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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고도를 사랑한다
    서재를쌓다 2014. 9. 15. 22:37

     

       

        어른이 되고 경주를 세 번 갔다. 한 번은 무더운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불국사 길을 걸었다. 한 번은 추운 겨울에. 매서운 칼바람을 맞으며 문무대왕릉을 보러 갔다. 그리고 올해 늦여름. 부산에 기록적인 폭우가 내린 날, 경주에 있었다. 비를 쫄딱 맞으며 양동마을을 걸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왔더니 딱 때를 맞춰 이 책이 출간되었다. 마침 옛다, 읽으렴, 이라는 듯. 세 번이나 다녀왔으니 경주를 좀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읽으니 나는 아직도 경주를 모른다. 하긴 소개팅을 해도 세 번을 만나고 더 만날 사람인지 그만 만날 사람인지 알 수 있듯이. 이제 나는 겨우 경주의 마음에 든 것 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이제 더 친해질 일이 남았다. 깊어질 일만 남았다. 때론 토라질 일도 있겠지만. 책은 경주에 정착하게 된 소설가가 꽃피는 봄에, 능의 풀이 무성한 여름에, 벼가 익는 가을에, 그리고 겨울에 경주의 이곳 저곳, 이 골목 저 골목을 산책한 뒤 쓴 글들이다. 책을 읽고 나니 내가 다녀온 곳보다, 갈 곳이 더 많았다. 생각보다 많은 곳을 가지 못했더라. 앞으로 더 많은 곳을 갈 수 있을 것이라 기뻤다. 경주와 나는 좋은 친구가 될 것이다.

     

     

        칠레의 시인 네루다는 "꿈의 궁전에서 살듯이" 아름다운 지명에서 살기를 좋아했다. 꿈은 시인의 특권이라 싱가포르, 사마르칸트에서는 지명의 발음을 음미하며 살았다고 한다. 매혹적인 지명이 분명 있으니 나는 전에 '아스파한에서의 하룻밤'이라는 단편을 읽고 아스파한을 오랫동안 꿈꾸었다. 티베트의 수도 라사도 나를 사로잡았던 이름이어서 '라사'를 제목으로 넣어 장편소설을 쓰기도 했다.

     

        신라라는 옛 이름을 불현듯 떠올리고 뒤늦게 몸을 돌린 것은 인도 여행 뒤다. 농경민의 후예처럼 좁은 땅에 붙박여 살다가 인도의 드넓은 대륙에서 삶의 본질을 보고 경주로 향했다. 자연인 듯 이지러져 천오백 년 전 고분이 도심에 솟아 있는 풍경은 근원적이었다. 김씨 왕들의 거대 능을 산책하며 내 속에 유목민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았고, 비로소 한국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다. 신라라는 찬란한 이름을 만나기 전 나는 디아스포라였다. 경주는 모태와 같으니, 이 책은 유목민의 금빛 꿈이 묻혀 있는 고도에서 발길 닿는 곳마다 길어올린 사색의 우물이다. 나와 우리들의 뿌리에 대한 소박한 찬미이다.

     

       신라- 당신도 시인처럼 이 아름다운 발음을 음미해보라.

    - p. 6-7

     

     

        그래, 내가 경주에 가야겠다고 결심한 처음도 능 때문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대학로의 조그만 한 극장 안이었다. 그 날 추상미가 나오는 독립 영화를 봤다. 추상미가 서울에서 내려와 친구 차를 타고 경주 시내로 들어갔는데, 곳곳에 커다란 능이 있었다. 우회전을 할 때도, 좌회전을 할 때도 고운 선이 보였다. 그때부터 반했다. 경주의 고운 능선에. 신-라-. 신-라. 발음해보니 능 위로 조그만 바람이 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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