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남쪽 나라에서 보낸 나의 겨울은 따뜻했다. 그 200일 동안 긴장을 풀고, 서두르지 않고, 마치 현지인이라도 된 듯 슬렁슬렁 돌아다녔다. 매일 산책을 했고, 책도 많이 읽었고, 제법 글을 쓰기도 했다. 만날 사람도 없고, 할 일도 적다 보니 나 자신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었다. 고요히 호흡을 고름으로써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필요한 에너지를 채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서울에서보다 생활비가 훨씬 적게 든 건 물론이다. 일상보다 설레고, 여행보다 편안한 날들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겨울이 오면 따뜻한 남쪽 나라를 찾아가는 삶의 방식을 고수하게 될 것 같다. 여행과 일상의 중간지대에 머물며 덜 쓰고 덜 갖되 더 충만한 시간을 보내면 어떨까.

 

   미디어와 인터넷의 발달은 모두가 같은 곳을 찾아가 같은 것을 소비하고, 같은 사진을 찍고, 같은 방식으로 여행하게끔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나만의 여행법을 찾아 조심스럽게 두리번거리는 여행자가 있다고 믿는다. 자기만의 속도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좇아 떠나는 여행, 여행 안에 여백을 두는 여행, 무엇보다 여행지의 삶과 사람들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여행...

 

   비싼 여행비를 감당할 수 없는 가난한 20대의 청춘들이, 살아남기 위해 달려왔지만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 건가 가끔씩 두려워지는 30대와 40대가, 아이가 성장하거나 직장에서 은퇴해 이제야 겨우 혼자만의 시간을 갖게 된 50대와 60대가, 여전히 젊은 정신을 간직한 70대와 80대가 이 책을 읽고 떠날 수 있다면, 그래서 저마다의 따뜻한 남쪽 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면, 나에게도 이 길을 계속 갈 수 있는 힘이 생겨날 것 같다.

- p. 8-9, 프롤로그

 

 

    지난 남미 이야기에 실망을 한 부분이 있어, 따뜻한 남쪽 나라 이야기를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망설였는데, 표지의 바다빛깔이 너무 고아서 바로 주문했더랬다. 이번 여행기는 프롤로그에서부터 마음에 들었다. 서울의 추위를 피해 떠난 남쪽 나라에서 걷고, 먹고, 생각하고, 만난 이야기들. 특히 치앙마이에서는 E언니가 내가 좋아할 것 같다고 추천해준 블로그의 주인장이 등장해서 깜짝 놀랬다. 그녀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태국 남자와 만나 단번에 사랑에 빠졌고, 그 남자의 나라에서 아이 셋을 낳고 살아가고 있는 강하면서도 고요한 사람. 영화 <수영장>의 촬영지였던 호시아나 빌리지 이야기도 나온다. 언젠가 치앙마이에 가게 되면 이 두 곳에서 묵어보고 싶다.

 

    올해 여름휴가를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 중이다. 하반기에 또 팀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여름성수기 전에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어디가 좋을까. 아직 형편없지만 일본어를 배우고 있으니 써 볼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기도 하고, 일본은 여러 번 갔으니 가본적 없는 이국적인 곳으로 가고 싶기도 하고. 일단 교토 한 곳에서 느긋하게 머무는 여행을 생각하고 있다. 혼자서 이국에서 생일을 보내보는 것도 생각중이다. 교토의 이곳저곳을 아기자기한 일러스트와 함께 소개한 책자가 있어 주문해놓았는데, 지금 실력으로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어디가 될지 모르겠지만 가게 되면 한 곳에서 오래 머물고 싶다. 김남희처럼 하루정도 그 나라 전통음식을 배워볼 수 있는 요리수업도 꼭 한번 들어보고 싶다. 이런저런 꿈들을 꾸어본다.

 

 

   누군가와 함께하는 여행은 익숙했던 상대를 재발견하게 만든다. 내 안에 단단하게 굳어있던 상대에 대한 이미지를 녹여준다. 엄마와 함께 여행을 떠나오다니, 참 잘했다. -p.29

 

  내 이름은 그의 추억 속에 잠시 머물 것이다. 서치의 이름도 그럴 것이다. 아마도 우리는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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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빠진 아이가 있다. 최근에. 그 애는 순식간에 그 사람에게 빠졌다. 좋아하게 됐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자마자 웃고, 늘 그 사람 생각을 한다. 왜 그 사람은 나한테 이 말을 하지 않을까? 그 사람은 나를 안 좋아하나봐. 나를 마주할 때마다 그 사람 이야기 뿐이다. 그 사람을 만나고부터 밤에 잠을 잘 못 자고, 입맛도 없어졌단다. 주말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예쁜 집에서 살고 싶어졌어, 라며 청소를 하기 시작하기도 한다. 평소에 절대 청소를 하지 않는 아이가. 사랑의 힘은 이런 거구나. 긍정적인 기운이 그 아이 주위에 가득했다. 그래, 연애, 해 볼만 한 거구나 생각했다.

 

   아이가 사랑에 빠진 동안 이 책들을 읽었다. 김남희가 1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고 온 얘기. 그 책에서도 화두는 '사랑'이다. 김남희는 남미를 여행하다 사랑에 빠졌다. 유희열과 이적과 윤상도 여행했던 바로 그 곳, 페루의 쿠스코에서.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호탕했고, 붙임성도 있었다. 베테랑 여행자인 여자와 초보 여행자 남자. 둘은 보름을 함꼐 어울려 다녔다. 때로는 둘이, 때로는 여럿이. 남자는 불꽃놀이를 보고 숙소에 있는 여자에게 달려갔다. "빨리 옷 입고 나와요. 불꽃놀이가 엄청 아름다워요." 남자는 여자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름다운 것을 함께 보고 싶었다. 남자는 일정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갔고, 여자는 혼자 남았다. 여자는 남자를 생각했다. 남자도 여자를 생각했겠지. 두 사람은 그 뒤로 계속 연락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남자가 노래로 고백을 했다.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 그곳엔 푸른발부비새가 산다. 빼어난 수직 낙하 다이빙 실력을 가진 새. 그런데 알을 훔쳐가기가 너무 쉬워 '얼간이'라고 불린단다. 김남희와 같이 에콰도르를 여행을 하던 지인이 말한다. "언니, 부비가 물속으로 다이빙하듯 사랑 속으로 뛰어들어요." 이 구절을 사랑에 빠진 아이에게 이야기해줬더니 보여달란다. 그래서 읽어줬더니, 너무 좋다, 그런다. 역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은 다 똑같구나.

 

   이상하지. 이걸 읽기 위해 이 책을 샀는데. 김남희가 남미 여행 중에 사랑에 빠졌다, 라는 소개를 보고 읽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사랑이 남자가 다시 남미로 날라와 이어지자, 그래서 여행기가 오직 남자 '감자씨'로 가득하게 되자, 심지어 1년 뒤 다시 찾은 브라질에서도 혼자 두고 온 아픈 남자를 생각하고,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바뀌자, 이 여행기가 내게 좀 시들해졌다. 그래서 1권은 설레기까지 하면서 신나게 아침이며 저녁이며 빠른 속도로 읽어댔는데, 2권은 좀 더뎠다. 1권에는 포스트잇을 잔뜩 붙였는데, 2권에는 4개만 붙였다. 나만 이럴까, 궁금해졌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읽었는지, 읽고 있는지, 그리고 읽을지.

 

    에콰도르에 가고 싶어졌고, 혼자 하는 여행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했다. 김남희가 이혼을 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그동안 꽤 많은 책을 읽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여행에 대해 생각했다. 여행의 장단점에 대해. 어떤 여행이 좋은 여행인가에 대해. 분명한 건, 내가 하는 여행이 최고인 건 맞지만, 내 여행만이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더 많은, 다양한 여행을 하고 싶다는 것. 천천히, 그리고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여행을 시작한 이후 죽어가던 내 안의 촉수 하나가 슬며시 깨어나고 있다. 한때는 그 어떤 두근거림도 없던 날들을 평화롭다고 생각했다. 사무친 외로움도, 떠올릴 얼굴 하나 없는 밤들이 여유롭다고 믿었다. 그래서 슬픔도 외로움도 모른 채 한 줄의 일기조차 쓰지 못하는 날들을 보냈다. 길 위에서 나는 다시 외로움에 사로잡힌 볼모가 되었다. 날마다 흔들리고, 질문하고, 만나고, 헤어지며 생생히 깨어 하루하루 보내는 날이 없다. 결국 내게 행복한 삶이란 이런 것일까. 아직은 여행만이 내 심장을 고동치게 만들고, 살아 있다는 느낌으로 가득 차오르게 한다. 나이 마흔을 넘기고도 여전히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있다는 것, 삶이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임을 매일 느낄 수 있다니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지!

- 135쪽 <라틴아메리카 춤추듯 걷다>

 

 어떤 장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그곳에 새겨진 추억이다. 나의 아마존 여행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건 함께한 이들 덕분이었다. 활기 넘치고, 호기심 가득한 벗들이 있어 매 순간이 즐거웠다. 우연히 만나 이곳까지 동행한 아저씨 또한 최고의 여행 친구였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길 위에서 마음을 단단히 여민 채 걷고 있었다. 헤어지고 혼자 남겨지는 일이 두려웠기에. 지난 다섯 달간, 며칠을 함께 보낸 이와 헤어질 때면 나는 조금 쓸쓸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눈물은 내게서 사라졌고, 아무렇지 않은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 대륙이 품고 있는 경이로운 자연에 위로받았지만 사람 때문에 울고 웃는 날들은 아니었다. 가뭄에 바싹 말라가는 논바닥처럼 건조한 내 모습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메마름이 질척함보다는 낫다고 여겼는데... 아저씨는 다시 길 위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었다. 다시 나를 울게 만들었다. 아저씨와 헤어진 후 나는 조금 용감해진 걸까. 일정 따위는 무시한 채 벗을 찾아 야간버스에 오르는 걸 보니. 세계 최대의 습지인 판타날에서 일주일을 함께 보낸 베키와 필을 만나기 위해 나는 지금 볼리비아의 남쪽 도시로 가고 있다. 일정이 좀 꼬이면 어때. 그게 여행인 걸. 헤어진 후에 좀 울게 된다 해도, 잠깐 만나고 오래 그리워해야 한다 해도, 괜찮다. 어차피 여행은 정들어 익숙한 것들과 헤어지는 연습을 하는 거니까. 삶은 결국 이별하는 과정이다.

- 199쪽 <라틴아메리카 춤추듯 걷다>

 

    여행이란 결국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고립이다. 그 고립과 단절이 자신과 타인에 대해 더 예민한 감성의 촉수를 일깨우고, 주변의 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보는 시선을 가능케 한다.

- 248쪽 <라틴아메리카 춤추듯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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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걷고 싶은 길 2 : 규슈.시코쿠
김남희 지음/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숙소로 돌아와 이자카야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온천욕탕으로 들어간다. 밤의 노천탕을 혼자서 즐긴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고개를 드니 별들이 초롱초롱 빛난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 깊어간다.
- p.48


   이 구절은 고성의 고향집에서 읽은 것. 그녀는 규슈의 유후인에 있었다. 산행을 마치고 온천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있는 그녀의 노곤하고도 행복한 기분을 상상해봤다. 머리 위로 별이 총총하고, 혼자인 밤. 나는 수첩에 '유후인'이라고 적는다. 언젠가 가 보아야지 생각한다.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많고, 따뜻한 온천수가 흘러들어 물안개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호수가 있는 마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사랑하는 마을. 센과 치히로와 토토로의 배경이 되었던 곳. 나는 늦여름 바람이 솔솔 불어드는 고향집에 앉아 유후인의 바람을 상상한다. 이 날, 나는 바닷가까지 산책을 하고 왔다. 그날 유후인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순례는 그 마무리마저 지극히 불교적이었다. 미사에서 신부님이 호명을 하고 모두들 눈물을 쏟아내던 산티아고와는 달랐다. 그 어떤 대리인도, 예식도 없이 일대일로 부처와 대면할 뿐. 시작이 그랬듯 혼자서, 자기만의 힘으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반야심경을 외며 혼자 앉아 있는 마지막 밤. 이 담백한 마무리도 나쁘지 않다.
- p.251


   이 문장들은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읽었다. 드문드문 차가 막혔고, 휴게소를 두 군데 들렀다. 휴게소에서 우리는 반건조 오징어와 우동을 사 먹었다. 그녀는 시코쿠를 걸었다. 산티아고의 순례길처럼 일본의 시코쿠에도 불교 순례길이 있다. 88개의 절을 순례하는 길이다. 그녀는 이 긴 길을 여름에 출발해서 가을을 거쳐 겨울까지 걸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겨울, 그녀의 여행이 끝났다. 오셋타이. 시코쿠 사람들은 순례길을 걷는 이들에게 오셋타이라고 공양물을 건넨다. 무엇이든 된다. 돈이든, 귤이든, 차든, 빵이든. 그들의 순례길에 힘이 될 수 있는 무언가. 순례자들은 오셋타이를 거절해서는 안된다. 그녀가 건네 받은 오셋타이, 그녀가 머무른 료칸과 민슈쿠. 그녀가 만난 사람들. 

   나는 추석 연휴동안 그녀의 길을 따라 걸었다. 여름에서 시작해 가을을 거쳐 눈이 내리는 겨울까지. 명절 때면 꼭 책 한 권 이상 가지고 가는데, 한번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이번 설에 처음으로 한 권을 다 읽었다. 오지은의 홋카이도 여행기. 그래서 이번에도 여행기를 택했다. 내려가면서 시작해 올라오면서 다 읽었다. 여행기를 읽으면 명절의 불편한 감정들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된다. 올라오는 버스에서 마지막 장을 넘기면 다시 일상이구나, 힘들었지만 고마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잊을 수 없는 명절의 여행책. 이번 추석도 너와 함께 잘 넘겼다. 

   1권은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다 고속터미널 영풍문고에서 각각 하나씩 구입했다. 치맥을 먹다 아마도, 언젠가 일본여행을 가자면서, 최근에 일본 여행책이 나왔다면서, 그렇다면 당장 가서 사서 읽자면서 서점으로 달려갔겠지. 터미널 건너편 지하의 통닭집이었을 거다. 우리가 잘 가던 곳. 통닭 반마리 시켜놓고 맥주를 끝없이 들이부었던 곳. 술을 깨고 책을 읽기 시작하니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였다. 그때는 이 책이 불만스러웠다. 이유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사진이 너무 많아서리라. 책 뒤에 부록으로 들어가 있는 여행 정보나, 간단한 일본어 팁 때문이리라. 그것이 글자가 들어갈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일본을 다녀오고, 이 책을 읽으니 좋다. 좋아졌다. 푸릇푸릇한 사진이 많은 것도 좋고, 언젠가 가고 싶으니 자세한 여행 정보도 고맙다. 일본어 팁 페이지는 여행갈 때 오려가지고 가야지. 그녀가 만난 사람들도 좋고, 그들과 나눈 이야기들도 좋고, 그녀의 독백도 좋고, 그녀의 투정도 좋다. 나도 가고 싶다. 그 길을 걷고, 그 사람들을 만나고, 투정부리고 싶다. 

   언젠가 그녀가 걸었던 그 길을 나도 걸을 수 있을까. 그녀에게 생긴 물집이 내게도 생길 수 있을까. 그녀가 본 7200년 된 오래된 나무 조몬스기를 만날 수 있을까. 그녀가 감탄한 남쪽의 오키나와 섬을 가볼 수 있을까. 오랜 시간과 강인한 체력과 한없는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시코쿠 순례길은 어떻고. 대신 나는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녀가 순례길에서 극찬한 사누키 우동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금요일 모두가 약속이 있는 날, 나는 연락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퇴짜를 맞고 홍대에 있다는 사누키 우동 전문점에 찾아갔다. 주택가에 있어 헤매느라 오래 걸렸다. 자리에 앉아 우동과 튀김 세트를 주문하고, 용감하게 생맥주 300cc도 주문했다. 나는 그 음식들을 창가의 자리에 혼자 앉아 모두 다 해치웠다. 면을 먹고, 국물도 마시고, 튀김도 연한 간장에 찍어 먹고, 중간중간 맥주도 마셨다. 내 생애 처음으로 '가게'에서 혼자 마셔본 술이었다. 기분이 괜찮았다. 어디론가 여행을 온 것도 같았고, 내가 근사해진 것도 같았다. 


   이곳에 오기까지 꼭 한 달하고도 보름이 걸렸다. 길은 삼천 리, 풍경은 다채로웠다. 산과 바다와 들과 마을을 넘나드는 길. 길은 세상을 향해 곧게 뻗어 있기도 했고, 구불거리며 산 깊이 잦아들기도 했다. 바다를 곁에 두고 걷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빈 들판에 혼자 남겨지기도 했다. 두 시간을 걷고 같은 자리로 돌아온 적도 있었고, 새벽 산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눈물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올 수 있었던 건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고 멀어져갔다. 나는 늘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받았다. 한 끼 더운 밥이며 음료수 같은 것부터 진심 어린 애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을. 기코쿠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이야말로 이 길을 특별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다. 수백 년 동안 그렇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순례자들에게 공양을 바쳐온 주민들의 정성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시코쿠만의 선물이다. 
-p.244



일본의 걷고 싶은 길 1 : 홋카이도.혼슈
김남희 지음/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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