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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포르투갈, 단 한 권의 책
    여행을가다 2015. 8. 26. 21:44

     

     

     

     

     

       처음엔 페소아의 <불안의 서>를 제본해 갈까 했다. 8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니 7권 정도로 제본을 하고 하루에 한 권씩 들고 다니면 좋을 것 같았다. 고작 서문을 읽었는데, 너무 좋아서 황홀할 지경이었으니. 포르투갈에서 포르투갈 시인이 쓴 글을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봤다. 결국 게으른 나는 제본할 곳을 찾지 못했다. 두꺼운 책은 서울에서 천천히 읽기로 했다. 요시다 슈이치의 <요노스케 이야기>를 주문하기도 했다. 혼자 잘 해내가는 이야기를 읽고 싶었는데, 이 소설이 그런 이야기인 것 같았다. 곡예사 언니랑 언젠가 이 책 얘길 했는데, 언니는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 중에 이 책이 제일 좋다고 했다. 나는 나 안 읽었나봐요 기억이 안 나요, 하니 언니가 너도 분명 읽었을 텐데, 했는데. 이번에 주문하면서 보니 내가 주문을 했던 책이었다. 그 책은 어디로 간 걸까. 읽은 기억은 또 어디로 사라져 버린 걸까. 시집도 챙겼다. H가 읽다가 인스타에 올린 사진을 봤는데, 그 시가 너무 좋아서 시집 제목을 묻고 냉큼 구입했던 시집이었다. 그리고 이 책. 시옷의 모임 네번째 책. 내가 고른 책. 좋다는 이야기들이 많아 사두었던 책. 때를 기다리며 우리집 책장에서 조용히 견뎌 주었던 책. 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

     

       아, 음악도 가득 담아갔다. 친구들에게 추천을 받아서, 멜론 30곡 다운로드 결제를 하고 가득 담아갔다. B는 서울전자음악단의 '꿈이라면 좋을까'를 추천해주며 자기 전에 꼭 들으라고 했다. 동생의 작은 스피커를 가져갔다. 음악을 틀고,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눕고, 눈을 감으면 내 앞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니 평생 봐 온 것 같은 별들이 반짝였다. 폭신한 밤길을 기분좋게 혼자서 걷는 느낌이었다. 아침을 맞이할 때, 밤을 보낼 때 어김없이 음악을 들었다. S가 노래방에서 부른 노래를 찾아보다 좋아하게 된 자우림의 노래들도 내게 힘이 되어줬다. 담아간 음악은 여러 번, 모두 들었지만, 책은 이것만 읽었다. 169페이지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환상의 빛'이다."로 끝나는 책. 네 편의 이야기가 있었다. 어떤 부분은 슬펐고, 어떤 부분은 아름다웠다. 어떤 부분은 쓸쓸했으며, 어떤 부분은 다행이었다. 외롭고 쓸쓸했지만, 우울하지 않았다. 그게 꼭 포르투갈에서의 나 같았다. 그래서 이 한 권만 읽은 게 더 좋았다. 어떤 다른 이야기와 섞이지 않은 이번 여행의 감정이 고스란히 이 한 권에 담겨 있다.

     

       그곳에서 내가, 귀퉁이를 살짝 접어놓은 부분들.

     

        "배가 아파."

        하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왜 그런지 견딜 수 없을 만큼 슬퍼졌습니다. 초경이 무서웠던 게 아닙니다. 저는 그때 가난이라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원망했던 것입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는 국도로 사라진 할머니의 조그마한 뒷모습이나 막벌이꾼에게 엉덩이를 걷어차이던 어머니의 모습이, 한낮인데도 전구를 켜지 않으면 안 되는 축축한 방 가득히 되살아났습니다. 저는 장지문을 쾅 닫고 피가 굳어서 딱딱해진 팬티를, 스커트 위로 언제까지고 꼬옥 누르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달거리가 시작될 때는 어김없이 이유 없이 썰렁해지고 쓸쓸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도, 아마 초경이 있었던 순간, 파친코점의 냉방으로 얼음처럼 차가워진 땀에 절어 있었던 탓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 p.31, 환상의 빛

     

       울면서 아야코는 견딜 수 없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아무것도 아닌 휑뎅그렁한 들판에 홱 내던져진 듯한 쓸쓸함이, 꽉맨 오비 위로 아야코의 몸을 더욱 조여 왔던 것이다. 자신은 이렇게 남자 앞에서 하염없이 울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다는 생각도 했다. 무엇보다도 부부생활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 번도 자신이 남편을 원했던 적이 없다. 이혼하고 나서도 그런 쓸쓸함을 느낀 적은 없다. 자신은 여러 가지 점에서 담백한 여자인 것이다. 그래서 슈이치까지 죽게 했다. 맥락도 없는 그런 생각이 한꺼번에 분출해서 아야코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유조와 단 둘이 앉아 있는 것이 지금의 아야코를 한층 더 애달프게 했는지도 몰랐다. 아야코는 일어나 잠자코 옆방으로 갔다. 오비를 풀고 기모노를 벗고 갈아입을 원피스를 든 채 잠시 멍하니 방 한구석에 시선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아내가 입원해."

    - p.94, 밤 벚꽃

     

       갑자기 목덜미가 화끈 달아올랐다. 따스한 날씨인데도 목에서 뺨에 걸쳐 피가 거꾸로 오르는 증세는 허리나 장딴지나 발끝의 열을 빼앗았다. 슈이치의 사고 이래 달거리의 징후도 불규칙해졌고, 세 달쯤 전에 희미한 것이 있었을 뿐 그것으로 뚝 그쳐버렸다. 그런 나이이기도 했지만 아야코는 자신 안에 뭔가 살아 있는 것이 소실되어간다는 불안과 초조를 느꼈다.

    - p. 103, 밤 벚꽃

     

       그것은 확실히 울음소리였다. 닫힌 칸막이 커튼 너머에서 노인이 울고 있었다. 나는 놀라 가만히 귀를 귀울였다. 열차의 진동이나 어딘가에서 흘러 들어오는 희미한 목소리에 섞여 숨죽여 우는 노인의 울음소리는 언제까지고 계속되었다. 통절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슬픔을 느끼게 하는 낮고 긴 울음소리였다.

    - p. 154, 침대차

     

       쿵 하고 큰 소리를 내며 열차가 멈췄다. 신호를 기다리는 듯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노인의 울음소리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나는 커튼 쪽으로 등을 돌리고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다시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는 불규칙한 율동에 몸을 맡겼다. 노인의 울음소리가 끝난 것으로 일단락된 듯,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잠깐 자고 난 것 같았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눈을 뜨자 이른 아침의 눈부신 햇살이 유리창을 통과해 차 안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 p. 163, 침대차

     

     

       덧, 포르투갈에서 내내 들었던 자우림의 '반딧불' 이 너무너무 좋아 통화연결음으로까지 설정해놓았는데, 늦은밤 연락이 되지 않는 언니를 찾는다고 여러 번 전화를 했던 동생들이 다음날 일제히 말했다. 당장 바꿔. 귀신 나오는 줄 알았어. 내가 좋아하는 노랜데? 내 취향을 무시하는 거야? 핏대 올리며 싸웠는데, 다음 날 조심히 들어보니 무섭더라. 당장 바꿨다. '반딧불'은 화창한 여름 낮에 듣는 걸 추천합니다아. 그러면 분위기 좋은 여름밤이 기분 좋게 떠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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