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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자신만 푸르른 슬픈 청춘인 사람
    극장에가다 2009. 1. 14. 23:36

       오늘은 머리를 자르러 미용실에 들렀어요. 긴 머리보다는 짧은 머리를 좋아해서, 조금만 길어지면 싹둑싹둑 잘라네요. 퇴근길의 지하철에서였죠. 장한평즈음이었나. 갑자기 사가정에서 내려서 미용실에 들러 머리를 자르고 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 거예요. 그렇게 저는 몽실이가 되었답니다. 그세사의 송혜교 머리를 늘 탐내왔었는데, 정말 누구말대로 송혜교가 하니깐 예쁘지, 저의 경우는 완전 몽실이에요. 흠. 이게 아닌데. 아무튼 전 머리를 잘라야겠다고 결심한 장한평 즈음의 지하철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읽고 있었지요. 그리고 월요일에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를 보고 있었구요. 한 극장에서.


       영화를 보기 전에, 소설도 읽기 전에 이 이야기가 가진 설정 자체가 너무나 흥미로운 거예요. 신비스럽구요. 80세의 노인으로 태어나 갓난아기가 되어서 죽는 한 남자. 다들 늙어가는데 혼자서만 젊어지는 가여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죽고, 늙어가는 중간에 꼿꼿이 서서 자신만 푸르른 슬픈 청춘인 사람. 그래서 영화가 보고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를 보고 나니 원작소설을 읽고 싶단 생각이 들었구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의 경우에는 영화가 더 좋았네요. 먼저 보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무려 브래드 피트 주연이니까요.), 짧은 소설에 비해 살이 많이 붙여진 긴 이야기여서 그럴 수도 있지만. 영화는 거의 소설의 설정만 가져온 셈이에요. 그리고 소설보다 질이나 양적으로 더 풍성해요. 로맨스를 뺀다고 하더라두요. 

       소설에 보면 벤자민은 80대 노인의 몸으로 태어나요. 그야말로 노인의 몸이죠. 커다란 노인의 몸이요. 태어나자마자 말도 하지요. "당신이 내 아버지요?"라고. 영화는 갓난아기의 크기에 노인의 얼굴, 노인의 체력을 가진 아이가 벤자민의 첫 등장모습이에요. 그리고 아이의 그런 모습에 깜짝 놀란 아버지는 그 아이를 어느 집 앞에 버려두는데, 벤자민은 그 곳에서 자라게 되요. 노인들의 요양원같은 곳인데,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난 벤자민에서 정말 어울리는 곳이죠. 그 곳에서 벤자민은 많은 것을 배워요. 엄마의 사랑을, 피아노를, 즐거움을, 슬픔을, 행복을, 외로움을, 살아간다는 것을,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을, 사람이 7번의 번개를 맞고도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등을. 그리고 첫 눈에 반한, 그래서 평생을 사랑하게 되는 여자아이도 그 곳에서 만나죠. 제겐 그 곳에서의 벤자민의 모습이 제일 눈부셨어요. 노인의 외형을 가졌을 뿐인 귀여운 아이의 본성을 지닌 모습이었으니까요.

       그렇게 벤자민은 10살이 되고, 30살이 되고, 50살이 되요. 그렇지만 몸은 70살의 모습이 되었다가, 50살의 모습이 되었다가, 30살의 모습이 되죠. 그러는 사이 술도 마셔보고, 첫 경험도 하고, 집도 떠나보죠. 배 위에서 일을 하고, 배 위에서 일출을 보고, 배 위에서 일몰을 봐요. 전쟁에 나가고, 한 여자를 만나서 밤새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해요.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이별도 하죠. 그건 벤자민의 첫 번째 이별이었어요. 평생에 걸쳐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 사람과 함께 살기도 하고, 딸 아이의 아빠가 되기도 해요. 하지만 청춘은 너무 찰나인지라, 그래서 무척이나 눈부신 것인지라, 그래서 자꾸 생각하면 눈물나는 것인지라. 벤자민은 60살이 되고, 65살이 되고, 70살이 될테니까요. 겉보기에는 20살의 모습이 되고, 15살의 모습이 되었다가 10살의 모습이 될테니까요. 65살의 여자는 10살의 남자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곁에 두기엔 너무나 힘든 일이니까요. 25살의 딸과 10살의 아빠가 함께 살아가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괴로운 일일테니까요. 그러니까요. 이 영화의 결말은요. 마음이 조금 아파요. 


       '함께' 늙어가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혼자'만 젊어지는 벤자민은 세상에서 얼마나 슬픈 존재인지. 생각만 해봐도 알 수 있어요. 브래드 피트랑 케이트 블란쳇의 얼굴이 나란히 놓여 있는 포스터를 보는 거예요. 그리고 주문을 거는 거죠. 브래드 피트 쪽은 주름투성이 노인의 모습이었다가, 20대의 아주 아름다운 청춘의 순간으로 서서히 바뀌는 주문을. 케이트 블란쳇의 모습은 그 반대로요. 봐봐요. 아주아주 슬픈 일이죠? 더군다나 두 사람은 정말 사랑하는 사이. 더 아픈 일이죠? 그렇죠? 뭐 결국에는 다들 갓난아이의 모습이든 100살의 노인의 모습이든 혼자이게 되고, 외롭고 쓸쓸해지는 건 마찬가지지만요.

        이건 소설의 마지막 문단이에요. "당신이 내 아버지요?" 하던 노인의 마지막 모습이죠.

       그리고 모든 것이 어두워졌다. 하얀 아기 침대와 그의 위에서 움직이던 흐릿한 얼굴들, 우유의 따뜻하고 달콤한 내음, 그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그의 마음에서 점점 희미해지다 사라졌다.

        우리가 늙어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벤자민의 마지막이 뭐가 다르겠어요. 겉모습만 다를 뿐이지. 그런 생각도 드네요. 아무튼, 영화가 괜찮았어요. 브래드 피트가 빛나는 영화였어요. 아, 단점은 있어요. 길-어요. 영화가 좀. 중간에 조금 지루하다는. 그러니까 내가 처음에 미용실 얘길 했었죠? 몽실이가 되었다는 얘기요. 머리는 또 기를거니까 놔 두고. 그 미용실의 거울 앞에서 제가 이십여 분동안 가만히 있었던 거예요. 미용실 조명도 밝으니 제가 아주 또렷하게 잘 보였죠. 점점 나이들어가는 내 모습이요. 눈가의 주름도 많아지고, 얼굴에 점이 부쩍 늘었어요. 나이가 든다는 건 점이 늘어난다는 건가요? 왜 이렇게 얼굴이며 목에 점이 많이 생기는 지 모르겠어요. 머리숱도 적어지고 있어요. 안 그래도 적은데. 스무살 때요. 자주 미용실에서 머리를 바꿨거든요. 기분이 울적할 때면 가서 잘라댔으니까요. 그 때 그 2층 미용실 거울 앞에서의 내가 떠올랐죠. 그리고 지금의 나. 그래, 이게 정상이라는 거지, 라는 생각두요. 벤자민처럼 젊어질 미래에 대한 걱정없이 충분히 사랑할 수 있으니 좋다, 해 버렸죠.(하지만 늙어갈 미래에 대한 걱정은 어쩌죠? 흑.) 그러니 름도 지저분한 점들도 괜찮다.(이것보다 훨씬 더 많이 늘어날텐데요. 흑흑.) 이런 구잡이식의 생각들 끝에 저는 몽실이가 되었답니다. 

       뭐 그런 이야기에요. 이 이야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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