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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의 걷고 싶은 길 - 2011년 추석책
    서재를쌓다 2011. 9. 16. 21:30

    일본의 걷고 싶은 길 2 : 규슈.시코쿠
    김남희 지음/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숙소로 돌아와 이자카야에서 저녁을 먹고, 다시 온천욕탕으로 들어간다. 밤의 노천탕을 혼자서 즐긴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고개를 드니 별들이 초롱초롱 빛난다. 여행의 마지막 밤이 깊어간다.
    - p.48


       이 구절은 고성의 고향집에서 읽은 것. 그녀는 규슈의 유후인에 있었다. 산행을 마치고 온천에 들어가 몸을 녹이고 있는 그녀의 노곤하고도 행복한 기분을 상상해봤다. 머리 위로 별이 총총하고, 혼자인 밤. 나는 수첩에 '유후인'이라고 적는다. 언젠가 가 보아야지 생각한다.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많고, 따뜻한 온천수가 흘러들어 물안개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호수가 있는 마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사랑하는 마을. 센과 치히로와 토토로의 배경이 되었던 곳. 나는 늦여름 바람이 솔솔 불어드는 고향집에 앉아 유후인의 바람을 상상한다. 이 날, 나는 바닷가까지 산책을 하고 왔다. 그날 유후인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순례는 그 마무리마저 지극히 불교적이었다. 미사에서 신부님이 호명을 하고 모두들 눈물을 쏟아내던 산티아고와는 달랐다. 그 어떤 대리인도, 예식도 없이 일대일로 부처와 대면할 뿐. 시작이 그랬듯 혼자서, 자기만의 힘으로,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반야심경을 외며 혼자 앉아 있는 마지막 밤. 이 담백한 마무리도 나쁘지 않다.
    - p.251


       이 문장들은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버스 안에서 읽었다. 드문드문 차가 막혔고, 휴게소를 두 군데 들렀다. 휴게소에서 우리는 반건조 오징어와 우동을 사 먹었다. 그녀는 시코쿠를 걸었다. 산티아고의 순례길처럼 일본의 시코쿠에도 불교 순례길이 있다. 88개의 절을 순례하는 길이다. 그녀는 이 긴 길을 여름에 출발해서 가을을 거쳐 겨울까지 걸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겨울, 그녀의 여행이 끝났다. 오셋타이. 시코쿠 사람들은 순례길을 걷는 이들에게 오셋타이라고 공양물을 건넨다. 무엇이든 된다. 돈이든, 귤이든, 차든, 빵이든. 그들의 순례길에 힘이 될 수 있는 무언가. 순례자들은 오셋타이를 거절해서는 안된다. 그녀가 건네 받은 오셋타이, 그녀가 머무른 료칸과 민슈쿠. 그녀가 만난 사람들. 

       나는 추석 연휴동안 그녀의 길을 따라 걸었다. 여름에서 시작해 가을을 거쳐 눈이 내리는 겨울까지. 명절 때면 꼭 책 한 권 이상 가지고 가는데, 한번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다. 이번 설에 처음으로 한 권을 다 읽었다. 오지은의 홋카이도 여행기. 그래서 이번에도 여행기를 택했다. 내려가면서 시작해 올라오면서 다 읽었다. 여행기를 읽으면 명절의 불편한 감정들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된다. 올라오는 버스에서 마지막 장을 넘기면 다시 일상이구나, 힘들었지만 고마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잊을 수 없는 명절의 여행책. 이번 추석도 너와 함께 잘 넘겼다. 

       1권은 친구와 함께 술을 마시다 고속터미널 영풍문고에서 각각 하나씩 구입했다. 치맥을 먹다 아마도, 언젠가 일본여행을 가자면서, 최근에 일본 여행책이 나왔다면서, 그렇다면 당장 가서 사서 읽자면서 서점으로 달려갔겠지. 터미널 건너편 지하의 통닭집이었을 거다. 우리가 잘 가던 곳. 통닭 반마리 시켜놓고 맥주를 끝없이 들이부었던 곳. 술을 깨고 책을 읽기 시작하니 생각했던 것보다 별로였다. 그때는 이 책이 불만스러웠다. 이유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사진이 너무 많아서리라. 책 뒤에 부록으로 들어가 있는 여행 정보나, 간단한 일본어 팁 때문이리라. 그것이 글자가 들어갈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일본을 다녀오고, 이 책을 읽으니 좋다. 좋아졌다. 푸릇푸릇한 사진이 많은 것도 좋고, 언젠가 가고 싶으니 자세한 여행 정보도 고맙다. 일본어 팁 페이지는 여행갈 때 오려가지고 가야지. 그녀가 만난 사람들도 좋고, 그들과 나눈 이야기들도 좋고, 그녀의 독백도 좋고, 그녀의 투정도 좋다. 나도 가고 싶다. 그 길을 걷고, 그 사람들을 만나고, 투정부리고 싶다. 

       언젠가 그녀가 걸었던 그 길을 나도 걸을 수 있을까. 그녀에게 생긴 물집이 내게도 생길 수 있을까. 그녀가 본 7200년 된 오래된 나무 조몬스기를 만날 수 있을까. 그녀가 감탄한 남쪽의 오키나와 섬을 가볼 수 있을까. 오랜 시간과 강인한 체력과 한없는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시코쿠 순례길은 어떻고. 대신 나는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녀가 순례길에서 극찬한 사누키 우동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금요일 모두가 약속이 있는 날, 나는 연락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퇴짜를 맞고 홍대에 있다는 사누키 우동 전문점에 찾아갔다. 주택가에 있어 헤매느라 오래 걸렸다. 자리에 앉아 우동과 튀김 세트를 주문하고, 용감하게 생맥주 300cc도 주문했다. 나는 그 음식들을 창가의 자리에 혼자 앉아 모두 다 해치웠다. 면을 먹고, 국물도 마시고, 튀김도 연한 간장에 찍어 먹고, 중간중간 맥주도 마셨다. 내 생애 처음으로 '가게'에서 혼자 마셔본 술이었다. 기분이 괜찮았다. 어디론가 여행을 온 것도 같았고, 내가 근사해진 것도 같았다. 


       이곳에 오기까지 꼭 한 달하고도 보름이 걸렸다. 길은 삼천 리, 풍경은 다채로웠다. 산과 바다와 들과 마을을 넘나드는 길. 길은 세상을 향해 곧게 뻗어 있기도 했고, 구불거리며 산 깊이 잦아들기도 했다. 바다를 곁에 두고 걷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빈 들판에 혼자 남겨지기도 했다. 두 시간을 걷고 같은 자리로 돌아온 적도 있었고, 새벽 산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눈물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런데도 끝까지 올 수 있었던 건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 덕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다가오고 멀어져갔다. 나는 늘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받았다. 한 끼 더운 밥이며 음료수 같은 것부터 진심 어린 애정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을. 기코쿠 주민들의 따뜻한 마음이야말로 이 길을 특별하고 아름답게 만드는 힘이다. 수백 년 동안 그렇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순례자들에게 공양을 바쳐온 주민들의 정성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시코쿠만의 선물이다. 
    -p.244



    일본의 걷고 싶은 길 1 : 홋카이도.혼슈
    김남희 지음/미래인(미래M&B,미래엠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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