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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지금 홋카이도에 있어요.
    서재를쌓다 2011. 8. 26. 13:00

    외국인들

    심보선



    이 길은 아버지의 메모들을 연상시킨다. 아버지의 유일한 유고, 간혹 작고 투명한 새가 종이 바깥으로 방울져서 날아오르는...

    아버지는 썼다. "여행을 가면 꼭 한 번은 울게 된다."

    오늘 눈먼 외국인 서너 명을 길에서 마주쳤고 그들은 모두 같은 체구에 같은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사람일지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 분명하다. 길을 잃고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다 나와 우연히 여러 번 마주쳤을 뿐. 그 사실을 그는 모르고 나는 알 뿐.

    하지만 내가 짐짓 애달픈 목소리로 "아버지", 하고 부른다면?
    그는 흠칫 놀라서 멈출까?
    아니면 태연히 계속 걸어갈까?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아버지를 향하여 영원히 눈먼 자다.
    아버지는 죽었고 지금 죽어 있으며
    나는 살아왔고 살아 있으므로.

    여기에서 저기까지, 그 눈먼 외국인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싶다. 저기에 도착하면 나는 그에게 말할 것이다. "자, 그럼 여기까지." 그리고 나는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선행과 상관없는 동행.
    그런 것을 언제까지고 반복해보고 싶다.

    얼마 전 랍비를 애인으로 둔 친구가 이스라엘로 떠났다. 그리고 나는 지금 교토에 있다. "그곳은 혼자 여행 가기 좋은 곳이지." 그녀는 내게 시 외곽의 미술관을 추천했다. "그곳을 설계한 건축가는 아이I, 엠M, 페이Pei, 흥미로운 이름이지?"

    내가 갔을 때 그곳은 휴관 중이었다. 문 닫힌 미술관 앞에 서서 나는 아버지의 메모를 떠올렸다. 거기 서서 나는 오래오래 울지 않았다. 비도 오지 않았다.

    여행을 가면 꼭 한 번은 울게 된다..... 엉터리 점쾌.....

    이곳에서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내가 몰래 희망을 염원한다는 사실을.
    내가 원래 속죄의 전문가라는 사실을.
    나의 이름은
    페이도, 와타나베도, 토마스도 아니라는 사실을.
    나의 지금은
    좀 전의 과거가 제 바로 앞에 내팽개쳐버린
    무국적의 고아라는 사실을.

    그리고 나는 지금 교토에 있다.
    그리고 심지어 눈도 내린다.
    여기에서 저기까지.
    제 갈 길을 가는 사람들의 어깨 위로
    쓰러지기 직전의 '아이I' 같은 검은 목책들 사이로
    나이 어린 신의 어리광처럼
    눈밭이 흩날리고 있다.




      시집을 읽고 있다. 시집을 읽던 중에 나는 홋카이도에 간다. 두시간 사십분을 날아 홋카이도로 간다. 홋카이도에 도착해서 우유를 사고 맥주를 마셔야지. 맥주를 마시는 동안 생각나는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야지. 떠오르는 일들을 적어 둬야지. 그렇게 홋카이도 맥주수첩을 만들어야지. "여행을 가면 꼭 한 번은 울게 된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수첩. 우듬지의 <맥주수첩>은 정말 너무했지. 나는 그것보다 근사해야지.

    그리고, 

    그렇습니까.

    새벽 2시에, 오후 2시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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