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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미도둑 - 비가 그친 새벽 거리를 걷다
    서재를쌓다 2007. 7. 8. 15:38

    장미 도둑
    아사다 지로 지음, 양윤옥 옮김/문학동네



       아사다 지로의 책은 처음이다. 원작으로 유명한 <철도원>이나 우리 영화 <파이란>은 보았지만, 책으로 그의 작품을 읽는 건 처음이다. 자주 가는 수선님의 홈페이지에서 이 단편 소설집이 너무 좋아 책 표지를 침대 가까이에 붙여두었다는 말에 어떤 작품이길래,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우선 작가에게 반했다는 말부터 시작하겠다.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외롭거나 쓸쓸하거나 고독한 인물들이다. 이들이 어떻게 절망의 순간을 맞이하는지, 극복해내는지 그리고 어떻게 또 꾸역꾸역 살아나가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들이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한 편의 단편이 끝내고 새 단편을 읽게 되면서 계속 앞의 단편을 뒤적거렸다. 새 단편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방금 읽었던 단편 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어떤 사람인 것만 같은 느낌이 자꾸 들어서 앞으로 넘겨서 반복되는 이름이 없나 뒤적거린 것이다. 결국 반복되는 이름은 찾지 못했는데, 아직도 내가 꼼꼼하게 찾아내지 못해서 그런 것만 같다. 옴니버스 구성처럼 '수국꽃정사'에 스쳐지나간 인물이 '나락'의 주인공인 것만 같고, '나락'에서 스쳐지나간 인물이 '죽음 비용'의 주인공인 것만 같은 느낌.    


       제일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첫번째 단편, 수국꽃정사. 실직하게 된 중년의 카메라맨과 퇴락한 온천가 중년의 스트리퍼 이야기.
       한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티비 여행정보 프로그램에서 종종 보게되는 겨울의 일본 노천 온천을 보며 꼭 한번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얼굴은 찬 바람으로 얼얼한 채 흩날리는 눈과 함께 온천을 하는 기분.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풍경. 수국꽃정사에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스트리퍼와 카메라맨이 아무도 없는 각각의 온천탕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그 때 스트리퍼를 고백한다. 사실은 어릴 때 헤어진 아들 앞에서 춤을 춘 적이 있어요,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함께 죽어달라는 부탁을 받아준 카메라맨. 그래, 그럴 수도 있겠어. 그런 고백을 듣고 따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삶이 그리 행복하지도 않다면, 처음 본 사람과 죽을 생각을 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들. 한줄 한줄 읽어나갈 때마다 까만 마스카라가 볼에까지 까맣게 번져 울고 있는 중년의 스트리퍼의 모습이 생각나 가슴이 찌릿했다. 


     
       나락은 대화에서 대화로 이어져 나간다. 어느 날 도착하지 않은 채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로 떨어져 죽게 된 중년의 회사원에 관한. 장례식을 다녀온 여직원들의 대화, 장례식을 지키고 있는 그의 동기들의 대화, 장례식을 막 나온 사장과 비서와의 대화. 결국 이들의 대화 속에서 밝혀지는 죽음과 관련된 크고도 사소한 이야기들.
       결국 누군가 치밀하게 설계한 죽음의 계획 같은 건 없는 거 아닐까? 누구든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사는 거니깐. 모든 건 자격지심에서 시작된 것 같다. 기타기리는 그저 삶이 힘들어져서 떨어져 버린거라고. 떨어지는 순간 웃음도 누군가를 증오했던 것이 아닌 그저 고달한 삶을 놓아버리는 순간의 편안함 아니였을까?


       수국꽃정사 다음으로 좋았던 단편. 죽음 비용. 있는 힘껏 열심히 살아왔지만 결국엔 노년에 남는 것이라곤 돈 밖에 없다는. 자식도 회사도 부와 명예도 이 세상을 떠나는 죽음의 순간에는 아무 소용도 없다는. 그렇지만 오우치는 죽는 순간의 고통을 없는 가장 행복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건 바로 자신을 가장 사랑해주었던 마음과 함께 하는 것. 그의 죽음을 진심으로 아파해 줄 사람, 그가 겪게 될 죽음의 순간을 가장 행복하길 바라는 사람, 항상 곁에 있었지만 그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사람. 중국의 황제에게만 허락되었던 어떤 부위에 침을 놓는 행복하지만 쓸쓸한 행위의 죽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죽음.
       글을 읽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본다. 나는 이런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런 행복한 죽음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을까? 


       히나마츠리에서 제일 좋았던 묘사는 12살의 야요이와 24살의 요시이가 비가 그친 밤의 거리를 나란히 걸어 목욕을 하러 가는 장면이다. 겨울의 비가 그친 거리를 걸어가며 도란도란 나누는 쓸쓸하지만 지금 이 순간 함께 있어 행복한 두 사람. 그리고 밤바람을 맞으며 목욕을 하고 돌아와 마시는 맥주 한 잔.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얼마나 쓸쓸한 일인지 아는 사람들의 이야기. 


        일본의 아메리칸 스쿨에 다니는 아들 요이치. 1년에 반 이상을 항해를 하는 대디. 그리고 정원 손질따위는 손톱이 망가지는 일이라며 절대 하지 않는 마마. 이 글은 요이치가 항해를 하는 대디에게 편지를 보내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속에는 사랑에 빠진 자신의 이야기, 동네에 장미 도둑이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어쩌면 가장 외로운 사람인 마마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결국 장미 도둑은 다른 외부인이 아니라 각각의 집 안 사람인지도 모른다. 늘 떠나있는 남편이 있는 부유층의 하늘하늘한 옷을 입는 엄마들. 누구든 꺽어 놓아주기만 하면 어느 곳이든 그 자리에서 빛을 발하는 장미와 같은, 가시때문에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들.


       마지막 단편, 가인에서 확실해졌다. 아사다 지로는 쓸쓸하고 고독한 사람들을 등장시켜 외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결국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는 걸. 모든 이야기들은 행복한 기운을 보이면서 끝을 맺는다. 일상은 계속되고, 어쩌면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는 희망과 믿음. 그리고 그래야만 되지 않을까, 하는.
       첫장을 넘기면서 외로워져버린 마음이 마지막장을 넘기고 나니 아, 행복해져버렸잖아,라고 말해버리는 비가 그친 새벽거리를 걷듯 고즈넉하고 편안한 여섯 편의 이야기들. 아사다 지로의 다른 책들도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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