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우리는, 슬픈 짐승
    서재를쌓다 2011. 10. 23. 00:04
    슬픈 짐승 (반양장)
    모니카 마론 지음, 김미선 옮김/문학동네


    "나는 기록보관실에 배치되었다. 이제 브라키오사우루스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게 된 것이었다. 그것이 분명 내 마음을 상하게 했을 텐데 지금 생각하니 별로 상관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사람들이 믿었던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예배에 가기를 포기하는 것처럼 나도 이미 얼마 전에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발아래서 드리는 나의 아침 예배를 포기한 뒤였다. (...)"  p.190-191



        9월의 어느 날이었다. 자주 가는 서재에 이 책에 관한 리뷰가 올라왔다. 어떤 리뷰는 당장 오프라인 서점으로 달려가게도 한다. 지금 당장, 이 책을 읽지 못하면 죽을 것처럼. 내게 이 책이 그랬다. 오랜만에 오프라인 매장에서 책을 구입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고, 문을 열고 들어가, 검색대에서 검색을 한 뒤, 책을 찾았다. 니가 그 아이구나, 반가웠다.

        주말에 비가 내리면 이 책을 한번 더 읽을 작정이었다. 분명 어제 늦게까지 술을 마셨을 때는 보슬보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눈을 뜨니 아쉽게도 그쳐 버렸다. 비가 오면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보일러를 틀어놓고 이불 속에 들어가 이 책을 읽을 작정이었다. 비가 오질 않아 내내 잤다. 그리고 이 밤, 리뷰를 다시 찾아 읽었다. 이 소설은 지금은 이 땅에 살지 않는 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와 사랑에 빠져 버린 여자와,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뼈대를 보고 "아름다운 동물이군요."라고 이야기한 남자와의 이야기이다. 사랑, 이야기라고 해야겠지.


    "나는 오히려 현실이 너무 아름답게 보일 때는 그것을 꿈이라고 여기는 편이지. 행복은 무상한 거야. 프란츠가 말한다. (...) 프란츠의 손가락 끝 사이에서 포도알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프란츠가 우리를, 자기와 나를, 꿈이라고 여기고 있는지 현실로서 참아내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려고 애쓴다. 꿈이라면 조만간에 어쩔 수 없이 깨어나야 하는 것이고, 그에게 우리가 현실이라면 우리가 너무도 아름다운 존재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p.96-97


       독일소설이다. 통독이 된 즈음의 이야기다. 한때 장벽을 두고 이쪽과 다른 저쪽에 있었던 남녀가 장벽이 무너지고 만났다. 남자는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뼈대를 앞에 두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행복은 무상(無常)하니까. 아주 오래 전 이 땅에 발 디디고 있던 거대하고 아름다웠던 공룡은, 이제 뼈대만 남아 남자 앞에 전시되어 있다. 남자는 그 뼈대 위에 둘러졌던 몸덩어리를 상상한다. 아름다운 육신. 그것은 꿈이고, 아름다운 현실. 사라져버려서, 뼈대만 남은 아름다운 현실. 그건 추억. 가슴 아프지만 아름다운 추억. 

       여자는 생각하고 생각했다.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 그녀에게 사랑이 왔다. 그녀에게 없는 것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건 슬픈 일이었다. 여자는 괴로웠다. 행복이 무상(無常)하듯, 사랑도 무상(無償)했다. "그는 그녀 옆에서 자지만 너와는 함께 자잖아. 그와 함께 살고 싶어. 내가 아테에게 말했다." p.154 "나는 프란츠의 어깨와 목 사이 움푹한 곳에 나의 뭉툭한 짐승코를 파묻었다. 프란츠는 내 호흡의 그늘 안에 숨고 싶은 것처럼 그 안에서 낮게 숨쉬었다. 우리는 그렇게 말없이 오랫동안 누워 있었다. 나는 이 시간 속에서 죽고 싶었다." p.170


       어쩌면 모든 게 꿈일 지도 몰라. 여자의 상상일 지도 몰라. 남자가 여자를 떠난 것은, 아니 두 사람이 지금은 멸종된 브라키오사우루스 앞에 만나 사랑을 시작한 것은. 모든 게 여자의 상상일 지도 몰라. 인생은 무상(無常)하니까. 사랑 또한. 애써 그렇게 상상하려 했다. 그럼에도 마음이 아팠다. 남겨진 여자가 견딘 추억들이 무서웠다. 서러웠다. 두 사람이 함께 한 사랑을, 한 사람만 추억한다는 건 무섭고 서러운 일이라는 걸 배웠으니까. 결국 사랑이 무상(無常)한다는 걸 배운 건, 혼자 남겨졌을 때였으니까. 여자는 추억하고 추억한다. 그녀에게 남은 일은 그것밖에 없다. 슬픈 짐승. 옛날, 아주 먼 옛날, 이 지구상에 인간이라는 동물이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걸 상상하지도 못했을 아주 먼 옛날, 브라키오사우루스도 사랑을 했겠지. 그렇다면 그들도 슬픈 짐승. 아름답지만 슬픈 짐승. 비가 내리길 기다리고 있다. 그때 이 슬프고 아름다운 소설을 다시 읽을 거다.


    "카린과 클라우스는 학창시절부터 알던 사이였다. 그들은 내가 결코 잡지 못했던 것, 즉 청춘의 사랑이었다. 청춘의 사랑이 무엇이냐고 누군가가 물었다면 나는 카린과 클라우스라고 말했을 것이다. 청춘의 사랑은 단순히 젊은 시절에 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다. 청춘의 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랑을 견주어 잴 수 있을 어떤 것도 아직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유일하게 그 사랑 자체를 위해서 존재한다. (...) 우리는 고치 속에서 어느 날 무엇이 되어 피어날 것인지 아직 불안하게 기다리고 있는데, 그 두 사람은 이미 아름다운 나비가 되어 학교 운동장 위의 먼지 나는 안개 속에서 춤추고 있었다." p.74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