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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밀레니엄 맘보 - 2011년으로부터 온 편지
    극장에가다 2008. 2. 17. 20:48

       그녀의 이름은 비키. 그녀에겐 하오라는 연인이 있다. 그녀는 하오와 헤어지고 싶지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주술이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녀는 언제나 제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다짐했다. 예금해둔 돈을 다 써버리는 날, 그를 떠나리라고. 이것은 세계가 축제로 들떠있던 10년 전, 2001년에 일어난 일이다.


       2011년의 비키는 그녀의 10년 전 이야기라며 말문을 연다. 비키는 10년 전 자신을 '그녀'라고 말한다. 마치 10년 전 자신은 자신이 아닌 것처럼. 자신은 그냥 10년 전 비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제3자처럼.

       그러니까 10년 전, 그녀는 열아홉살이였고,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으나 그들은 너무나 어렸고, 그를 버리지도, 떠나버리지도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시간과 시간은 서로 부딪치며 이어졌다. 비틀거리며 술집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면 거기엔 머리를 말리며 비즈구슬이 반짝이는 방에 앉아 있는 그녀가 있었다. 화장실 문을 열면 비틀거리며 테크노 음악을 뒤로 하고 취해 나오는 그녀가 있었다. 대만에서 취한채 뒤돌아보면 어느새 그녀는 일본에서 하얀 눈을 만지며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앞과 뒤, 시간과 장소,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여있었다.

       정말 그녀는 하오를 버렸을까. 잭은 어떻게 됐을까. 비키 앞에 다시 나타났을까. 결국 그녀는 예금해뒀던 돈은 다 써버린 걸까. 정말 그녀는 2011년에 살고 있었을까. 2001년에 비키는 그런 일들을 겪었을까. 눈사람같은 오래된 연인과 지겹게 다투다 그를 떠난 일과, 쌍둥이 형제를 만나러 영화제의 도시, 유바리에서 눈 속에 얼굴을 파묻힌 일 따위 말이다.

        나는 영화를 보고 극장 문을 나서면서 바랬다. 이 문이 열리면 지금의 내가 아닌 그 언젠가의 내가 나타나기를. 그러면 나는 그때의 나를 '그녀'라고 부르리라. 스무살 좋아하는 아이에게서 퇴짜를 맞고 엉엉 울었던 그녀도 좋고, 지금보다 십년 후 어떤 모습일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그녀라도 좋으리라. 나는 어떤 고백들을 하게 될까. 비키처럼 다짐했지만 늘 제자리로 돌아왔던 고백들을 하게 될까.

       나도 일본이 가고 싶어졌다. 비키처럼 유바리로. 눈사람의 고장. 겨울의 영화제. 판타스틱한. 왜 나는 이 영화가 홍보문구처럼 청춘에 관한 이야기라고 느껴지지 않는 걸까. 왜 지우고 싶은데 지워지지 않는 어떤 얼룩같은 이야기를 그녀가 하고 있다고 생각이 든걸까. 침까지 묻혀가면서 애쓰지만 자꾸만 번지기만 하는 그런 얼룩말이다. 결국 같은 말인가. 청춘과 지우고 싶은 기억의 편린은. 2011년이 되면 그녀를 만날 수 있게 될까. 하긴 지금 2008년에 2001년의 그녀를 만났으니 3년이 지나도 2011년의 그녀를 만날 확률은 제로일테지. 2001년의 그녀를 한번 더 만나게 된다면 모르지만.

       

       고가 말했다. 유바리의 겨울은 무지 춥다고. 영하 30도. 그곳은 눈사람의 고장이었다. 해가 뜨면 눈사람은 녹아 사라지겠지. 하오하오와 사랑을 나누던 어느 날, 문득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오하오는 눈사람과 같다고. 해가 뜨면 그도 사라지겠지. 그 날 나눈 사랑은 서글펐었다. 세월이 흐른 후에도 그녀는 그것을 기억했다. 그건 10년 전인 2001년의 일이었다. 그해 유바리엔 눈이 아주 많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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