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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초의 한모금, 에비수 맥주박물관
    서재를쌓다 2014. 10. 12. 11:15

     

        도쿄는 흐렸다. 여행 첫날이었다. 이른 아침에 인천에서 출발했는데, 도착해보니 낮인지 저녁인지 모를 정도로 흐렸다. 그래서 걷기 좋았다. 비도 오지 않았고, 원래 흐린 날을 좋아하기도 하고. 넥스를 타고 고탄다에서 내려 1시간 넘게 기다려 스테이크를 먹고, 메구로의 숙소로 이동했는데 Y언니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감기가 오려고 하고 있었다. 이날의 원래 일정은 고탄다에서 함박스테이크 런치를 먹고 (우린 늦어서 런치를 못 먹었지 ㅠ), 메구로 숙소에 짐을 풀고, <최고의 이혼> 배경지 나카메구로를 걷고, 부유한 동네라는 다이칸야마를 구경하고, 에비스에서 저녁으로 유자라멘을 먹는 것. 아, 에비스 전에 일정이 있었다. 에비수 맥주박물관에서 갓 나온 신선한 에비수 생맥주를 마시는 것. 결국 언니는 다음날 일정을 위해 숙소에서 몸을 추스리기로 하고, 나 혼자 길을 나섰다. 언니에게서 에비스 가는 방향 설명을 들었다. 숙소 앞에서 길을 건넌 뒤 쭉 직진을 하다 우회전을 하면 된다고. 언니 말대로 쭉 직진을 하다 나타날 때쯤 됐는데 생각이 들었을 때 우회전을 하니 가든 플레이스가 보였다. 거기서부터 가이드북 지도를 보고 맥주박물관을 찾아가는데, 지도에 있는 건물들이 나오지 않자 정신이 혼미해졌다. 헤매다 어떻게 할까 용기내서 경비원에게 물어볼까 생각하고 있던 차에 나타났다. 맥주박물관!

     

        말이 박물관이지 그리 크지 않았다. 오래된 맥주병, 잔들을 훑어보고 바로 테이스팅 살롱으로 이동했다. 가이드북에 따르면 이곳에서 갓나온 신선한 생맥주를 마실 수 있다 했다. 지난 오사카 여행에서 남은 동전 400엔을 넣고 에비수 코인으로 바꿨다. 코인 하나에 생맥주 한 잔씩을 마실 수 있다. 스테이크를 먹고 얼마되지 않은 터라 안주 없이 맥주만 마시기로 했다. 에비수 프리미엄 맥주와 에비수 흑맥주를 반씩 섞은 프리미엄 믹스로 주문했다. 고레 히또쯔 구다사이. 맥주를 주문 받으면 그 맥주에 맞는 컵받침을 준다. 그걸 옆 맥주대에 보여주면 거기에 맞는 맥주를 따라서 짠-하고 올려준다. 따르는 걸 봤는데, 맥주거품이 넘치도록 따른 후에 자 같은 물건으로 거품을 맥주 잔에 딱맞게 잘라낸다. 그리고 컵 주위에 묻은 맥주를 닦아내고 건네준다. 한 잔을 들고 구석자리에 가서 앉았다. 의자와 테이블이 높았다. 거기서 맥주를 마시며 이 책을 읽었다.

     

        먹거리의 추억.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먹었는가?

        잊어버린 기억이 더 많지만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억도 많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그날이 특별한 날이었냐고 묻는다면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내가 콜라를 처음으로 마신 날도, 흔하고 흔한 여름날의 오후였다. 

       친구가 살던 단층의 연립주택. 햇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부엌. 그대로 선 채 콜라를 마셨던 환상적인 그날의 나. 옆에 있던 친구도, 친구의 어머니도 수다를 떨며 웃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여름날에 누군가가 함께 웃고 있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무것도 아닌 날들이 쌓여 과거가 되는 것이기에 그 날, 아무것도 아닌 날에 웃고 있던 예전의 나를 추억하게 해 주는 콜라의 존재.

        과연 작았을까?

        오히려 최초의 한입은 미래의 자신에게 용기를 복돋아주는 커다란 한입이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p. 214-215, 끝내면서.

       

        끝내면서, 부터 읽었는데, 이 부분을 읽고 왠지 코끝이 찡해졌다. 벌써 취한건가, 생각하며 높은 테이블에서 내려와 이번 여행을 위해 새로 환전한 천엔짜리 지폐를 꺼내 자판기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이번 코인으로는 퍼펙트 에비수를 주문했다. 여기저기서 한국어가 들렸다. 두번째 맥주를 받을 때 조그맣게 아리가또 고자이마스, 라고 했더니 뭐라고 한마디를 더 해준다. 흑. 그렇지만 나는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코인을 받는 총각이 잘 생겼었다! 두번째 맥주를 마실 때는 이어폰을 꺼내 김동률을 들었다. 그리고 구석 높은 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혼자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는 중년의 남자도 있었고, 나랑 같은 가이드북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도 있었다. 그 한국인 무리는 두 명이서 맥주 한 잔과 두 잔을 각각 마시고 떠났다. 책을 읽고 있는 중년의 남자가 내 앞에 또 있었는데, 그 사람 등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 등이 좀 외로워보였는데, 쓸쓸해보이지는 않았다. 그 미묘하고 기묘한 차이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렇게 두 잔을 마시고 가든 플레이스의 야경을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1시간 전만 해도 생소했던 길이었는데, 한 번 걸어봤다고 익숙해져 버린 그 길을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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