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이름은 비키. 그녀에겐 하오라는 연인이 있다. 그녀는 하오와 헤어지고 싶지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주술이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녀는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다짐했다. 예금해둔 돈을 다 써버리는 날, 그를 떠나리라고. 이것은 세계가 축제로 들떠있던 10년 전, 2001년에 일어난 일이다.
2011년의 비키는 그녀의 10년 전 이야기라며 말문을 연다. 비키는 10년 전 자신을 '그녀'라고 말한다. 마치 10년 전 자신은 자신이 아닌 것처럼. 자신은 그냥 10년 전 비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제3자처럼.
그러니까 10년 전, 그녀는 열아홉살이였고,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으나 그들은 너무나 어렸고, 그를 버리지도, 떠나버리지도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시간과 시간은 서로 부딪치며 이어졌다. 비틀거리며 술집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면 거기엔 머리를 말리며 비즈구슬이 반짝이는 방에 앉아 있는 그녀가 있었다. 화장실 문을 열면 비틀거리며 테크노 음악을 뒤로 하고 취해 나오는 그녀가 있었다. 대만에서 취한채 뒤돌아보면 어느새 그녀는 일본에서 하얀 눈을 만지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앞과 뒤, 시간과 장소,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여있었다.
정말 그녀는 하오를 버렸을까. 잭은 어떻게 됐을까. 비키 앞에 다시 나타났을까. 결국 그녀는 예금해뒀던 돈은 다 써버린 걸까. 정말 그녀는 2011년에 살고 있었을까. 2001년에 비키는 그런 일들을 겪었을까. 눈사람같은 오래된 연인과 지겹게 다투다 그를 떠난 일과, 쌍둥이 형제를 만나러 영화제의 도시, 유바리에서 눈 속에 얼굴을 파묻힌 일 따위 말이다.
나는 영화를 보고 극장 문을 나서면서 바랬다. 이 문이 열리면 지금의 내가 아닌 그 언젠가의 내가 나타나기를. 그러면 나는 그때의 나를 '그녀'라고 부르리라. 스무살 좋아하는 아이에게서 퇴짜를 맞고 엉엉 울었던 그녀도 좋고, 지금보다 십년 후 어떤 모습일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그녀라도 좋으리라. 나는 어떤 고백들을 하게 될까. 비키처럼 다짐했지만 늘 제자리로 돌아왔던 고백들을 하게 될까.
나도 일본이 가고 싶어졌다. 비키처럼 유바리로. 눈사람의 고장. 겨울의 영화제. 판타스틱한. 왜 나는 이 영화가 홍보문구처럼 청춘에 관한 이야기라고 느껴지지 않는 걸까. 왜 지우고 싶은데 지워지지 않는 어떤 얼룩같은 이야기를 그녀가 하고 있다고 생각이 든걸까. 침까지 묻혀가면서 애쓰지만 자꾸만 번지기만 하는 그런 얼룩말이다. 결국 같은 말인가. 청춘과 지우고 싶은 기억의 편린은. 2011년이 되면 그녀를 만날 수 있게 될까. 하긴 지금 2008년에 2001년의 그녀를 만났으니 3년이 지나도 2011년의 그녀를 만날 확률은 제로일테지. 2001년의 그녀를 한번 더 만나게 된다면 모르지만.
고가 말했다. 유바리의 겨울은 무지 춥다고. 영하 30도. 그곳은 눈사람의 고장이었다. 해가 뜨면 눈사람은 녹아 사라지겠지. 하오하오와 사랑을 나누던 어느 날,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오하오는 눈사람과 같다고. 해가 뜨면 그도 사라지겠지. 그 날 나눈 사랑은 서글펐었다.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녀는 그것을 기억했다. 그건 10년 전인 2001년의 일이었다. 그해 유바리엔 눈이 아주 많이 내렸다.
'대사'에 해당되는 글 7건
- 밀레니엄 맘보 - 2011년으로부터 온 편지 8 2008.02.17
- 메리 대구 공방전 - 내게 위안이 되어주었던 드라마 11 2007.12.11
- 디 아워스, 나의 댈러웨이 부인 12 2007.10.29
- 9회말 2아웃, 난희와 수애사이 2 2007.08.21
- 여름이 가기전에 - 방황은 이제 끝내자, 스물아홉 2007.08.18
- 시간을 달리는 소녀 - 현재를 살아나가기 위해 12 2007.07.16
- Shopgirl 2 2007.06.26
무더운 여름이였습니다. 해마다 여름이 왜 이렇게 견디기 힘들 정도로 점점 무더워지는지. 올해는 정말 참기 힘들었어요. 불면증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제가 더워서 잠이 오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까요. 할 말 다 했죠. 추워 죽겠는 한 겨울에 무슨 여름 타령이냐구요? 이제 한 해도 저물고 올해 제게 위안을 던져주었던 좋은 드라마들을 추억하다보니 그 한여름 땡볕의 더위 속에서 잘 살아 나가자고, 너는 충분히 잘 하고 있다고 힘을 준 <메리 대구 공방전>이 생각이 나세요. 기억하시죠? 삐삐소리 메리메리 이하나와 번개머리 대구대구 지현우가 최고의 귀여움과 깜찍함으로 무장한 백수로 등장한 드라마요. 많은 드라마가 제게 기쁨과 즐거움과 공감을 불러일으켜주지만, 그래서 그렇게 시간에 맞춰 티비 앞에 앉게 만들지만 <메리 대구 공방전>만큼 저를 위로해 준 드라마는 없었어요. 20대 맞춤 위안형 드라마라고 할까요? 특히 대사들이 너무 좋았어요. 그래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수첩 한 귀퉁이에 적어두곤 했는데요.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다시 한번 들춰봅니다. 그리고 또 위안받아요. 그래, 꿈을 지닌 20대들. 그래, 너희들. 그만하면 잘 해나가고 있다고. 그러니 꿈을 버리지도 말고 잊어버리지도 말자구요. 언젠가 그 꿈이 거짓말처럼 이뤄지면 우리도 메리, 대구처럼 호탕하고 귀엽게 하하하하 세상을 향해 웃어주자구요.
수, 목요일을 약속없이 만들게 하고, 무진장 기다리게 만들었던 <메리 대구 공방전>. 지금도 가희동 골목길에 가면요 메리, 대구가 소란스럽게 아웅다웅 싸우면서 잘 지내고 있을 것만 같아요. 현실이 고달픈 사람들, 꿈이 있어 행복한 사람들, 사랑이 없어 불행한 사람들, 사랑할 수 있어 행복한 사람들이 있는 사람들이 <메리 대구 공방전> 속 모습을 하고 꼭 살고 있을 것만 같은, 꼭 살고 있었으면 좋겠을 그 정갈한 가회동 골목길에요. 고마웠어요. 메리, 대구.
예전에 <디 아워스>가 개봉했을 때 누군가 내게 경고했었다.
이 영화 보지마. 특히 낮엔. 우울해서 하루를 다 망칠거야.
그때는 충분히 우울했으므로 그의 충고에 따랐다.
그리고 몇 년 후, 이 책의 원작 <세월>을 샀는데 DVD 타이틀이 함께 배송되어 왔다.
책을 읽고 DVD는 고이 책장 속에 꽂아두었다.
어제 <디 아워스>를 봤다.
보기 전에 몇 년 전 그의 충고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앓던 병이 깨끗하게 다 나았다.
우울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서, 나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나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댈러웨이 부인을 쓴,
댈러웨이 부인을 읽은,
댈러웨이 부인이라 불리운 그녀들을 위해.
여전히 예전에 구입한 그대로 책장 속에 꽂혀있는
<댈러웨이 부인>을 읽어야 겠다.
영화 속 한 장면.
나는 메릴 스트립이 이 대사들을 뱉어내는 순간, 마음이 벅찼다.
어느날 아침, 새벽녘 잠에서 깼는데 뭔가 될 거 같았어.
그런 느낌 아니?
이런 생각이 들었지.
이제부터 계속 행복할거야.
이건 시작이고, 더 큰 행복이 올거야.
다 헛된 기대였고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순간 행복했고 바로 그 순간이...
전부였던거야.
9회말 2아웃 첫방송때 마음에 척척 달라붙는 대사들에 이끌려 닥본사의 애청자가 되겠노라고 다짐했던 마음은 온데간데 사라져버렸다. 아직 스물두살인 막내동생은 이 드라마에 홀짝 빠져 꼭 닥본사를 하며, 중요한 약속 때문에 빠뜨린 날은 그 밤이 채 가기도 전에 다시보기를 해서 챙겨본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고 물었을 때 귀찮은듯이 대답을 안 하더니 저번회부터 정주가 나오지 않는다며 갑자기 재미가 없어졌다는 걸 보니 이태성 때문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난희가 좋았다. 신춘문예에 당선되서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인 난희, 직장생활은 겨우 버티고 있는 중이고, 서른에 가까워온 생의 허무함을 서른즈음에로 노래하는, 포장마차에서 절망과 희망을 섞은 폭탄주를 들이키며 푸념할 수 있는 그녀. 어떤 때는 나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나 같지 않아서 좋았던 난희.
그런데 첫방송 이후 몇 편을 닥본사하다 보니 난희가 푸념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녀는 꿈이 있다. 비록 계속 실패하고 있긴 하지만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작가라는 목표가 젊은 나이를 꼭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먹을수록 글은 더욱 깊어질테니 언젠가 이렇게 노력하다보면 그 꿈이 이루어질 것은 분명하다고 본다. 그리고 그 때까지 최소한의 아니, 풍요롭지 않아도 평범한 경제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직장이 있다. 말로는 월급도 못 받는다 하지만 월급은 꼬박꼬박 밀려서라도 나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저번주에 보니깐 매출이 올랐다고 사장이 수산시장에서 회까지 쏘시더라. 그리고 연하의 팔팔하고 잘생긴 남자친구. 저번주에 헤어진 듯 했지만, 아무튼 연하의 풋풋하고 순수해서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로 인해 서른에도 스무살의 열정적인 연애를 맛보지 않았나. 마지막으로 제일 부러운 30년지기 친구 형태. 똥모양이라고 놀려댈 수 있는 남자'친구', 자주 가는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만나는 친구이며 언제든 술잔을 함께 마주쳐주는 친구, 지나간 유행가를 길거리에서 함께 부르면서 쪽팔려하지 않을 수 있는 친구, 어떤 때는 남자친구이면서 어떤 때는 여자친구이기도 한 언제든 내게서 도망가지 않을 것만은 분명한 친구, 게다가 잘 생겼고 잘 나간다.
됐다. 이 정도면 난희는 충분히 행복하다. 매일밤 포장마차나 맥주를 마시며 푸념할 필요는 없다고! 그럼에도 난희는 푸념한다. 뭐 꿈이 이뤄지지 않는다고, 어린 남자친구와의 미래가 걱정된다고 이런 푸념따위는 그래, 들어줄 만하다. 내가 이 드라마를 조금씩 멀리 하게 된 이유는 바로 그 난희가 수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희가 아니 수애가 외모에 대해서 푸념을 하는 순간들 때문이다. 수애는 예쁘다. 수애는 갸날플정도로 날씬하다. 그리고 수애는 어리다. 아니다 실수했구나. 지금 검색해보니 수애 80년생이다. 올해 28살, 그렇게 어리지 않구나. 왜 어리다고 생각했던 거지? 그럼 다시. 수애는 무척이나 어려보인다. 그런 수애가 말한다. 자신보다 도저히 더 어려보이는 것 같지는 않은 후배를 보고, "젊은 여자 봤을 때, 고거 참 싱싱하네 하는 거 보면 나 늙은 거 맞죠?" 그리고 어이없게도 또 이렇게 말한다. "고뇬 참 탱탱하네." 등등. 나는 예쁘고 아름답고 탱탱한 수애가 저런 대사를 날릴 때 정말 공감되지가 않는다. 내가 말하고 싶다고, 수애한데. 고뇬 참 탱탱하네.
그래도 이 드라마, 대사가 너무 좋다. 마치 작가가 직접 경험해 본 것만 같은 지극히 현실적인 서른즈음 마음에 자석처럼 착착 달라붙는 대사들. 그동안 닥본사하지 못한 회들은 대본보기해야겠다. 나는 도저히 수애의 푸념을 듣지 못하겠다. 난희가 아무리 자학을 해도, 수애는 빛나므로.
잠 못 들던 여름밤,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가 <여름이 가기전에>가 하길래 보기 시작했다. 예전에 극장에서 개봉할 때 보고 싶었는데 놓친 영화. 꽤 시작한 후였지만 잠도 안 오고 해서 그냥 봤다.
그 밤, 나는 이 영화가 너무나 근사했다. 29살이라는 숫자가 가지는 오묘한 기운. 29살이 다가오면 아직은 29살, 이십대지만 마치 서른이 된 것처럼 행동하지 않나? 서른이 된다는 두려움도 크고. 뭐 서른이라고 특별히 달라질 건 없지만. 19살 때도 그랬나, 생각해봤다. 그때는 스무살이 된다는 설레임이 더 컸었던 것 같다. 확실히 29살은 오묘한 나이다. 아무튼 29살의 소연이 등장하고, 그는 서른이 훨씬 넘은 이혼남 민환을 사랑한다. 둘은 연애를 한번 했다가 헤어졌는데 그녀는 그를 잊기 위해 매우 힘든 시간들을 보냈고, 다시 그를 만나 하룻밤을 보낸뒤 다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연을 사랑하는 남자, 재현이 있다. 이 남자는 잘 생겼고 따스하고 착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연을 사랑한다. 하지만 소연은 민환의 등만 바라보고 서 있다. 제일 끝에서 소연의 등을 바라보고 있는 재현은 그녀를 깔끔하게 놓아버리지 않는 민환도 밉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는 소연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래, 재현이 제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그 자신일테다. 결국 소연은 재현이고, 민환은 소연이니까.
못 본 앞부분이 너무 궁금해서 비디오며 DVD며 알아봤지만 출시되지도 않은 것 같고, 다시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케이블밖에 없었다. 다시 방영하는 날짜와 시간을 알아뒀다가 토요일 오후에 앞부분부터 다시 봤다. 그런데 어제 오후, 나는 이 영화가 답답하고 화가 나서 끝까지 보지를 못했다. 분명 똑같은 이야기고, 등장인물들인데 그 밤의 소연은 끔찍하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여자로써 충분히 공감이 됐었다. 누군가는 제대로 사랑하지도 못하는 세상에 아무 조건없이 사랑을 주는 여자. 그리고 그런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하지만 햇빛이 훤한 낮에 본 영화는 달랐다. 너무나 푸르러서 힘들었던 이십대가 끝나감에도 여전히 사랑에 대한 환타지를 가지고 자신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는 남자에게 목 매다는 여자, 그런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라니.
다행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프랑스에서 혼자 겨울을 보내는 소연의 모습이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듯, 추억하는 듯한 얼굴. 나는 내 멋대로 이제 서른이 되는 그녀가 더이상 민환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철없이 그 때는 그랬지 추억은 해도 사랑하고 있지는 않을거라고 결론지어 버렸다. 아직도 여전히 머나먼 프랑스에서까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건 너무나 슬프고 비현실적인 이야기이니까.
+ 마음에 들었던 대사들. 받아적었긴 했지만, 정확하진 않다. :)
이현우 여기서 연기 좋았다고 기사 봤는데, 나는 왜 그렇게 어색한지.
대사가 길어지면 어색해졌던 거 같다. 닭살이 좀 돋더라. 흐-
김보경, 예쁘다는 생각 못했었는데, 이 영화에서 정말 예쁘더라. 청순하면서.
재현 : 소연씨도 어떤 한 사람에게는 너무 착한 여자였다면서요.
재현 : 소연씨 소연씨 누구죠?
소연 :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요.
재현 : 소연씨 소연씨, 저 사람은 아니예요.
언제까지 그거 모른척 할거예요.
남자들이 보면 바로 알아요.
소연씨, 저사람 소연씨 좋아하지 않아요.
남들 눈에 다 그렇게 보이는데 왜 소연씨만 못 봐요?
소연씨도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민환 : 너는 나 그러는 줄 알면서 아직까지도 그러니, 너도 참 청춘이다
너 몰라서 그렇지. 유학생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 서울에 얼마나 많은데.
너 어디가서 꼭 안아주고 싶다.
민환 : 너 아직 청춘이여서 겨울에 챙기는 날 많잖아.
첫눈 오는 날, 크리스마스, 또 니 생일.
시간을 달리는 소녀
츠츠이 야스타카 지음, 김영주 옮김/북스토리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보고 가장 궁금했던 건 마코토의 이모 가즈코의 존재. 츠츠이 야스타카의 원작은 이모 가즈코의 이야기라고 해서 읽어봤다.
소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영화에서 박물관에서 복원사로 근무하는 가즈코 이모의 20여년 전의 이야기다.
영화 속에서 마코토가 타임 립을 처음 경험하고 놀라 가즈코 이모에게 달려가서 상담을 했을 때 가즈코는 전혀 놀라지 않고 당연한듯 마코토에게 이렇게 말한다. 니 또래 여자애들한테는 종종 있는 일이야.
소설 속의 고등학생 가즈코는 어느 날 마코토와 마찬가지로 과학실에서 타임 립을 경험하게 된다. 호두같은 기계에 멀리, 높이 달려나가면 타임 립을 하게 되는 마코토와는 달리 가즈코는 라벤더향이 나는 한 액체의 향기를 맡고난 후부터 타임 립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가즈코는 위험한 순간에 닥쳐 곧 어떻게 되겠구나,고 생각을 하면 타임 립을 하게 된다.
영화와 소설 속의 주인공 자체는 다르지만 경험하게 되는 것은 비슷하다. 과학실에서의 우연한 계기로 타임 립을 시작하게 되는 것, 두 명의 남자친구와 친하게 어울렸던 것, 그 중 한 명의 친구가 타임 립으로 미래에서 왔다는 것, 그리고 그 친구가 주인공을 좋아하게 된 것.
그런데 마코토와 가즈코의 성격은 판이하게 다르다. 마코토는 활달하고 명랑한 외향적인 성격. 치야키와 코스케와 함께 방과 후 캐치볼을 즐기고, 코스케를 짝사랑하는 후배의 마음을 알고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타임 립을 하게 된 이후 그 사실을 너무나 즐겁게 즐긴다. 그런 반면 가즈코는 조심스럽고 부끄럼 많은 내성적인 성격이다. 타임 립을 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친구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생겼다는 이유로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빨리 이 초능력이 내게서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영화 속 가즈코의 분위기와 똑같다.
영화 속 가즈코 이모의 마지막 두 줄의 대사. 넌 나와 다른 성격이라고 늦게 나오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만나러 달려나가는 게 너라고. 가즈코를 좋아했던 미래에서 온 열한살의 친구 가즈오는 미래에서 처음 현재로 왔을 때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억을 심어준 것처럼 미래로 떠날 때 사람들에게 자신의 기억들을 모두 지우고 떠나야한다고 가즈코에게 말한다. 가즈코는 너의 기억을 지우고 싶지 않다고 나한테만 남겨놓아달라고 애원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언젠가 다시 만나러 올 거라는 약속을 하고 가즈오는 미래로 사라진다. 사람들에게 심어진, 가즈코에게 심어진 자신의 기억들과 함께. 영화 속에서는 가즈코 이모가 모두 기억하고 있는 듯하지만, 소설 속에서는 가즈오가 미래로 갈 때 모든 기억을 가지고 가 버린다. 그래서 가즈코의 기억에는 가즈오가 없다. 다만 가즈오가 살던 그 집 앞을 지날 때마다 풍겨져 나오는 라벤더향이 무언가 좋은 느낌, 좋은 사람을 언젠가 꼭 만날 거라는 확신을 가져다 준다는 것뿐. 영화 속 가즈코 이모의 학창시절 사진 옆에 라벤다 꽃이 함께 있는 것은 이런 이유다. 시계와 함께.
소설 속 가즈오는 약물실험을 위해 현재로 왔지만, 영화 속 치아키는 한 편의 그림 때문에 현재로 왔다고 말한다. 이 그림이 너무 보고 싶어서. 보고 마음 속에 간직해두려고.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으면서 어쩌면 치아키가 온, 가즈오가 온 미래는 아주 힘든 상황이라고. 지구촌 곳곳에서 전쟁이 벌어졌던 참혹한 시기에 그려진 한 편의 따스한 그림 때문에 시간을 거슬러 올 정도로. 과거로 가는 실험을 하면서 과거로 가길 원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그 시대의 무언가로 안정을 찾기는 힘든 세상이 아닐까 하는.
그래서 지금 현재를 잘 살아야 한다는 메세지를 전해주는 걸까? 과거를 복원시키는 직업을 가진 가즈오 이모, 그리고 곧 그와 비슷한 일을 할 것 같은 마코토. 역시 과거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잊지 말아야 한다는, 그리고 현재를 열심히 살아나가야 한다는 이야기.
소설, 영화 아직 모두 못 본 분이라면, 소설을 본 다음에 영화를 보는 순서가 좋겠다. 솔직히 소설보다 애니메이션이 훨씬 좋았다. 소설에는 타임 립에 대한 설명들이 좀 더 자세하고, 그리고 가즈코 이모의 과거를 먼저 보고, 현재를 보면 아득하고 아련하고 찡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
And some nights alone. she thinks of him.
Some nights these thoughts occur at the same moment.
"Just so you know, I am sorry for the way I treated you. I did love you"
가끔 내가 그를 떠올릴 때, 그도 나를 떠올리겠지.
같은 시간, 서로를 떠올릴 때도 있겠지.
언젠가 우연히 우리 다시 만나게 되면, 미안했다고 정말 사랑했었다고 말해줄 수도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