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Fine Day

from 극장에가다 2008. 8. 20. 18:17

 요즘 매일 틀어놓고 잠든다.
채 10분도 못 보고 잠들어버리지만.
다음 날엔 지난 밤 보다 잠들어버린 뒷부분을 틀어놓고 잔다.
순전히 영화 속 비 때문이다.

한때 미셸 파이퍼의 요술 가방을 탐내곤 했다.
필요할 때면 툭툭 쏟아지는 우비며 과자며 장난감 차라니.
 정말 멋진 가방이야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런 가방은 그야말로 어깨 뽀사질 것이다.

내게 이런 잠자리 영화들이 몇 편 있다.
우울한 밤이면 수면제로 꽤 효과가 있다.

저 장면은 영화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장면.
하루종일 비가 오는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는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뽀송뽀송한 옷으로 갈아 입고 난 후
배불리 먹고 잠드는 노곤한 밤.
빗소리와 티비 소리에 조곤조곤한 밤.

구름이 잔뜩 낀 날씨를 좋아하는 내게
이 영화는 그야말로, 어느 멋진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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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웅- 이게 뭔 징소리여. 촌스럽게 영화 시작하면서 징소리는 뭐다냐' 식의 추임새부터 시작해서 '입소문 좀 많이 내 주소. 요즘 그런 말 하면, 아이쿠 인터넷에 악플이 얼마나 무서운줄 모르는겨, 얼른 와. 그기 뭐가 어때서' 식의 추임새로 막을 내리는 영화. 두둥- 영화 <스페어>를 보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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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강추. 시사회에 당첨됐는데 몸 상태도 안 좋고, 날씨도 너무 더워서 신촌까지 갈 엄두가 안 났다. 그래서 갈까말까 일백번 망설이다가 결국 갔다.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도착해서 봤는데, 안 왔으면 후회할 뻔 했다. 오길 잘 했단 생각을 영화보면서 한 열 번쯤 한 것 같다. 영화로 말할 것 같으면 액션영화인데 내가 싫어하는 잔인하고 무자비한 욕설이 난무하지 않는다. 신명난다고 해야할까. 아, 이 영화의 배경음악은 거의 우리 악기로 만들어졌다. 징, 꽹과리, 가야금(이건 나중에 크레딧에서 발견했다), 아쟁(왠지 있지 않았을까. 좋지 않은 귀라 직접 확인하진 못했지만) 등등. 거기다 영화 중간중간 강원도 사투리 쓰는 두 남자가 가려운 곳을 빡빡 긁어준다.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면서 들 생각들을 먼저 선수쳐서 이야기해주는 형식이랄까. 그러니까 관객 입장의 나래이션. 이 영화가 판소리라면 두 사람은 추임새. 웃길려고 한 말임이 분명한데 안 웃긴 대목들도 있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얼씨구,라고 그 추임새에 추임새를 넣고 싶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면, 마지막 크레딧 올라갈 때 얼씨구, 그런데 이 영화에 여자가 한 명도 안 나온 게 좀 그렇네, 라는 식의 추임새에 내가 절씨구, 그러게. 그런데 그래서 더 재밌었던 것 같구먼, 이라고. 그러니까 이 영화는 전체적으로 판소리 모양새를 갖추고 신명나게 한번 웃어보세, 놀아보세, 즐겨보세, 라고 한다. 그러니 관객들은 웃고, 놀고, 즐기면 된다. 편하게.


 
이 분이 토끼길도


   영화에 대해서 더 자세히 이야기해보자면 이건 별주부전, 그러니까 일본 사람들을 알리 없는 토끼전의 신명나는 한 판 놀이다. 작자 미상의 조선 후기의 판소리인 별주부전은 용왕의 병을 낫게 하고자 자라가 육지에 사는 토끼 간을 찾으러 가는 긴 여정을 그렸지만, 2008년의 新별주부전, <스페어>의 이야기는 이렇다. 일본의 야쿠자 보스의 간을 찾으러 중간 보스 사토오는 서울에 사는 특별활동 에이치알이 아닌 알에이치 마이너스의 피, 희귀한 보스의 간을 찾아 한국에 사는 광식이 동생 광태가 아니라 길도 불알친구 광태를 찾아온다. 광태는 별주부전 잔머리의 귀재, 토끼가 아니다. 그는 귀여운 마스크에 액션을 열라 잘하는 착하고 다만 노동을 싫어하는 청년일 뿐. 토끼는 여기 있다. 잔머리의 귀재, 길도. 길도는 광태에게 너의 간을 내 주면 용궁의 벼슬이 준다는 말 대신 너의 간을 내 주면 너의 빚 8천만원을 아주 깨끗하게 갚아주리라, 너는 이제 새 삶을 살게 되리라, 고 꼬신다. 능글맞게. 일본에서 온 별주부전 따위는 전혀 모르는 사토오는 당연히 자라다. 충직하고 우직하고 조금은 아둔한 신하. 아, 나같으면 일단 8천만원 해결해주고 데리고 갈텐데, 넌 야쿠자잖아, 돈 더 있을 거잖아,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사토오는 나는 다 지불했다, 만 반복한다. 그러니까 자라는 서울에서 용왕의 간 이식 대상자인 광태를 데려가야 하는데, 요 능글맞은 토끼때문에 채무관계가 해결되지 않아서 곧장 일본으로 건너가질 못한다. 광태를 토끼를 잡으러, 자라는 광태를 잡으러 쫓고 쫓기는 고군분투 중에 피어나는 웃음이랄까. 아무튼 이게 2008년 新별주부전의 대강의 스토리. 그 사이에 멍텅구리 사채업자 명수도 있고, 무늬만 쌍둥이도 있고, 인간적인 마스크의 종일이도 있고, 잘 생긴(!) 카고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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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자라사토 


   이 영화를 '광태의 간', '야쿠가', '야쿠록', '광태, 길도 야쿠입전', '길도생전'로 바꾸어 부를 수도 있겠다. 별주부전의 오랫동안 전해온 명성과 사회풍자적인 면모를 비교해봤을 때 <스페어>는 보잘 것 없지만, 확실한 건 98분의 토끼전의 형식을 한 이 이야기가 꽤 재밌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게 뭐야, 식의 이 사이로 새어나오는 바람소리에서 시작해서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에는 아주 크게 깔깔거리면서 웃고 즐길 수 있다는 것. 나도 모르게 일반 시사회장에서 박수를 치려고까지 했다는 것. 액션이 시원시원하고 극악스러운 면이 없어 좋다는 것. 배우들의 연기가 무척이나 훌륭하다는 것. 캐스팅이 아주 잘 됐다는 것. <스페어>가 첫 영화인 이상한 감독의 다른 작품이 벌써 기대된다는 것. 배우를 비롯해 감독, 프듀서가 참으로 착하다는 것. 무대인사에서 프로듀서는 큰절을 했고, 영화가 끝나고 나가는 길에 감독과 프로듀서가 나란히 서서 계속 인사를 했더라. 토끼와 광태, 두 배우는 관객들에게 환한 미소를 띄우며 열심히 함께 사진을 찍어줬다. 사실 처음에 무대 위에 올라와서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며 큰 절까지 했을 때는 얼마나 영화에 자신 없었으면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보니 그건 자신감이 없는 게 아니라 이 영화에 대한 끝없는 애정의 표시였다. 힘들고 어렵게, 그러나 꽤 잘 만들었으니 많은 사람들이 보아주었으면 하는 만든이의 마음. 그게 내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쾌 발랄광태


   흠 감상포인트는 그저 편하게, 웃고 즐기기. 그거면 된다. 두둥- 끝. 너무 칭찬 일색인 거 아닌가. 그러다 알바라고 오해받지. 몰라. 그냥 재밌게 봤으니깐 재밌다고 하는것이여. 끝. 얼른 가. 그기 좀 마음에 걸리는데. (퍽) 진짜 끄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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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스 레저가 등장했다. 그는 화장을 하고 다녀. 사람들에게 겁주려고. 히스 레저의 이야기다. 아니, 그가 맡은 조커의 이야기다. 새하얀 분칠을 하고 새까맣고 짙은 눈화장을 드리우고 흉터부위를 따라 새빨갛게 칠한 입술. 꼬들꼬들한 컬의 머리카락. 히스 레저의 모습이다. 아니, 그가 맡은 조커의 모습이다. 그가 그렇게 처음 등장했을 때, 커다란 총으로 같은 일(?)을 하는 동료를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면서 가면을 벗으며 등장했을 때, 나는 예상했던 것처럼 슬펐다. 그는 이제 이 땅에 없는 사람.

   그래서 우스꽝스러운 조커의 분장때문에 사람들이 낄낄거릴 때 나는 그 커다란 극장에서 벌떡 일어나 외치고 싶었다. 여러분, 보세요. 히스 레저잖아요. 전혀 우스꽝스럽지 않잖아요. 저 슬픈 모습을 봐요. 울고 있어도 웃는 커다란 입술을 가진 얼굴을 봐요. 새까만 눈화장 안에서 고통스럽게 빛나는 눈동자를 봐요. 히스 레저예요. 저 영화에 몰입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약으로 연명한 가엾은 히스 레저라구요. 저렇게 조커역할을 소름끼치게 잘 해내고 있는데 이제는 더이상 그의 새로운 연기를 볼 수 없는 지독하게 안타까운 사람, 히스 레저라구요. 저렇게 슬픈 얼굴 본 적 있나요.
   
   생각해보니 나는 영웅을 그린 시리즈 영화를 거의 보지 못했다. 다들 배트맨이며 슈퍼맨에 열광했을 때 나는 뭘 하고 있었던 걸까. 박쥐의 형상으로 밤하늘을 날아다니고, 가슴팍에 S자를 새겨넣고 오른팔을 바짝 뻗어 팬티차림으로 구름 위를 날아다닌다는 것. 손목 끝에서 거미줄이 나오고, 악한 사람을 때리고 착한 사람을 구한다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시리즈물의 전부다. 아, 슈퍼맨은 가장 최근 걸로 극장에서 보긴 했다. 토비 맥과이어의 스파이더맨도 극장에서 1편을 보긴 했다. 케이블에서 2편을 조금 본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기억을 더듬어보니 내가 온전하게 극장에서 배트맨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건 <다크 나이트>가 처음이다. 그래서 나는 배트맨에 대해서는 조금 실망했긴 했다. 물론 영화는 대만족이었지만.

   나는 배트맨도 스파이더맨이나 슈퍼맨처럼 손목 끝에서 거미줄이 나오거나 오른쪽 팔을 뻗으면 지구 위를 무한정 날아다닐 수 있는 영웅의 태생적 기술 하나쯤 있는줄 알았다. 그런데 내가 처음 본 배트맨, <다크 나이트>의 배트맨은 근육만 튼실튼실한, 강인한 체력에다 기계에 의존하는 한낱 배트'맨'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그는 늘 자신이 더이상 활동하지 않는, 배트맨이 없는 도시를 꿈꾸고 있었다. 의상의 색깔도 타고 다니는 차의 색깔도 어둠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검정색. 검정색 가면 뒤에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며 이제 배트맨 일은 그만해도 좋으니 이 도시가 평화롭기만을 바라는 영웅이 되고 싶지 않은 영웅. 사나운 개에게는 꼼짝없이 당하는 배트맨은 다른 영웅들과는 달리 '인간'적이었다. (검색해서 보니 배트맨은 어린시절에 부모님이 총격을 당해 죽는 모습을 눈 앞에서 보았단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고 배트맨이 된단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각종 장비와 사람을 구해 배트맨이 되었다는. 가엾은 아이구나. 아, 그래서 조커도. 아, 아. 그런 거였구나.)
       
   영웅시리즈를 꼼꼼하게 챙겨보지 못한 나는 최근에 관람한 몇 편의 영웅을 그린 영화들을 보고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는데, 그건 재미거리로만 생각했던 영웅영화에서 사소하고 평범하지만 진중한 철학적인 물음들과 직면했을 때였다. <다크 나이트>에서도 나는 이런 물음과 직면했다. 히스 레저의 조커가 묻는다. 왜 다들 행복한데 나만 이렇게 불행해야 해? 그를 꼭 닮은 투페이스가 묻는다. 왜 다들 무사한데 나만 이런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하냐고! 그건 조커의 과거, 투페이스의 현재에 해당되는 질문이다. 왜 내가 무시무시한 악당이 되어야만 하는지. 왜 내게만 불행이 찾아오는지. 왜 나는 울고 싶어도 내 입이 울지 못하는지. 왜 나만 하이드의 반쪽 얼굴을 가져야만 하는지.

    조커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섬뜩한 칼을 들이대면서 말한다. 내가 어떻게 이 흉터를 가지게 됐는지 말해줄까. 엄마를 내가 보는 앞에서 죽인 아빠가 나를 보고 왜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냐고 웃으라고. 또 있잖아. 내 아내였던 사람이... 그는 웃으라고 만들어준 흉터때문에 항상 웃고 있는 사람이지만, 웃을 수 없는 사람이다. 그 흉터때문에. 너무 깊어서. 너무 따끔거려서. 눈물을 흘리면 금방 짙은 눈화장이 번져버리는 불쌍한 사람. 입때문에, 눈때문에 울지 못하지만 늘 울고 있는 사람. 도시 전체가 자신이 그렇듯 서로를 미워하고 불신하고 폭력적이 되어 날뛰기를 바랬지만 그러지 않았을 때 그가 고개를 오른쪽으로 5도 까닥이며 그럴리가 없다고 슬픈 표정으로 펄펄 뛰며 깔깔 웃던 가여운 사람. 세상에 거꾸로 매달려 내 불행이 너희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전이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낄낄대는 사람. 웃을 수 없는 사람. 울 수도 없는 사람. 악당이 엉엉 울어버리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니까. 그는 그저 더럽고 쳐죽여야 마땅한 놈이여야만 하는데. 그런데도 나는 히스 레저가 이 영화가 끝나기 전에 갑자기 엉엉 울어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아니, 그래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종일관 낄낄대면서 어깨 위에 조커의 짐을 가득 얹어 커다란 그가 구부정해보였는데 나는 그 모습이 참 슬펐다. 그가, 고담시의 최고 악당인 그가 엉엉 울어버린다면, 나도 그를 따라 이따위 세상 뒤져버리라고 엉엉 울어버리려고 했지만 그는 최고 악당인 주제에 울 수는 없었다. 그가 울지 못했기에 나도 울지 못했다.

   그리고 그를 닮은 다른 사람. 세상을 믿었으나 세상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믿는 사람도 있었다. 이건 사실이다. 이 세상엔 무능한 사람투성이니까. 경찰도 배트맨도 자신이 온전히 신뢰하는 세상을 지켜주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늘 동전을 던진다. 세상을 믿을 적에 그의 동전은 양면 모두 앞면이었지만, 세상을 저버린 후 그의 동전은 앞과 뒤가 다른 동전으로 바뀌었다. 죽거나 살거나,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배트맨이거나 조커이거나. 그는 조커의 여린 과거였다.

    이 영화는 말할 것도 없이 조커의 영화다. 배트맨은 조연일 뿐. 그러니 이 영화는 말할 것도 없이 히스 레저의 영화다. 히스레저의 유작. 그의 생전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가 한 편 더 남아 있지만, 그건 온전한 그의 마지막 작품은 아니므로. 그가 '끝까지' 마쳤던 영화는 <다크 나이트>이므로. 이런 역할을 배트맨 의상처럼 그대로 떼어내어 자신의 몸이며 영혼에 붙이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서 그는 최고였다. 나는 잭니콜슨의 조커를 보지 못했지만, 히스 레저의 조커가 최고라는 데 동조한다. 그는 이 작품을 남기고 이 땅에서 사라졌으니까. 정말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며 보는 영화는 내내 슬펐으니까. 조커는 슬픈 사람이니까. 그는 최고의 조커다. 틀림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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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김연수 지음/작가정신


   영화 <섹스앤더시티>를 보러 가는 내
가방 안에 김연수의 <사랑이라니, 선영아>가 들어있었다. 나는 작가 김연수에 빠져들고 있는 중이였고, 그건 내가 읽은 그의 네번째 책이었다. <사랑이라니, 선영아>은 이렇게 시작한다. '모든 건 팔레노프시스 때문이었다고 광수는 생각했다.' 소설의 주인공인 광수는 자신의 결혼식날 신부의 부케 속 줄기가 부러진 팔레노프시스를 보곤 마음이 복잡해진다. 왜 멀쩡한 팔레노프시스가 꺾여졌는가. 왜 하필 내 아리따운 신부가 예전에 끔찍히도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의 친구인가.

   영화를 보면서 내내 그 문장을 생각했다. '모든 건 팔레노프시스 때문이었다고 광수는 생각했다.' 왜 티비에서는 꽤 근사해보였던 40대 섹스앤더시티 언니들의 과도한 메이크업이 커다란 스크린 위에서는 그리 거북했는지를 1시간 넘게 골몰했던 극장 안 내 머릿속에서 그 문장이 끊이지 않고 떠올랐는가. 캐리가 언제나 그렇듯 덩치에 안 어울리게 비겁한 빅에게 팔레노프시스는 아니더라도 화려한 부케를 휘둘러 산산이 부서진 꽃잎을 아스팔트 위에 흩뿌릴 때도 나는 그래, 팔레노프시스 = 부케 때문이야, 라고 생각했다. 그건 내게 생소한 꽃의 이름, 팔레노프시스라는 단어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영화가 끝나갈 무렵에 깨달았다. 그건 단어 '팔레노프시스' 때문이 아니라 '모든 건 A 때문이었다고 B는 생각했다' 라는 문장 전체 때문이었다는 걸.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결국 결혼에 실패한 건 (아니, 화려한 결혼'식'에 실패한 건) 전날 파티에서의 일을 제대로 말해주지 않은 미란다때문이라고 캐리는 생각한 거다. 뭐. 그런 식으로 이어지자면 진작에 솔직하게 말하려고 했던 미란다에게 그건 옳지 않는 방법이라며 저지했던 샬롯때문에 미란다는 그렇게 행동한 거다. 돈도 많고 기름기 넘치게 여유롭지만 늘 캐리 앞에서는 비겁하기 일쑤였던 빅에게도 할 말은 있을 거다. 이 모든 건 덩치에 맞지 않게 떨리는 마음을 진정할 수 없었던 결혼식 아침 캐리가 전화를 받아 괜찮아, 우리 완벽해, 라고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고 빅은 생각할 거다. 뭐든지 그런 식이다. 캐리네 사람들은. 그리고 그건 스크린 바깥 우리네 사람들도 마찬가지. 늘 그건 그 사람, 그것때문이라고 말하지만 결국 원인은, 문제는, 극복해야 할 대상은 내 안에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는 거다. 그걸 발견하고 도려내고 미련없이 버려내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나는 어른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 서른이 된다고 해서 누구나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니듯. 어른이 되는 건 정말 심장(아니 신장 정도)을 도려내는 아픔을 견뎌내야만 하는 거다. 고개를 숙여 속을 들여다보면서 내 안에 이렇게 많은 '때문에'가 있다는 걸 인정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언니들이 돌아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언니들은 내게 실망감만 그득히 안겨주었다. 오직 사랑, 엘.오.브이.이만을 외치는 언니들은 정말이지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개봉날, 전석이 꽉찬 극장 좌석의 맨 뒤에 앉아서 캐리네 언니들을 올려다보며, 언니들을 보려온 수많은 여성들을 내려다보며 의심했다. 내가 그렇게 열광했던 브라운관의 섹스앤더시티는 어디갔느뇨. 브라운관의 언니들도 늘 이렇게 사랑만을 외쳤던가. 근사한 철학사상을 찾았던 건 아니었지만, 언니들은 늘 내게 30분을 넘기면 어떤 사소한 깨달음을 던져주었다. 늘 오르가즘을 느끼는 친구도 어머니를 잃은 친구에게 진정한 위로의 말을 건네기 전까지는 절대, 어떤 탄탄한 근육의 상대와도, 어떤 기묘한 자세로도 오르가즘을 느낄 수 없다는 걸. 포스트잇으로 이별의 메세지를 전하는 남자와 끝낸 후엔 거리에서 대마초를 피워도 눈 감아줄 경찰이 있다는 걸. 정말로 사랑했던 그 사람은 나와 기필코 결혼하려 했지만 그 사람은 결국 결혼이라는 안정적인 제도를 원했던 것이지 나를 원했던게 아니었다는 걸. 스크린 위의 언니들은 너무 늙어보였고, 너무 지쳐보였다. 사랑, 만을 정열적으로 외쳐대기엔 너무 많은 나이였다. 그 나이에는 사랑따위는 가뿐히 즈려밟는 여유가 돋보이는 건데 말이다.

   그리고 전혀 상관없는 영화 <섹스앤더시티>를 보는 동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사랑이라니, 선영아>에서 두 번 읽었던 구절.

   하지만 사랑이 끝나면 이 모든 가능성이 사라진다. 사랑의 종말이 죽음으로 비유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사랑이 끝나고 나면 우리는 원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가는데, 그러면서 무한히 확장됐던 '나'는 죽어버린다. 진우의 말처럼 한 번 끝이 난 사랑을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죽음은 비가역적인 과정이다. 사랑의 종말도 그와 마찬가지다. 확장이 끝난 뒤에는 수축이 이어지게 된다. 사랑이 끝나게 되면 우주 전체를 품을 수 있을 만큼 확장했던 '나'는 원래의 협소한 '나'로 수축하게 된다. 실연이란 그 크나큰 '나'를 잃어버린 상실감이기도 하다.

    56페이지에서 57페이지에 걸쳐진 이야기. 2003년의 김연수의 말이다. 소설에도 빅같이 비겁한 주인공이 등장하긴 한다. 아내의 예전 남자친구, 즉 자신의 친구와 아내가 잤느냐에 골몰하는 사내가. 결국 모든 건 꺽여진 팔레노프시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내가. 여전히 너무 아픈 이유로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나도 그대들도. 사랑의 기쁨도, 사랑의 아픔도 초월하는 근사한 어른이 되는 길은 너무 멀고 험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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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가 수목장 이야기를 하시는 걸 들었다. 작은 아버지는 그런 아빠에게 화를 내시고. 스치듯 그 얘길 들었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우리 모두 언젠가 맞이하게 될 죽음이건만 내 죽음보다 상상하기 힘든 건 내 부모의, 내 가족의, 내 친구들의 죽음이다. 내 죽음에 관한 생각의 끝은 언제나 덤덤한데, 그들의 죽음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저리다. 작은 아버지는 다같이 누울 땅이 이렇게 있는데 왜 자꾸 형님은 수목장 이야기를 하시느냐고 언성을 높이셨다. 그러니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나는 아빠가 수목장을 생각했다는 것보다 죽음에 대해 이리도 자세히 생각하고 계시다는 것에 마음이 쓸쓸해졌다. 내가 내 죽음을 생각하듯 아빠가 아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할텐데, 내 아비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도 금세 목이 메인다. 못난 자식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버킷리스트>를 보고 저렇게 유쾌하고 따뜻한 죽음을 내 아비가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건 영화고,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죽음을 앞에 두고 히히낙락할 자 어디 있으며, 그렇게 부자에 나를 위해 펑펑 돈을 써 줄 병실 친구를 만날 확률은 얼마나 희박하며, 히말라야 정상까지 목숨 걸고 올라가서 내 뼈를 묻어줄 비서가 어디 있겠는가. 그 나이에 스카이 다이빙하면서 심장마비 걸리지 않는 것도 말이 안되고. 나는 이 나이에 번지점프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오줌이 찔끔 새어나올 것 같은데. (내려가는 놀이기구들은 질색이다. 돈 내고 그 토나오는 걸 굳이 탈 필요는 없다는 성인이 되어서 비로소 깨달은 게지.) 그래도 내 주위의 누군가가 정말 영화같은 로또와 같은 행운을 맞아 저렇게 행복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나는 눈물 딱 한 방울만 흘리며 따스하게 그를 보낼 수 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의 죽음이 부러웠다. 그 모든 것을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누렸으면 더 좋았겠지만, 말년에 경험하는 피라미드 정상에서의 일몰은 더욱 아름다웠을테지. 대놓고 뻔하긴 했지만. 뭐. 요즘은 복잡한 일들은 뉴스에서 워낙 많이 보니깐 영화는 이런 뻔한 플롯에 따스한 영화들이 오히려 더 좋다. 어쨌든 해피엔딩은 찾아오게 마련이니까. 잭 니콜슨과 모간 프리먼의 연기를 본 것만으로도 만족스럽고.


    나는 아빠가 집만 그리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자라면서 아빠가 글과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더 자라서는 흙과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인 걸 알게 됐다. 언제부턴가 아빠는 집 근처 조그만 밭을 가꾸기 시작하셨는데 밭에 가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있다 오셨다. 가서 뭘 하시나 보면 잡초를 뽑고, 나무를 심고, 토끼를 기르고 (토끼는 결국 도망가 버렸지만), 물을 주고. 그리곤 가만히 의자에 앉아 계시는 거다. 가끔 나도 밭에 가서 배드민턴을 치고, 고기를 구워 먹고, 아빠 곁에 아무 말 없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바람 소리, 새 소리, 나무 소리, 귀뚜라미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리고 어둠이 찾아왔다. 어느 날은 아빠가 이건 다른 사람한테는 한번도 안 했던 이야기라며 우리 큰딸한테만 하고 말거라며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이야기도 슬펐고 내가 나이 들고, 아빠가 늙어 이런 이야기를 내게 들려준다는 사실도 슬퍼서 어둠 속에서 몰래 눈물을 훔쳤다. 그 순간, 정말 반딧불이가 나타났다.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 곁에 앉은 아빠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데 고 노랗고 환한 작은 불빛들이 바람을 타고 춤추고 있는 거다. 아, 너무 꿈만 같아서 또 눈물이 나왔다. 정말 영화같았다. 아빠와 나, 어두운 배경에 쏟아져 나오는 옛날 이야기, 그리고 반딧불이.

   작은 아버지와 아빠 이야기를 훔쳐 듣곤 결국 그리 안 될 걸 알지만 나는 아빠가 담긴 커다란 나무를 상상해봤다. 두 눈을 잔뜩 찌푸리고 올려다봐야할 정도로 커다란 나무. 봄이면 새싹이 가득할 나무. 여름이면 초록이 무성할 나무. 가을이면 열매가 탐스러울 나무. 겨울이면 앙상할 나무. 그리고 다시 봄. 커다란 기둥을 두 팔 가득 품에 안으면 얼마나 따스할까, 커다란 그늘에 누워 있으면 얼마나 시원할까, 하는 생각. 아무래도 유전인가. 아빠가 그리 흙이며 나무며 꽃을 좋아하는 걸 봐와선가. 나이가 들수록 나도 나무가 좋다. 풀도 좋고, 꽃도 좋다. 흙도 좋고. 아빠가 좋은 건 말하면 입 안 아프고. 이상하다. <버킷 리스트>를 보면서 아빠 생각 전혀 안 났는데, 영화 본 걸 쓰려니깐 영화 생각은 안 나고 자꾸 아빠 생각만 나네. 그래서 영화 얘긴 손톱만큼이고 죄다 아빠 얘기뿐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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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어 댄.

   참 신기한 일이예요. 당신의 부지런한 칼럼은 뻔했거든요. 거기다가 우연투성에다가. 당신은 사랑에 빠져 허우덕대면서 다른 사람 사랑은 사랑축에도 못 든다며 대놓고 어린 아이처럼 심통부리고. 그런데 참 이상했어요. 당신의 칼럼을 다 읽곤 기분이 꽤 괜찮아지는 거예요. 사실 좀 많이 웃었어요. 약간 울기도 했어요. 흠. 사실은 많이 행복해지는 느낌이였어요. 참 이상해요. 모두 뻔한 장면들이였는데, 그 장면들을 보면서 웃고 울고 있는 거예요. 내가요. 흠. 이런 말 뻔하긴 하지만요. 사랑이며 로맨틱 코미디며 죄다 뻔하지만 할 때마다, 볼 때마다 참 행복해져요.

    뭐. 뻔한 이야기 조금 더 해 볼까요? 좋았던 장면들에 대한 이야기요. 부모님 집에서 지내는 동안 비가 자주 왔잖아요. 와락 쏟아진 건 볼링장 사건이 있었던 그 날뿐이었지만, 당신이 처음 마리를 만나 사랑에 빠졌던 서점에 가던 날 아침에도 당신의 차 창문에는 비가 내린 흔적이 맺혀있었어요. 밤새 가을비가 소복히 내려주셨던 흔적이요. 나는요. 비가 올 때도 좋은데, 비가 내리고 난 후도 좋아요. 촉촉히 맺혀있는 창가의 흔적도 좋구요. 더러운 것들을 다 쓸어내린 공기의 색감도 좋아요. 모든 게 100미터 당겨진 듯한 청명함도 좋아요. 당신이 차를 타고 이동하려는 순간마다 그 창가의 흔적을 발견하곤 기분이 계속 좋아지고 있었어요. 진짜 비 냄새가 나는 것 같았거든요. 요즘 어떤 극장엔 냄새로 현장감을 살려주는 시스템이 있다면서요. 그럼 나는 당신의 영화에선 내내 비 냄새가 촉촉히 뿌려줬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흠. 그리고 뭐가 뻔하게 좋았더라? 아, 마리랑 처음 만난 그 서점이요. 앙상한 나무 책장으로 가득차 있던 그 서점,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그 책장이 제일 마음에 들었구요. 책이 꽂혀있는 모양도 마음에 들었어요. 조금 무성의한 서점주인도 마음에 들었어요. 당신은 서점 직원이 아니라면서 냉큼 그 많은 책을 계산대로 가져가는 민첩성이라니. 그 카페는 서점과 연결되어 있는 거 맞죠? 저런 서점 있음 정말 좋겠다, 싶었어요. 바다도 보이고, 산책도 할 수 있고, 책도 많고, 커피도 마실 수 있고. 캬. 그리고 볼링장이요. 센스있는 할머니의 나이트쇼. 난 볼링의 ㅂ자도 몰라서요. 영화 속에서만 그런게 아니라 진짜 그런 볼링장이 있는 거예요? 조명 죽여주고, 음악 죽여주는? 그런 볼링장이 있다면 그리로 출퇴근할래요.

   뭐 뻔하지만 그런거죠. 당신은 딸이 주장하는 3일만에 사랑임을 확신하게 되는 사랑이 있나없나 확인하기 위해 마리랑 사랑에 빠진 거예요. 3일만에. 아주 푸욱. 딸 사랑이 지극한 사람이니까요. 결국 첫눈에 반하고 3일만에 사랑임을 확신하게 되는, 그 상대가 동생의 여자친구여도 어쩔 수 없는 그런 강렬한 사랑이 나타나주셨으니 딸도 이해하고 독수공방도 끝나고 일거양득이네요. 당신. 역시 선수였어. 브라보.

   아. 당신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중랑천을 걷는데요. 당신네 가족들이 아침운동으로 했던 고런 비슷한 체조를 아주머니들이 떼거지로 모여서 하시고 계신 거예요. 왼쪽 팔을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펼치고 오른손으로 왼쪽손 끝에서부터 겨드랑이 쪽으로 리듬에 맞춰 톡톡톡 두드려주는 거예요. 엉덩이는 비트에 맞춰 제대로 흔들어주구요. 음악은 님이라는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남이 되는 장난 같은 인생사예요. 아, 우리 아주머님들 진정한 고수 아닙니까? 그러니 댄, 조심해요. 님에 점 하나면 뚝딱 남이 되는 연애를 당신 시작한 거니까요. 부디 '댄 인 러브'가 오래오래 지속되길 빌어요. 뭐 점 하나 금방 찍어도 절망하진 말아요. 원래 사랑이란 그런 거잖아요.

    아, 음악도 좋았어요. 3일간 꾸준히 들어줄게요. 그럼 안녕, 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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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대체 이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겁니까? 영화에선 이 질문을 반복된다. 모두들 이 사실을 알고 싶어한다. 영화 속 인물들과 관객 모두. 도대체 지금 이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그 때 이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가. 어이없이도 또 반복된다. 다시 지금으로 돌아와서, 도대체 지금 이 곳에서 무슨 일이 또 다시 일어나고 있는 건가.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알아차리면 이 영화는 다 본 거다.

   확실히 공수창의 두 번째 군대 영화는 많이 약해졌다. <알포인트>의 내용도 또렷하게 다 기억나진 않지만 그걸 보고 오돌오돌 떨렸던 가슴은 아직도 생생하다. 마지막 귀신 눈 돌아가던 장면하며. 보는 내내 서늘했고 무서웠다. 그런 느낌을 기대하고 본다면 <GP506>은 실망스러울 지도 모른다. 인물과 사건을 통해서라기보다는 설명으로 풀어내는 부분이 많다. 가장 오돌오돌했던 건 특수분장, 특수효과였다. 마치 좀비를 연상시키는 고 오돌토돌한 피부는 닭살을 유발시키기에 충분했다.

   공수창 감독은 공간 그 자체의 공포심을 보여주려했다는데 그걸 너무 풀어냈다는 느낌이다. <GP506>의 군인들이 모두 초토화된 이유, 남과 북이 대립하고 있는 그 으슬으슬한 공간적인 특성, 그리고 왜 아직까지 세계 곳곳에선 전쟁이 끊이지 않는지, 본질적인 인간의 이그러진 욕망들에 대해 간단하게, 대놓고 관객들을 앉혀놓고 설명했다는 인상이 강했다. 그래서 아쉬웠다.

   영화의 주연은 단연코 천호진이다. 그래서 이 영화가 무게를 잃진 않았다. 조현재는 부족해보였지만 이영훈은 빛났다. 그는 좋은 배우가 될 것이다. 확신한다. 나는 <GP506>을 보면서 영화 외적인 것들을 여러가지 생각했다. 하나는 군생활이 정말 힘들겠다는 것. 다들 가니깐 너도 가서 열심히 남자답게 생활하고 돌아와라고 내내 생각했었는데 요새 뉴스를 보면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사람들도 많고, 전방에선 당장 전우를 죽일 수 있는 총을 서로에게 겨룰 수 있다는 생각만 해도 소름돋는 일이다. 적을 향해 겨누겠다고 지급받았지만 옆에 있는 이가 한순간 그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그리고 현실의 일이 영화 속에서 재연되는 일. 그것이 얼마나 보는 이로 하여금 괴롭게 만드는 지 깨달았다. <G506>에는 흡사 얼마 전 같은 내무반 사람들을 무자비로 사살한 사건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는데, <추격자>때와 마찬가지 이유로 그 장면을 영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다. 뉴스를 보면 현실보다 더 한 사건들이 즐비하고 있는 요즘, 극장 안에서 좋은 스토리의 영화들만 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강하다. 견딜 수 없는 사건들을 대하는 건 현실로 족하다. 차라리 공포, 미스터리 영화라도 현실에서 아주 동 떨어진 그런 이야기로 보고 싶어졌다.  

   <GP506>은 반복된다. 무슨 일이 이 곳에서 일어났는지 알고 싶은 노원사는 결국 똑같은 일을 겪으면서 그 일을 또렷하게 알게 되고, 결말에 이르러서는 모든 것이 끝나버린 듯 하지만 그 일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GP가 아닌 다른 곳에서, 다른 사람들로 인해, 다른 모습으로 끊임없이 반복되어지고 있다. 그러기에 나는 이 영화가 더 끔찍했다. 결국 해결책은 우리 모두 없어지는 것 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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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전쯤에 네덜란드에서 만들어진 이야기. 어쩌면 그 곳에서 이 유토피아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진 건 당연한 건지도 모르겠다. 동성간의 결혼이 인정되는 풍차가 돌아가는 곳. 마약과 매춘이 합법적인 튤립이 만연한 곳. 언젠가 이 영화에 대한 글을 봤다. 당장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글이였다. 마침 저렴한 가격에 DVD가 판매중이였고, 바로 주문했다. <4월이야기>처럼 언젠가 보게 될 그 날을 기다리며 책장 안에 고이 묻혀둔 이야기. 바다를 건너 온 풍차의 바람을 따스했다. 영화 속에 풍차는 배경으로도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지만 그 따스하고 서늘한 바람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이건 당당하고 아름다웠던 안토니아에 관한 이야기다.

   첫 장면에서 안토니아는 자신의 죽음과 마주한다. 그녀는 안다. 오늘이 자신의 마지막 날이라는 걸. 변함없이 아침을 맞이하고 머리를 빗고 창문을 열지만 오늘이 바로 생의 마지막 날이라는 걸 그녀는 안다. 그리고 시작되는 이야기들. 순식간에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안토니아는 변한다. 추억은 그렇게 순식간에 실현된다. 그녀는 당당하고 아름답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그른 것인지 알고 그것에 맞게 행동한다. 어머니의 마지막 날, 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안토니아. 나는 왠지 그녀가 <바그다드 카페>의 자스민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웃는 모습이 눈이 부시게 사랑스럽다.

   그녀는 살아간다. 그녀의 생에 커다란 반전은 없다. 그저 다가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뿐이다. 딸의 선택도, 손녀의 선택도, 자신의 선택도, 그 어떤 누군가의 선택도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너와 나는 다른 것이지 틀린 게 아니란다. 그렇게 그녀는 늙어가고 그녀의 집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그들의 마음 속에는 사랑이 가득찬다. 자신들이 행복하다는 것을 느껴간다. 때론 도저히 뚫지 못할 내 안에 평생을 갇혀 사는 이도 있다. 결국 그는 자살을 선택했고,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이와 정신적인 소통의 유일한 통로였던 안토니아의 손녀는 통곡하며 그를 보냈다.

   이 영화의 장점은 그것이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가 골방에서 목을 매며 마지막으로 남긴 말, 나는 더이상 생각하고자 하지 않는다. 안토니아의 손녀로 인해 점점 세상밖으로 나오는 듯했던 그가 결국엔 늘 책상 위에 복잡하게 쌓여있던 철학서적들을 치우고 선택한 자살. 아빠없이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딸. 여자와 사랑에 빠진 딸. 가진 아이를 낳을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를 고민하는 손녀. 결혼하지 않고 가족의 형태를 이어나가는 안토니아 자신까지. 풀이 그렇게 생기고, 나무가 그렇게 생긴 것처럼 모두가 모두를 인정하고 이해하고 강요하지 않고 존중해나가는 힘이 이 영화 속에 있다.

   너무나 부러웠던 장면은 안토니아의 집에 사는 많은 가족들이 정원의 탁자에 빙 둘러앉아 맛있는 식사를 하며 깔깔대는 뒷모습이였다. 나는 저들 사이에 끼였으면. 저들이 먹는 고기를, 와인을 나도 얻어 먹을 수 있었으면. 저들 사이에 끼이면 내 뒷모습도 저렇게 평온해보일까 하는 생각들. 점점 사람들이 많아지는 그 식탁의 뒷모습은 정말 따스했다. 포근했고.

   <안토니아스 라인>은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그리고 어떤 이들이 꿈꾸는 삶이다. 씨를 뿌리면 탐스러운 열매를 거둘 수 있을 거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내게 안토니아의 가족들은 한 번도 맞아본 적 없는 네덜란드 풍차 바람처럼 생경하고 그래서 더욱 따스한 것이였다. 강추다. 따스하고 재밌다. 크룩 핑거는 생각을 멈췄지만 영화를 보고 난 여러 날 뒤에도 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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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봄이 찾아와 주셨으니 <4월이야기>를 봐줘야 한다.  작년 인터넷 서점에서 <4월이야기> DVD를 발견하고는 당장 주문했다. 그리고 책장 안에 고이 꽂아두고는 봄이 오기만 기다렸다.

   대학교 1학년 즈음이였던 것 같다. 집에 내려가 있던 여름방학, 우리집은 우즈키를 닮은 내 친구의 동네로 옮겨져 있었다. 친구와 나는 여름 밤에 자주 만났다. 버스를 타지 않아도 금방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우리가 살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친구와 나는 자주 복도 창 밖에 고개를 내밀고 수다를 떨었다. 저녁시간에 훌쩍 여럿이서 야자를 빼먹고 학교에서 가까운 노래방에 놀러 가곤 했다. 노래방 언니는 늘 요구르트 하나씩을 줬었다. 의자 위에서 몸을 떨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다 학교로 걸어오는 길에 방금 부른 노래를 흥얼거리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별이 반짝거렸다. 교실로 잠입하는 시간은 늘 쉬는 시간. 신발을 손에 쥐고 사뿐사뿐 복도를 걸었다. 남은 야자시간에 공부가 될 일이 없었다. 라디오를 자주 들었고 서로를 우스꽝스럽게 그린 그림을 주고받았다. 스티커 사진을 자주 찍었고, 구름 다리 건너기 직전에 있는 자판기 냉커피를 하루에 두, 세 잔씩 뽑아 먹었다. 정말 그 커피는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대학생이 되고 방학 때마다 만나게 된 우리는 자주 그 날의 일을 추억했다. 어느 날 친구는 동네에 멋진 곳이 있다며 나를 데리고 갔다. 높은 곳에 대학교가 있었다. 헥헥거리며 올라가 보니 시내의 불빛들이 발 밑 아래 가득 펼쳐졌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우리는 캔맥주를 마셨다. 모기가 몰려다니며 우리를 공격했지만 이 정도면 무척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친구에게 니가 나한테 페이퍼를 소개해줬었다고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뜨금없이 말했다. 친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날은 비가 많이 내렸다. 우리는 갑자기 영화가 보고 싶어졌고 뛰어서 동네 비디오 방으로 들어갔다. 친구가 뽑아들었나, 내가 뽑아들었나. 그 날 우리가 본 건 <4월이야기>였다. 축축하게 젖은 몸으로 화사한 봄의 화면을 봤다. 영화 속 우즈키는 지독하게 말이 없었다. 비디오 방을 나서며 이렇게 시시하게 끝나버리다니, 나는 주인공이 벙어린줄 알았다고 투덜거렸다. 친구는 그냥 씨익 웃었다. 


   그리고 한 번쯤 더 보았었나. 두 번째 보았을 때 나는 친구가 우즈키와 많이 닮았다고. 생김새도, 행동들도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이 세 번째쯤이겠다. <4월이야기>를 봤다. 아, 이 영화가 이렇게 웃겼었나. 이삿짐을 나르고 정리하는 장면에서 정말 혼자서 깔깔거리며 웃었다. 내가 좋아하던 벚꽃장면이 나왔다. 우즈키가 작은 나무의자를 들고 옷을 스르르 털어내면 벚꽃이 우르르 떨어지는 모습. 아, 이렇게 금방 지나가버리다니. 나는 이 장면을 분명 슬로우 모션으로 기억했는데. 5초도 되지 않아 우즈키는 새집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플라잉 낚시를 하는 장면. 이 장면의 풍경은 너무 따스해서 스르르 녹아내릴 것만 같다.

   그 시절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던 스무살, 나는 왜 이 영화가 답답하게 느껴졌을까. 벙어리라고 생각했던 우즈키는 생각보다 말이 많았다. 혼자 지내고 있어 쓸데없는 말이 없었을 뿐, 할 말을 예쁘게 하는 아이였다. 오히려 내 기억에서보다 무척이나 적극적인 아이였다. 이사한 날 이웃들에게 선물을 돌리고, 카레를 너무 많이 만들었다는 이유로 이웃에게 같이 먹자고 청하고, 좋아하는 선배때문에 아무도 없는 도시에 진학을 하고, 매일 선배가 일하는 서점을 찾아가 염탐하는 적극적이고 밝은 아이였다. 영화가 계속되는 동안 그 애의 머리 위에는 봄 햇살이 가득 뿌려져 눈이 따가울 정도였다. 아름다웠다. 그 아이가 살고 있는 그 시간들이. 싱그럽고 눈부셨다. 그리고 그리웠다. 마음이 아릴 정도로.

   역시 짧았다. 이렇게 끝나버리다니. 역시 아쉬웠지만 부족하진 않았다. 원래 봄은 짧으니까. 우리의 스무살은 그렇게 아쉬운 거니까. 넘치듯 부족한 계절이니까. 그렇게 빨리 지나가버리는 시절이니까. 영화가 끝나고 Special Features 메뉴로 넘어갔다. 뒤적거리다 Shoot Picture를 눌렀다. 거기에 눈부신 우즈키가 있었다. 마츠 다카코가 슬레이트를 들고서 큐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 우산을 들고서, 비에 흠뻑 젖어서, 밥을 먹으면서, 화사하게 웃으면서. 너무 예뻤다. 우리들의 스무살도 저랬을까. 예쁘고 빛나고 부러웠을까.

   작년에 DVD를 사면서 친구에게도 따로 보냈는데, 친구는 봤을까. 영화 속에서처럼 애태우던 우리의 스무살 짝사랑을. 그때 우리가 늦게까지 밤을 지새우며 짝사랑했던 것은 어떤 남자아이였지만, 지금 나의 짝사랑은 우리의 스무살이 되어버린 걸. 오랜만에 메일을 써야겠다. 손편지가 좋을까. 지금 봐도 친구와 우즈키는 닮았다. 말이 그리 많진 않지만 할 말을 예쁘게 하는 아이. 밝고 적극적인 아이. 앞에 바구니가 달린 자전거가 잘 어울리는 아이. 내가 보장하건데 니 스무살은 우즈카처럼 빛났었어. 물론 지금의 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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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라서 드문드문 지워진 그 해 여름. 그 해의 기억이 언젠가 차츰 지워질 것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그래. 세월이 약이라고 어떤 기억은 오래 남아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어떤 기억은 잊혀져서 나를 절망에서 구해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 해 여름, 내리는 비만큼 많은 술을 마시고 눈물을 흘리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게 만들었던 그 때. <마이블루베리나이츠>는 그 시절의 나를 보여주고 있었다.

   모든 진행 중인 이별을 말하기 위해서는 뭐든지 과해야 하는 법이다. 흘리는 눈물도, 마시는 술도, 다시 시작하자고 입 안 가득 맴도는 말도, 흐르는 음악조차도. 그 해 여름을 아주 오래 전 지나온 나는 <마이블루베리54나이츠>를 중반쯤 보고선 지겹다고 생각했다. 늘 똑같은 사랑, 늘 똑같은 이별, 늘 똑같은 아픔. 왜 나는 그 때 쿨하지 못했나. 변해버린 너따위는 필요없다며 깨끗하게 마음을 정리해버리지 못했나.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늘 후회 뿐이다. 그 사람과 더 오래 지내지 못한 후회, 그 사람을 깨끗하게 떠나보내지 못한 후회. 지금에야 다시 그 때가 찾아 온다면 나는 어른답게 사랑하고, 어른답게 헤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다시 그 상황이 닥치면 나는 또 아이처럼 사랑하고, 아이처럼 헤어질 것을 안다.


   영화 밖에서는 가수인 노라 존스는 한번도 영화 안에서 노래하지 않는다. 그녀가 캐스팅 된 이유가 영화 안에서 기똥차게 감미로운 노래를 부르기 위한 것일 거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그녀는 영화 속에서 그냥 실연의 상처에 맞닥뜨린 블루베리파이를 좋아하는 여자일 뿐이다. 그녀는 남자의 단골집에 찾아가 열쇠를 맡기고, 남자를 잊지 못해 매일 밤 그 곳을 찾아간다. 그 단골집엔 섹시하고 다정다감한 주인 주드로, 제레미가 있고. 어느날 그녀는 열쇠를 돌려달라고 하고 길을 떠난다. 그를 잊기 위해서, 나를 찾기 위해서. 그 길의 한 가운데에서 알콜중독에 빠져 이혼한 아내를 잊지 못하는 어니에게 술을 만들어 주고, 남편이 죽어버린 수 린의 눈물을 닦아주고, 아버지를 잃은 레슬리의 차를 운전해준다. 그리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 위에서 노라 존스, 그러니까 엘리자베스는 말한다. 때론 타인을 통해서 나를 또렷하게 볼 수 있다고. 그리고 더 나은 내가 되어간다고. 그녀가 길을 떠나지 않았다면 여전히 실연의 상처로 허덕이는 엘리자베스로 남아있었겠지만 길을 떠났고 1년이 지났고 건너편에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는 그 거리로 돌아왔다. 제레미는 엘리자베스에게 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변했다고 했다. 그리고 또 다른 그녀의 사랑은 시작되고.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사람은 나탈리 포트만이다. 노라 존스는 착한 연기를 그럭저럭 잘 해내주었고, 주드 로는 의외로 비중이 적은 역할이였다.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그저그런 카페의 주인 역할. 레이첼 웨이즈가 맡은 역할은 이전의 그녀에 비해 너무 강해서 뭔가 좀 어색했다. 나탈리 포트만이 노라 존스와 아빠 이야기를 나누며 창 밖을 내다보면서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 그녀의 연기는 정말 좋았다. 뭔가 꾹꾹 눌러삼키고 있는, 그렇지만 앞자리의 상대에게 강해보이고 싶은, 하지만 실제 속내를 내보일 수 밖에 없는, 강하지만 여린 사람의 표정. 나탈리 포트만은 정말 날이 갈수록 빛이 난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노라 존스의 주제곡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그저 감미롭고 달콤한 로맨틱한 이야기라 생각하고 극장으로 향한다면 후회할 수도 있다. 이건 왕가위 영화이기 때문에. 딱 왕가위스럽다. <중경삼림>에서처럼 수첩에 적어두고 싶은 대사들이 나오고, 각기 사연을 가진 열쇠를 보관하는 유리병이나 들어가고 싶었지만 들어갈 수 없었던 문, 늘 팔리지 않지만 혹시나 팔리지 몰라 늘 만드는 블루베리 파이에 대한 감상적인 영상들이 즐비해있는. 영화가 끝나고 나니깐 정말 촉촉한 블루베리파이에 커피 한 잔이 간절해졌다. 그걸 먹으면 왠지 잠시나마 행복해질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딱 왕가위스러운, 잘 나가는 배우들이 떼거지로 등장하는, 우리들의 이별의 한 순간을 포착한 영화다. 이별이 아직 먼 사람은 그저 따분할 지도 모르고, 이별이 진행 중인 사람은 가슴이 따끔따끔할 지도 모르고, 이별을 멀리 지나온 사람은 그들의 이별이 그저 가엾게만 느껴질 지도 모른다. 모든 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렇게 당장 죽을 것처럼 슬퍼하지 말아요, 라고. 어쨌든 영화를 끝까지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엘리자베스는 변했으니까, 단단해졌으니까. 그렇게 젖은 땅은 굳어가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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