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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때 묻은 나의 부엌
    서재를쌓다 2019. 1. 24. 22:52



       그렇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던 25년 전부터 쭉 이 양철 쌀통을 사용해 왔다. 쌀 씻기 바로 전, 소쿠리를 한 손에 들고 쌀통 뚜껑을 비켜 연다. 계량컵을 쌀 안에 푹 찔러 넣고 평평하게 깍아 두 번, 세 번. 그러고 나서 수도꼭지를 비틀어 쌀을 석석 씻는다. 십 년을 하루같이 당연하다는 듯 반복할 수 있었던 건 새삼스럽지만 행복한 일이다. (...)

       새 쌀 한 포대를 사 와서 포대를 끌어안고 입을 벌려 쌀을 쌀통에 쏴아 붓는 때가 무척 좋다. 쌀이 양철에 부딪히며 마른 소리를 내면 그 소리가 또 그렇게 좋다. 내 스물다섯 해, 수백 번을 반복해 온 소소한 집안일이지만, 그때마다 내 살림의 대들보를 확인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10-11쪽)


       녹은 긴 세월 쇠가 품어 기른 드라마다. 그곳에 하나하나의 이야기가 있고, 녹은 다름 아닌 그들의 이야기꾼이 된다. 무쇠 표면 위에 단단히 뿌리 내리고 시간을 아로새겨 온 확실한 강인함과 늠름함이 있기에 우리들은 그곳에서 흔들림 없는 미를 발견하고 감탄하는 것이리라. (42쪽)


       흙과 불과 손기술. 내가 마음을 빼앗긴 아시아의 그릇은 모두 이 세 가지 요소가 결합돼 탄생한 하나의 아름다운 형상이다. 미묘한 일그러짐이 자아내는 태평함과 너글너글함. 자연유나 요변에서 오는 재미. 투박하면서도 천진난만한 모습에서 품격까지 느껴지니 지루하지 않다. 그래서 이 그릇을 우리집 식탁에 올리고 싶다. 매일 쓰고 싶다. (154쪽)


       차도 취한다.  

       술에 취하면 머리가 붕 뜨지만, 차에 취하면 두 발이 땅바닥에서 10센티미터 정도 뜬다. 머리는 맑고 또렷한데, 몸이 붕붕 부유한다. 게다가 차에 취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간 도둑을 만나게 된다. 술을 마시면 시간 속에 흠뻑 젖어 무겁게 침전해 가는데, 차를 마시면 시간이 쌩 하고 질주한다. 차 마시면서 정신없이 이야기하다가 기껏 해야 한 시간 남짓 됐으려나 생각해 시계를 보면,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어 기겁을 한다. 그것도 좋은 차일수록, 무엇 때문인지 중국차일수록 그렇다. (213쪽)


       중국차는 팽팽하고 과격하게 취하지만, 일본차는 느릿느릿 취한다. 차를 홀짝이다 보면 분위기가 누그러지고, 기분이 붕 뜨면서 평온해진다. 오후의 따뜻한 양지가 그리워지기도 한다.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마메가시와 아라레를 좋아하는 접시에 적당히 골라 담으며 우리 꼭 할머니 같지 않냐며 마구 보고 씨익 웃는다. 

       예를 들면, 옻칠한 작은 쟁반 위에 오래된 세토 접시를 얹고 다과를 골라 담는다. 혼자 마시든 누군가와 함께 마시든 마찬가지로. 그 작은 놀이가 자아내는 긴장이 티타임을 특별하게 해준다. 

       뜨거운 차를 홀짝이는 느긋한 오후는 꽤나 즐겁다. 그날 밤 차예관에 필적할 만큼. (216쪽)


       이단 도시락을 포개고, 흐릿한 하늘에 지리멘 보자기를 골라 꽉 졸라맸다. 자전거로 옮기면 달그락거릴 것 같아 꾸러미를 그러안고 서둘러 꽃집으로 향했다. 참 당연한 마음이었다. (220쪽)


       편지는 늘 깊은 밤에 쓴다. 엽서나 컴퓨터라면 낮에도 쓸 수 있지만, 공들여 고른 봉투와 편지지에 끄적이고 싶은 날의 편지는 역시나 밤이다. 

       업무용 책상이 아니라 거실 테이블로 향한다. 창문을 크게 열어젖히고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정원의 나무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보다 보면, 조금씩 만년필 끝에 마음이 모아진다. 다 쓰면 그것으로 끝이다. 탈고하거나 다시 쓰지 않는다. 종이에 잉크가 스미는 그 순간, 한 글자 한 글자에 생명이 피어나고, 언어가 우뚝 일어선다. 이는 '쓴다'는 행위가 주는 원초적 쾌감임이 분명하다. (235쪽)




        히라마쓰 요코의 새 책. 이제 나는 이 분의 부지런한 독자가 되어 새 책이 출간되었다고 하면 무조건 사본다. 이번에는 어떤 소소하고도 깊이 있는 이야기들이 담겨 있을까 기대하면서. 이번 책은 부엌에 있는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제목 그대로 히라마쓰 요코의 손때가 잔뜩 묻은.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다시 제일 첫장으로 돌아가 목차를 펼치면 그녀의 부엌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쏴아 쌀 붓는 소리가 나는 넉넉한 양철 쌀통, 가족 모두 길들이는 시간이 필요했던, 그리하여 아주 깊은 물맛을 갖게 된 무쇠 주전자, 요리에 따라 달라지는 세계 각국의 냄비들, 우리나라의 돌솥까지. 정말 탐났던 베트남에서 산 모기향로는 연기가 피어나는 모습이 근사했다. 마루가 있는 옛날집에 모기향이 솔솔 피어오르는 여름밤 한 켠을 상상해봤다. 꽤 비싼 고등어초밥을 교토에서 사와 초밥이 담겨 있던 나무통에 버터를 담아 쓰기도 한다.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사온 차통은 손때가 묻을수록 근사해진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언젠가의 다음 여행에서는 꼭 생활용품을 사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기념품 말고, 생활용품. 자그마한 그릇이나 그곳에서만 살 수 있는 향신료, 편안한 수저 같은 것들. 그것들이 내 손때를 타며 그 곳의 추억에 이 곳의 추억을 더해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어떤 것으로 깊어질 수 있게. 봄이가 파리에서 사와 선물해준 저 파란 접시처럼. 저 파란 접시를 꺼낼 때면 봄이가 경험한, 나는 가보지 못해 그저 상상하는, 그 여름 파리가 생각난다. 


    * 손때 : 1. 오랜 세월을 두고 매만져서 길이든 흔적. ~가 타다. 2. 손을 대어 건드리거나 매만져서 생긴 때. 손끝. (민중 엣센스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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