아저씨가 다가와 지도를 보더니 길을 알려주었다. 조세프는 프랑스어로, 양치기 아저씨는 스페인어로 말했는데 대화가 통했다. 남부 프랑스의 말과 비슷하단다. 국경이 닿아 있는 세상은 이렇구나. 금을 건넌다고 전혀 새로운 언어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걸을 때 바뀌는 풍경처럼 사람들의 말도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 89쪽


       이를 닦다 별똥별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일기장을 펼쳐놓고 아무렇게나 끄적이다가 그냥 두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칠흑 같은 밤이라고 생각했지만 창밖에 별이 보인다. 색색거리는 다른 순례자들의 숨소리가 평소보다 더 크게 닿는다. 평화롭고, 깊이 침잠하는 기분. 이 어둠에는 따뜻한 온도가 있는 것 같다. 멋지고 귀중한 시간이다. 

    - 93쪽


       생각해 보니 나는 카스트로헤리스에서 이테로 데 라 베가까지의 풍경을 알지 못한다. 어두컴컴하게 비가 쏟아졌기 때문에 그냥 끝없는 폐허를 걷는 것만 같았다. 카미노는 수많은 우연의 연속이구나. 어떤 곳, 어떤 시간, 어떤 날씨, 어떤 컨디션. 그 모든 가능성이 만나 이루어진 순간에 내가 있다. 다시 이 부근을 걷는다면, 그때는 날이 맑아질 때까지 기다려 아주 천천히 걸어보고 싶다. 

    - 97쪽


       독일에서 온 한 순례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너무 애석하다. 이 젊은 청년은 독일에 있는 자기 집에서부터 여기까지 걸어왔다. 피곤에 찌들고 옷과 신발은 낡았으며 몸은 말랐다. 벌써 두 달을 걸었다고 했다. 2,000km도 넘는 거리다. 그는 말했다. 이 길만이 카미노는 아니라고. 그의 순례길은 지난여름 현관문에서 시작되었다. 아니, 산티아고에 가기로 결정한 순간부터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말을 잊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내 순례길이 생장피드포르에서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았을 때가 아니라, 인터넷에서 순례자의 그림을 본 순간 처음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112쪽


       포르투갈 길 Camino Portugues

       포르투갈 길의 수도 리스본에서 출발하는 길. 해안마을 포르투Porto를 지나며 대서양 해안을 끼고 걷는 아름다운 길로, 카미노 루트 중 두 번째로 순례자가 많다고 한다. 약 630km

    - 113쪽


       정확히 말하면 발렌틴은 순례자라고 할 수 없었다. 그의 목적지는 산티아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발렌틴이 진짜 순례자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질문이 뭔지도 알지 못하는데, 발렌틴은 답의 영역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못내 부러웠다. 

    - 135쪽


       고양이들과 함께 벽난로 앞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 보니 카미노에서 세 번째로 맞는 비 내리는 날이다. 곁에선 나무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있고, 내가 글씨 쓰는 소리를 빼면 정적- 카미노에서 많은 것을 경험한다. 정적, 바람, 지평선, 일출과 일몰, 밤하늘, 비, 완전한 홀로 있음 등등. 그리고 따뜻함도! 내 생각엔 카미노가 천국이 아닐까 싶다. 카미노에 오기 전 수하물 분실로 파리에 먼저 들른 건 천운이었다. 카미노를 걷고 나서 파리를 관광했다면 별로 좋지 않았을 테니까.

    - 142-143쪽


       나는 세르조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고 생각한다. 서쪽을 향해 해를 등지고 걸었던 길과 동쪽을 향해 해를 온몸으로 마주하며 걷는 길의 풍경은 전혀 다를 것이므로. 그것을 어떻게 똑같은 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목적지에 당도했다고 해서 길이 끝나는 것은 아님을, 그 이후에도, 이미 걸었던 길 위에서도 새로이 발견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 있음을. 

    - 151쪽


       차도의 옆으로 이어진 완만한 길이었다. 차는 거의 없었는데, 이따금 지나가더라도 걷는 순례자를 배려해 천천히 지나가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작은 마을들을 지났다. 날은 맑고, 길을 고요하며, 나는 혼자 걷고 있었다. 

       세상은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가득 차 있다. 

    - 167-1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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