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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겨울, 다시 경주
    여행을가다 2013. 3. 13. 22:25

     

       그처럼 감각이 둔하고, 감성적 반응이 느리고, 자신의 감각에 자신감이 없었던 인문대학 국사학과 학생 중에 인호라는 남학생이 있었다. 그는 내 강의를 듣고 경주답사에 따라온 적이 있었는데, 과에서 답사를 왔을 때 다 보았다는 식으로 시큰둥해하더니 감은사탑 앞에 이르러서는 "선생님, 정말로 장대하네요."라며 나보다 먼저 그 감흥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내게 좀 쑥스러웠던지 "제 생전에 돌덩이가 내게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 경험은 처음입니다."라며 탑쪽으로 뛰어가서는 이 각도에서도 보고 저 각도에서도 보고 올라가 매만지며 즐거워하였다.

       그런 감은사탑이다. (...) 만약에 감은사 답사기를 내 맘대로 쓰는 것을 편집자가 조건 없이 허락해준다면 나는 내 원고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쓰고 싶다.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 p.154-154

     

     

        경주에 다녀왔다. 감은사탑을 보고 왔다. 이 뒷문장이 "인호를 비롯하여 감은사에 한번이라도 다녀온 분은 나의 이런 심정을 충분히 이해해줄 것이고," 인데 나는 감은사지에 다녀왔으므로, 유홍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정말로, 아! 감은사탑이다.

     

     

     

     

       몇년 전의 경주 여행 뒤로부터 유적지가 많은 여행지에 마음이 간다. 별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아도, 어디를 걷든 의미있는 곳이 되는 도시. 내가 걷고 있는 이 길 위에 쌓여진 수십, 수백 년 전 이야기를 떠올리고 상상하게 만드는 곳. 그저 쌓아올려진 게 아니라, 여러 사연과 여러 마음들이 차곡차곡 쌓인 돌탑들. 경주의 숙소를 이틀동안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어서 몇 달 전에 신청해뒀다 2월에 다녀왔다. 친구와 나는 몇년 전에, 같은 계절에, 따로 경주를 다녀왔는데, 친구는 그 뒤에 남편이랑 또 경주에 와서 남산 쪽을 돌았단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는 동쪽 바다로 가보기로 했다. 금요일 오전에 만나, 서울역 맥도날드에서 햄버거 세트 하나씩을 사서 기차에 탔다. 둘이서 여행 내 읽으려고 책 한 권씩을 가져왔는데, 역시 친구의 예상대로 거의 못 읽었다. 내려가는 기차에서 몇 페이지씩 읽은 게 다다. 내가 가져간 책은 <기나긴 이별>. 친구가 가져온 책은 <죽음이란 무엇인가>.

     

     

     

     

       매일 아침 본 풍경. 숙소는 생각보다 좀 별로였다. 그래서 저렴하게 묵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았다. 차가 없는 우리는 차가 쌩쌩 달리는, 보행자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도로를 목숨 걸고 건너 숙소에 도착했다. 지난 가을 휴가 때를 생각하고 방 하나씩을 찜했다. 첫날은 어찌어찌 방에 들어갔지만, 둘째날은 둘이서 거실에 이불 덮고 누워 티비 보다 잠들었다.

     

     

     

     

       편의점에 들러 냉장고를 빵빵하게 채워넣고 짜빠구리를 끓여 먹었다. 잠시 쉬었다 안압지 야경을 보러 나갔다. 나가서 조금 걷는데, 친구가 비를 맞았다고 했다. 정말? 하고 계속 걷는데, 커다란 빗줄기가 우둑둑 떨어지기 시작했다. 큰 비가 될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오늘은 그냥 숙소에 있자 했다. 그런데 숙소 앞에 도착하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어이가 없어서 둘이 한참을 웃다가 그냥 들어왔다. 경주도 2월에는 춥더라. 비를 머금은 바람은 차갑고. 나가지 말라는 신의 계시구나, 하고 들어와 나는 숙소 아래 온천 사우나에 몸을 담그러 갔고, 친구는 숙소에서 씻었다. 탕에 들어가 있으니 아, 따뜻했다. 폴의 <무국적 요리> '탕'도 생각나고. 냉탕에 들어가 있으니, 애기들이 와 자기네들끼리 꺄르르 웃으며 나를 쳐다본다. 안 추워요? 추워. 그러니까 또 꺄르르. 안압지에 가지 않아도, 첨성대 야경을 보지 않아도. 몇 년만에, 다시 경주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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