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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서재를쌓다 2019. 2. 27. 22:01



       좋아하는 티비 프로그램 중에 <방구석 1열>이 있다. 방구석처럼 꾸며놓은 세트장에 앉아 영화를 소개해주고, 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누는 프로그램. 나는 이 프로그램의 애청자인데, 밤이 오지 않는 어떤 밤에는 이미 봤던 회인데도 그냥 틀어놓고 소리만 듣다 잠들기도 했다. <스포트라이트>라는 영화가 있다. 가톨릭 신부들의 아동성추행 사건을 파헤치는 보스턴 글로브 취재팀의 이야기인데, 나는 이 영화가 참 좋았다. 무료 영화일 때 여러번 봤다. 묵묵히 자신이 맡은 바를 취재해가는 팀원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안정이 되었다. <스포트라이트>를 다룬 회에 임필성 감독이 나와 이 영화를 참 좋아해서 여러 번 보았다는 말에 격한 공감이 됐다. 얼마 전에는 <빌리 엘리어트> 편을 봤는데, 역시 참 좋았다. 영화도 좋고, 그 영화를 가운데 두고 나누는 이런저런 이야기들도 좋고. 제일 기억에 남는 대화는 빌리가 천신만고 끝에 로얄발레학교 면접을 보고, 합격 불합격 여부가 담긴 통지서를 받아든 장면의 이야기였다. 빌리는 우편물을 받아들고 자기방으로 들어간다. 혼자 조용히 보기 위해서. 가족들은 기다린다. 시간이 충분히 지났는데도 기척이 없자 문을 열어본다. 빌리가 의자에 푹 파묻혀 울고 있다. 가족들은 불합격한 줄 알고 위로의 말을 건네는데, 빌리가 잠시 흐느끼다가 합격했다고 말을 한다. 이 장면을 두고 빌리는 이런 성격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기쁨이 왔을 때 주체하지 못하고 바로 배출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그 기쁨을 보고, 느끼고, 내 속에서 충분히 체화한 뒤에 발설하는 스타일. 그런 시간이 꼭 필요한 스타일. 나는 이 책 또한 그러한 사람의 책이라고 생각했다. 최혜진의 <북유럽 그림이 건네는 말>. 


       이 책에서 제일 좋은 부분은 책의 시작에 있는 '작가의 말'이다. '작가의 말'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좋았다. 두근두근 설레이는 마음으로 이 책을 첫 페이지로 안내해주었다. 늘 (지금도) 북유럽으로의 여행을 꿈꿨는데, 잘한 일인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북유럽은 생각했던 것만큼 춥고 (추운 것 좋다!),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일상의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최혜진 작가는 오직 그림을 보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는데, 내게도 작가의 그림같은 여행의 동기이자 목적이 있었으면 좋겠다. 일상을 열심히 살아가며 그것을 찾아갈 예정. 묘지를 가는 것 또한 좋았는데, 바르셀로나에서 두 번의 묘지를 방문했던 기억이 특별하고 묘해서 계속 생각이 난다. 정말 좋았던 구절이 있었는데, 책이 어디로 달아났는지 찾을 수가 없네. 결론은 아무래도 이 작가를 계속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것.서둘러 표현하지 않는, 속이 꽉- 찬 빌리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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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의 중심부에 제대로 도착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있다. 먼 곳을 보기 위해 떠나서 가장 가까운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돌아온다. 이런 여행은 자국을 남긴다.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지 않고 오히려 선명해져서, 결국 한 시를 닫고 새로운 시기를 여는 경계석이 된다. 

    - 9쪽


       "너는 이 세상에 너랑 나 단둘밖에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거든."

       집중해서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머지 세상이 신기루처럼 스르륵 사라지고 대화하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온기와 교감으로 조그마한 소행성을 만드는 신비를 경험할 수 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말할 때도 몰입감을 빼놓을 수 없다. 처음부터 글이 술술 써지면 정말 좋겠지만 책상에 앉기까지 마음에서 온갖 번뇌가 인다. 쓰기 전에는 늘 괴롭다. 도망가고 싶다. 여차저차 겨우 한 줄을 쓰고 나면 앞의 문장이 다음 문장을 불러오고, 그 문장이 또 다음 문장을 불러온다. 점점 호출 속도가 빨라지는데 어느 순간이 되면 시간도 잊고, 어제 일어난 쪽팔린 사건도 잊고, 내일 보내줘야 할 기획안 걱정도 잊고, 잘 썼네 못 썼네 잘잘못을 따지는 내면의 비평가도 잊는다. 세상이 점점 하얗게 바뀌면서 오로지 글과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순간에, 나는 행복하다. 나머지는 다 괴로운데 이것 하나가 좋아서, 어쨌든 글쓰기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다닌다. 

    - 42-43쪽


       크로그가 밀려난 사람들의 고통에 깊이 이입했기 때문에 나 역시 작품을 보며 빵을 향해 간절히 손 뻗는 군중 속 한 명의 자리로 건너간다. 그들 속에 있어본다. 상상한다. 이윽고 질문한다. 내 주변에는 이런 일이 없을까? 눈에 띄지 말 것을 강요받는 사람들이 정말로 없을까? 나도 혹시 제복 입은 사내처럼 모른 척, 안 보이는 척 태연하게 거리 두기를 하고 있진 않은가?

    - 53쪽


       망상증에 시달렸던 천재 화가 P.S. 크뢰위에르가 그린 작품 중에는 하얀 드레스를 입은 두 여성이 스카켄 해변을 걷고 있는 뒷모습을 포착한 '스카겐 해변의 여름 저녁'이란 작품이 있다. 왼쪽 여성은 아나 안셰르, 오른쪽 여성은 마리 크뢰위에르다. 관습과 싸우며 예술가로 살기를 선택했던 여자와 사랑에 모든 걸 걸기로 선택했던 여자. 이들의 녹록지 않았던 생애가 하늘거리는 하얀 드레스 자락에 포개져 알 수 없는 비애감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또한 생각하게 된다.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지가 그의 생애의 범위를 결정한다고. 우리는 결국 믿은 만큼 하는 것 아닐까 하고. 

    - 59쪽


       1899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북구와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들' 전시에서 노르웨이 화가 크리스티안 크로그는 이렇게 말했다. "북구와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들'이라는 전시 제목은 잘못됐습니다. 오직 프랑스 화가들만이 진정한 의미의 인상주의 화가라 할 수 있어요. 북유럽 화가들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많은 걸 배웠습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 오직 색채와 명암만 볼 용기를 배워오지 않았습니다." 북유럽 화가들은 망막에 남은 인상보다 마음에 느껴지는 감정 표현에 더 관심이 많았다. 또한 보편성을 늘 염두에 두면서 주관성을 추구한 덕분에 일부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처럼 차가운 관념의 덫에 걸리지 않았다. 

    - 70쪽


       어안이 벙벙했다. 그저 끌림이 이끄는 대로 발을 똈을 뿐인데 온 세계가 기다렸다는 듯 반응하며 문을 벌컥 열어주는 느낌. 힘껏 사랑하려 노력할 때 벌어지는 고요한 기적을 스카겐은 내게 선물해주었다. 

    - 81쪽


      목소리를 단단히 여미고 H에게 일러줬다. 

      "밥을 잘 챙겨 먹는 것도 자기를 돌보는 거예요. 입으로 들어가는 건 좋은 걸로 골라 먹어요. 라면 같은 걸로 때우지 말고."

       "마음 서성대면서 새벽까지 깨어 있지 말고, 잠을 자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도 자기를 돌보는 거예요."

       "기분이 우울하고 마음이 힘들 때 집에 혼자 있지 말고, 나가서 햇빛이라도 쬐어주세요."

       "술에 기대지 마시고요."

       "어떤 감정을 너무 오랫동안 끌어안고 있지 마세요. 에이, 그냥 잊어버릴래, 하고 털어내려 노력하는 것. 그것도 나를 돌보는 거고요."

       "외로우면 외롭다고 징징거리기도 해야 해요."

       이런 사소한 방법도 몰라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질문이라고 내뱉을 수밖에 없는 H가, 그리고 그 시절의 내가 안쓰러워 지침을 늘어놓다가 목울대가 점점 뻐근해졌다. 그날 밤, 집에 돌아와 연거푸 와인을 마셨다. 싸리비로 누가 쓸어대는 것처럼 마음이 서걱서걱했다. 밤이 지나고 다시 돌아온 아침. 신선한 야채를 갈아 마셨다. 밤사이 굳은 근육 곳곳을 공들여 풀었다. 공원에 나가 걸었다. 심호흡을 길게 했다. 

    - 96-97쪽


      당연하게 누리던 생, 믿어 의심치 않았던 현실을 기어코 다르게 보게 만들었다. 종국엔 우리가 떠나고 남을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편지꽂이를 가득 채운 안부를 주고받는 살가운 마음, 닮고 싶어 안달했던 작가의 책과 글, 별것 아닌 작디작은 수집품과 추억, 오래 기억하고 싶은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

       이 삶의 증거들이 정말로 부질없다고 누군가 말해버린다면, 서운해서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 106-107쪽


      아카데미 시절에 이미 채색과 삽화 등 각종 아르바이트로 본인은 물론 부모님 생활비까지 해결할 정도로 테크닉이 탁월했지만, 졸업 후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데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여느 초년생처럼 칼 라르손 역시 좀처럼 작가로서 자기 확신을 갖지 못했다. 일명 '화가들의 마을'로 불리는 프랑스 바르비종에서 2년이나 머물며 작업했지만 아무런 성과가 나지 않아 좌절한 시기도 있었다. 작은 일에 쉽게 흔들리고, 생각이 많고, 당장 성과가 나오지 않으면 자학에 빠지고, 수줍음 많이 타던 그는, 그림 공부를 위해 떠났던 프랑스 파리 근교 그레 쉬르 루앙에서 스웨덴 출신 화가 지망생 카린 베르게를 만나고 정서적 안정을 느낀다. 카린과의 결혼 후 비로고 수채화에 정착해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며 미술계의 이목을 처음으로 받게 되었고, 1883년에는 파리 살롱전에서 입상하고, 1884년에 첫 아이 수사네가 태어난다. 

    - 144쪽


        어떤 여행지를 꿈꾸게 되는 계기는 사실 사소할 때가 많다. 잡지를 뒤적이다 본 한 장의 사진, 인터넷 서핑을 하다 발견한 몇몇 구절, 지인에게 들은 짧은 정보에서도 동경은 싹튼다. 어느 날, 우연히 인터넷에서 뭉크의 그림 100여 장을 몰아서 보았다. 누군가의 내밀한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몰래 훔쳐보는 느낌에 볼이 붉어졌다. 이렇게 날것까지 기록해놓다니, 정말 뭉크에게 예술은 스스로를 위한 일기였구나, 일기! 일기에 대해서라면 나도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 2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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