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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하루키를 읽는 밤
    서재를쌓다 2008. 8. 30. 15:55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문학사상사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계기는 실로 간단하다. 갑자기 무언가가 쓰고 싶어졌다. 그뿐이다. 정말 불현듯 쓰고 싶어졌다." 아니. 이건 이를테면 프롤로그고, 실제 시작하는 문장은 이렇다.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대학교 1학년 때 내게 꽤 나이 차이가 나는 남자를 소개시켜준 선배가 있었다. 나는 그 남자의 나이가 부담스러워 만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러면 선배는 메일이라도 주고받아보라고 했다. 선배는 내게 그 남자가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라고 소개했다.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는 내게 종종 메일과 함께 사진을 보내왔다. 이건 어젯밤 야경이 아름다운 남산 꼭대기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이건 어제 새벽 안개로 뒤덮인 논가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나는 그 남자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우리는 내 성년의 날에 만났다. 남자는 점퍼를 입고 차를 끌고 나왔고 나는 하얀색 블라우스를 입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남자와 나는 서로 호감을 느끼지 못했다. 내 기억으론 그 남자와는 딱 한 번 그렇게 만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뒤로 문자 연락은 간혹 했었다. 남자는 하루키 커뮤니티의 운영진이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으로 하루키를 읽어 볼 생각을 했는데, 어느 날 내가 도서관에서 <노르웨이의 숲>을 빌리고 문자를 보냈더니 당장 전화가 왔다. 하루키는 그렇게 무턱대고 <노르웨이의 숲>부터 읽으면 안 돼. 당장 <상실의 시대>를 반납하고 자기가 말하는 책을 빌리라고 했다. 그 책을 다 읽고 남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그 책을 다 읽었어요. 그러면 남자에게 전화가 왔다. 어땠니, 나는 이런저런 말도 안 되는 감상을 주절거렸다. 그러면 남자는 다음 책을 추천해줬다. 나는 그 책을 다 읽고 또 문자를 보냈다. 그런 식으로 몇 번을 더 연락을 했었는데, 아마도 내 기억으론 <노르웨이의 숲>까지 못 가고 연락이 끊겼던 것 같다. 아니면 <노르웨이의 숲>까지 딱 갔을 수도 있고. 그 뒤로 나는 하루키를 혼자 읽었다. 혼자 읽고 혼자 곱씹고 혼자 다음 책을 골랐다.

        지금 생각하면 아마도 남자의 하루키 추천 순서는 발간 순서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내가 제일 처음 읽은 하루키의 책은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일 것이다. 일기라도 써 뒀었더라면 기억해낼 수 있었을텐데. 아무튼 오래간만에 하루키의 초창기 소설을 읽었다. 무슨 이유에선지 지난 주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읽고 싶어졌다. 읽으면서 내내 읊조렸다. 잘 될 거야. 잘 될 거야. 무슨 까닭이였는지 몰라도 나는 이 책에서 위안 받고 싶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잘 될 거야. 스무살 그 때처럼 용기낼 수 있을 거야. 마치 처음 읽는 책처럼 꼼꼼히 읽어나갔다. 한창 내가 하루키에 빠져있을 때의 문장들이 펼쳐졌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으면 항상 샤워를 하고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시고 싶어졌다. 쓸쓸했지만 외롭진 않았다. 공허했지만 절망스럽진 않았다. 세상의 끝을 생각하고, 일각수의 두개골을 상상했었다. 스파게티 같은 이국의 음식을 만들어 먹고 깊이 잠들고 싶었다. 그 때, 하루키를 읽을 때마다 그랬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는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와 맥주를 마시고 바닷가 도로를 운전하는 '나'와 어느새 친구가 된 술집에서 책을 읽는 돈이 많은 부잣집 아들 '쥐'와 새끼 손가락이 없는 여자 아이가 등장한다. 딸국질을 하는 라디오 DJ와 감자튀김을 열심히 만드는 술집 주인 제이도 간간이 등장한다. '나'와 잠을 잔 과거의 여자친구들 이야기도 있다. '나'가 레코드를 빌리고 돌려주지 않은 여학생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우리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나'와 쥐, 새끼 손가락이 없는 여자 아이의 세계에는 존재하는 작가 데릭 하트필드도 있다. 줄거리를 말해 보라고 한다면 내가 이렇게 문장을 나열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다. 그저 '나'가 있었고, '쥐'가 있었고, 바람이 있었다. 어느 날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래, 작가의 말이었다. 내가 이 공허하고 쓸쓸한 이야기를 읽으며 잘 될거야, 다소 터무니 없는 주문을 외웠던 이유가 바로 책의 뒤, 작가의 말에 나왔다. 이 책의 작가의 말에는 언제 하루키가 처음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는지가 나온다.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어느 야구팀이 승리한 걸 보고 모두들 열심이군, 나도 열심히 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소설을 써 내려갔단다. 그렇게 써 내려간 소설이 바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다. 하루키는 이 작품으로 군조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작가의 말을 읽고 너무 좋아서 몇 번을 다시 읽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기에 이 책이 다시 내게로 온 거구나, 생각했다. 올림픽을 보면서, 유도 경기를 보면서, 핸드볼 경기를 보면서, 야구 경기를 보면서 나도 생각했다. 모두들 저렇게 땀 흘리며 열심히 하는데, 나도 열심히 해야지. 가을이 올테고 바람의 방향이 바뀔테니까. 스물 아홉의 나는 스물 아홉의 하루키에게 정말 감사했다. 이건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마음을 다잡은 사람들을 위한 작가의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을 했다. 스무 살 하루키를 좋아했던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는 지금쯤 잘 지내고 있을까. 벌써 오래 전에 결혼을 했을테고, 아이도 있을테지. 그는 여전히 남산 꼭대기 위에서, 새벽 안개가 몽글몽글 피어나는 논가에서 사진을 찍을까. 그 때 남자와 나는 꽤 긴 길을 드라이브 해서 스파게티를 먹으러 갔다. 창을 5센티만 살짝 내려놓고 크게 음악을 들었다. 나는 그 당시 낯선 사람을 만나면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 아이였는데, 그래서 말 없이 음악을 들으며 도로 위를 달리는 시간이 좋았다. 여전히 그는 하루키를 읽을까. 이젠 하루키를 읽지 않는 일상에 찌든 가장이 되었을까. 궁금해졌다. 아, 책을 읽는데 자꾸 김연수 작가의 <7번 국도>가 떠오르기도 했다. 어쩐지 비슷한 구석이 많다고 생각했다. 김연수 작가가 하루키를 좋아한다고 했으니 영 엉뚱한 생각이 아닐 수도 있겠다.

       그리고 이 생각. 용기를 얻고 싶으면 이제는 꽤 유명해진 작가의 데뷔작을 읽자. 미숙한 면들이 여기저기 보이지만 열정만은 그득한 첫 작품. 그는 꾸준히 썼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괜찮은 작가가 되었으니. 어떤 사람에게도 위태로운 처음은 존재하는 것이니. 나도, 당신도 노력하면 좋아질 수 있을테니. 아자아자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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