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김남희가 매혹된 라틴아메리카
    서재를쌓다 2014. 12. 4. 23:35

     

     

       사랑에 빠진 아이가 있다. 최근에. 그 애는 순식간에 그 사람에게 빠졌다. 좋아하게 됐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전화가 오면 전화를 받자마자 웃고, 늘 그 사람 생각을 한다. 왜 그 사람은 나한테 이 말을 하지 않을까? 그 사람은 나를 안 좋아하나봐. 나를 마주할 때마다 그 사람 이야기 뿐이다. 그 사람을 만나고부터 밤에 잠을 잘 못 자고, 입맛도 없어졌단다. 주말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예쁜 집에서 살고 싶어졌어, 라며 청소를 하기 시작하기도 한다. 평소에 절대 청소를 하지 않는 아이가. 사랑의 힘은 이런 거구나. 긍정적인 기운이 그 아이 주위에 가득했다. 그래, 연애, 해 볼만 한 거구나 생각했다.

     

       아이가 사랑에 빠진 동안 이 책들을 읽었다. 김남희가 1년 동안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하고 온 얘기. 그 책에서도 화두는 '사랑'이다. 김남희는 남미를 여행하다 사랑에 빠졌다. 유희열과 이적과 윤상도 여행했던 바로 그 곳, 페루의 쿠스코에서. 남자를 만났다. 남자는 호탕했고, 붙임성도 있었다. 베테랑 여행자인 여자와 초보 여행자 남자. 둘은 보름을 함꼐 어울려 다녔다. 때로는 둘이, 때로는 여럿이. 남자는 불꽃놀이를 보고 숙소에 있는 여자에게 달려갔다. "빨리 옷 입고 나와요. 불꽃놀이가 엄청 아름다워요." 남자는 여자에게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름다운 것을 함께 보고 싶었다. 남자는 일정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갔고, 여자는 혼자 남았다. 여자는 남자를 생각했다. 남자도 여자를 생각했겠지. 두 사람은 그 뒤로 계속 연락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남자가 노래로 고백을 했다.

     

       에콰도르의 갈라파고스. 그곳엔 푸른발부비새가 산다. 빼어난 수직 낙하 다이빙 실력을 가진 새. 그런데 알을 훔쳐가기가 너무 쉬워 '얼간이'라고 불린단다. 김남희와 같이 에콰도르를 여행을 하던 지인이 말한다. "언니, 부비가 물속으로 다이빙하듯 사랑 속으로 뛰어들어요." 이 구절을 사랑에 빠진 아이에게 이야기해줬더니 보여달란다. 그래서 읽어줬더니, 너무 좋다, 그런다. 역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은 다 똑같구나.

     

       이상하지. 이걸 읽기 위해 이 책을 샀는데. 김남희가 남미 여행 중에 사랑에 빠졌다, 라는 소개를 보고 읽기 시작했는데, 그녀의 사랑이 남자가 다시 남미로 날라와 이어지자, 그래서 여행기가 오직 남자 '감자씨'로 가득하게 되자, 심지어 1년 뒤 다시 찾은 브라질에서도 혼자 두고 온 아픈 남자를 생각하고, 안타까워하고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바뀌자, 이 여행기가 내게 좀 시들해졌다. 그래서 1권은 설레기까지 하면서 신나게 아침이며 저녁이며 빠른 속도로 읽어댔는데, 2권은 좀 더뎠다. 1권에는 포스트잇을 잔뜩 붙였는데, 2권에는 4개만 붙였다. 나만 이럴까, 궁금해졌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읽었는지, 읽고 있는지, 그리고 읽을지.

     

        에콰도르에 가고 싶어졌고, 혼자 하는 여행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했다. 김남희가 이혼을 했다는 사실은 처음 알았다. 그동안 꽤 많은 책을 읽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여행에 대해 생각했다. 여행의 장단점에 대해. 어떤 여행이 좋은 여행인가에 대해. 분명한 건, 내가 하는 여행이 최고인 건 맞지만, 내 여행만이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더 많은, 다양한 여행을 하고 싶다는 것. 천천히, 그리고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여행을 시작한 이후 죽어가던 내 안의 촉수 하나가 슬며시 깨어나고 있다. 한때는 그 어떤 두근거림도 없던 날들을 평화롭다고 생각했다. 사무친 외로움도, 떠올릴 얼굴 하나 없는 밤들이 여유롭다고 믿었다. 그래서 슬픔도 외로움도 모른 채 한 줄의 일기조차 쓰지 못하는 날들을 보냈다. 길 위에서 나는 다시 외로움에 사로잡힌 볼모가 되었다. 날마다 흔들리고, 질문하고, 만나고, 헤어지며 생생히 깨어 하루하루 보내는 날이 없다. 결국 내게 행복한 삶이란 이런 것일까. 아직은 여행만이 내 심장을 고동치게 만들고, 살아 있다는 느낌으로 가득 차오르게 한다. 나이 마흔을 넘기고도 여전히 가슴 두근거리는 일이 있다는 것, 삶이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임을 매일 느낄 수 있다니 나는 얼마나 행운아인지!

    - 135쪽 <라틴아메리카 춤추듯 걷다>

     

     어떤 장소를 특별하게 만드는 건 그곳에 새겨진 추억이다. 나의 아마존 여행이 아름다울 수 있었던 건 함께한 이들 덕분이었다. 활기 넘치고, 호기심 가득한 벗들이 있어 매 순간이 즐거웠다. 우연히 만나 이곳까지 동행한 아저씨 또한 최고의 여행 친구였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길 위에서 마음을 단단히 여민 채 걷고 있었다. 헤어지고 혼자 남겨지는 일이 두려웠기에. 지난 다섯 달간, 며칠을 함께 보낸 이와 헤어질 때면 나는 조금 쓸쓸했지만 울지는 않았다. 눈물은 내게서 사라졌고, 아무렇지 않은 날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이 대륙이 품고 있는 경이로운 자연에 위로받았지만 사람 때문에 울고 웃는 날들은 아니었다. 가뭄에 바싹 말라가는 논바닥처럼 건조한 내 모습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메마름이 질척함보다는 낫다고 여겼는데... 아저씨는 다시 길 위에서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었다. 다시 나를 울게 만들었다. 아저씨와 헤어진 후 나는 조금 용감해진 걸까. 일정 따위는 무시한 채 벗을 찾아 야간버스에 오르는 걸 보니. 세계 최대의 습지인 판타날에서 일주일을 함께 보낸 베키와 필을 만나기 위해 나는 지금 볼리비아의 남쪽 도시로 가고 있다. 일정이 좀 꼬이면 어때. 그게 여행인 걸. 헤어진 후에 좀 울게 된다 해도, 잠깐 만나고 오래 그리워해야 한다 해도, 괜찮다. 어차피 여행은 정들어 익숙한 것들과 헤어지는 연습을 하는 거니까. 삶은 결국 이별하는 과정이다.

    - 199쪽 <라틴아메리카 춤추듯 걷다>

     

        여행이란 결국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고립이다. 그 고립과 단절이 자신과 타인에 대해 더 예민한 감성의 촉수를 일깨우고, 주변의 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보는 시선을 가능케 한다.

    - 248쪽 <라틴아메리카 춤추듯 걷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