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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록실로의 여행 - 폴 오스터의 고백
    서재를쌓다 2007. 7. 9. 10:50

    기록실로의 여행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열린책들



       역시 폴 오스터는 처음이 힘들다.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폴 오스터 책을 읽을 때마다 책장을 덮어버리는 경우는 거의 첫 도입부분이다. 이 부분만 지나면 미친듯한 속도로 읽어나가는데 유독 처음이 힘들다. 이번 기록실로의 여행도 그랬다.

       나는 왜 제목을 '기록실'로의 여행이 아니라 '기록실로'의 여행으로 생각했을까? 참 바보같이 '기록실'로 가는 여행이 아니라 '기록실로'라는 어떤 내가 모르는 지명이라고 생각했다. 한번도 들어본 적은 없지만 폴 오스터에게만 존재하는 그런 곳.  

       '미스터 블랭크'라는 노인이 어딘지도 왜 갇혀 있는지도 모르는 방에서 이전에 수감되었던 어떤 사람의 글을 읽으며 미스터 블랭크 자신은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는, 하지만 그들은 미스터 블랭크를 확실히 알고 있는 사람들의 방문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다.

       책을 다 읽고나서 알았다.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내가 주인공인 '미스터 블랭크'의 정신세계를 똑같이 느끼고 읽었다는 것. 폴 오스터는 소설의 처음에 미스터 블랭크와 어딘지 모르는 이상하고도 밀폐된 공간을 우리에게 주었다. 기억하고 싶지만, 기억할 수 없는 상황을 주고 소설 속 주인공 미스터 블랭크와 독자를 동시에 혼란스럽게 한다. 그리고 어쩌면 기억이 날 것도 같지만 (폴 오스터의 예전 작품들을 읽어본 독자라면) 결코 또렷하게 기억나지 않는 방문객들이 등장한다. 미스터 블랭크와 독자는 동시에 생각한다. 내가 이 사람을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방문객들은 하나같이 당신을 잘 알고 있다고, 나를 기억해보라고 한다. 하지만 이름정도만 어디서 들어본 적 있는 것 같다.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하나의 이야기를 등장시킨다. 이전 수감자가 썼다는 글. 소설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주인공의 행보가 흥미로운 글이다. 그리고 중간에 이야기를 끊어버린다. 뒷이야기는 어떻게 될까요? 생각해봐. 미스터 블랭크와 독자는 동시에 생각한다. 이 사람들을 그냥 죽어버려? 말아? 그냥 죽여버리면 너무 재미없잖아. 이렇게 이야기 한 편을 만들어 나간다. 그리고 미스터 블랭크도 어떤 방문객도 아닌, 폴 오스터가 이렇게 말한다.

     
    그 일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미스터 블랭크는 우리 중 하나이고 자기의 곤경을 알면서도 싸우다 늘 패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p.222

       이건 소설쓰기에 관한 이야기다. 폴 오스터 자신은 이렇게 소설을 써 나가고 있다고. 이렇게 쓰다보면 한 편의 이야기가 완성이 된다고. 작가를 꿈꾸고 있다면 이렇게 한번 써 내려가 보라고. 혹은 나는 이렇게 쓰고 있으니, 당신도 이렇게 읽어주었으면 한다는.

      책을 읽으면서 영화 '어댑테이션'이 생각났다. 천재 시나리오 작가 찰리 카우프만이 '존 말코비치 만들기'의 대성공에 이어 맡게된 '난초도둑'이라는 책의 각색 작업. 찰리는 창작의 어려움과 자신은 무능하고 재치없는 작가라는 자책감으로 시달리게 된다. 결국 영화는 찰리가 '난초도둑'을 각색하려고 노력하는 중에 펼쳐지는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를 보면서 이것이 중반부까지는 픽션이 아니라 분명 논픽션일 거라고 확신했었다.

       '기록실로의 여행'을 읽으면서 같은  생각을 했다. 이건 폴 오스터의 이야기라고. 어느날 자신의 소설 속 등장인물을 만나게 되었고(그것이 꿈이였든 현실이였든) 폴은 그를 기억하지 못했고 그것이 폴에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을 다시 돌이켜 보는 계기가 되었을 거라고.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쓰자고. 이건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라고.

       신경숙 작가의 인터뷰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을 본 적이 있다. 어딘가에 자신이 창작한 인물들이 살아나가고 있을 것만 같다고. 그래서 더 잘해주지 못한 것이 안쓰럽고, 눈이 펑펑 내리는 날은 괜시리 걱정이 된다고. 폴 오스터도 그런 마음 아니였을까? 어느새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는, 혹은 따뜻하지 않은 세상에 내 놓은 것이 죄스러운 마음이 있는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 미안하다고 너희 이름을 불러주고 쓰다듬어 주는 그런 행위가 소설 '기록실로의 여행'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미스터 블랭크가 그랬지만 실은 폴 오스터 자신이 수첩에 꾹꾹 눌러담았을 이름들.

    제임스 P.플러드
    안나
    데이비드 짐머
    피터 스틸먼 주니어
    피터 스틸먼 시니어
    팬쇼
    새무얼 파
    존 트로즈
    소피
    대니얼 퀸
    마르코 포즈
    벤저민 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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