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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수 영희 - 스물 아홉, 뻔하지 않아.
    무대를보다 2008. 10. 4. 21:30
    콘밀(옥수수;프랑스산), 정백당, 미강유, 바나나분말, 팜유, 탈지밀, 카제인 나트륨, 정제염, 합성착향료(분말바나나향, 바나나컴파운드향, 바나나향), 환원철, 마리골드색소, 루틴, 유당(우유).

       이건 오랜시간 어린이들의 사랑을 독차지해온, 달콤하고 부드러운 바나나맛을 그대로 구현한 대표적인 콘스낵으로 언제 어디서나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바나나킥'에 들어간 성분표시다. 정말 바나나는 단 0.00001%도 들어가 있지 않다. 냄새만 흉내낸 바나나였구나. 그래도 가끔 바나나킥을 먹으면서 0.00001 정도의 진짜 바나나를 먹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나는 오늘 늦게 일어나 '마침내' 배달되어온 <밤은 노래한다>를 손에 쥐었다. 따끈따끈한 사인본 안에는 밤하늘을 닮은 남색 종이 위에 은색펜으로 그려진 산과 별과 달이 있었고, '언제나 우리 머리 위엔 반짝이는 별'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나는 어젯밤을 생각했다. 어젯밤, 나는 아주 특별한 사람들을 만났다. 새벽 3시에 택시를 타고 집에 들어오면서 나는 이 밤 내내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가를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고, 그럼에도 취하지 않았고, 얼마나 많이 웃었는지. 그래, 어젯밤 우리 머리 위에서도 별이 반짝였을 거다.

       어제 나는 소주도 마시고, 맥주도 마시고, 커피도 마셨지만 연극도 봤다. 바나나킥을 오늘 슈퍼에서 사온 건 어제 본 연극때문이었다. 그 연극에는 까만 비닐봉지에 담겨진 바나나킥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생각이 났다. 그리곤 누워서 무릎팍 도사를 보면서 바나나킥을 먹었다. 영희는 바나나킥은 녹여서 먹는 거라고 했다. 나는 앞니로 반을 쪼갠 뒤 반쪽을 입에 넣고 사탕처럼 녹여먹었다. 단단하던 것이 샤르르 녹아 버렸다. 그걸 꿀꺽 삼켰다.

       옥탑방에 사는 철수와 영희는 같은 침대를 쓴다. 이건 연극적인 장치일 뿐이지만, 아무튼 같은 침대를 쓴다. 영희는 그 위에서 잠들기 전 아직도 잊지 못하는 남자의 향수를 뿌리고, 철수는 그 위에 누운 채로 아버지의 여자 이야기를 듣는다. 영희는 그 위에서 콘돔이 없으니 할 수 없다는 개자식과 뒹굴고, 철수는 라디오를 들으며 자위를 한다. 이건 80년생, 스물 아홉의 이야기다. 아니, 이건 나와 당신, 우리들의 청춘 이야기다.
     
       예전에 친구가 하숙집 옥탑방에 살았다. 그 방은 그 하숙집에서 제일 저렴했지만 여름에는 지독하게 덥고, 겨울에는 지독하게 추웠다. 그 방은 옆에서 보면 꼭 직각 삼각형 모양이였다. 친구가 그 방에서 살 때 나는 노크를 하고 들어가 앉아 가끔 울었다. 어쩐지 그 방에 앉아 있으면 라디오 소리도 좋았고, 옥상의 개가 미친듯이 짖는 소리도 좋았고, 빗소리도 좋았고, 내가 우는 소리도 좋았다.

       철수는 옥탑방에 살지만 고소공포증이 있다. 위태위태로운 계단을 내려가고 올라갈 때 꼭 벽쪽으로 붙어서 걷는다. 영희는 결혼까지 했으면서 애인이 아직 없다고 말하는 옛 남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철수는 스물 아홉. 영희는 80년생. 나는 원숭이 띠. 실제 배우들의 나이도 그렇단다. 철수에게는 바람나 이혼하고 집 나가 살겠다는 아버지가 있고, 영희에게는 살 부비고 사랑하는 남자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딸을 찾아오는 어머니가 있다. 서른이 된다는 것은 서른 이후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철수의 옛 여자친구는 너는 질퍽하다고, 너는 잘 읽힌다고, 바른생활 교과서의 철수처럼 뻔한다고 말한다. 영희의 옛 남자친구는 니가 정말 잘 살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영희를 자세히 읽지도 않고 말도 안 되는 그런 말을 뱉어낸다. 영희는 스물 아홉. 나는 80년생. 철수는 원숭이 띠. 우리는 나이가 같다. 그런 대사도 있었다. 야구에 비유하자면, 지금 나는 데드볼로 1루까지 나가고, 다음 타자가 친 안타로 2루까지 진출했다고. 언젠가 홈을 밟을 테지만 이렇게 질퍽하지 않게, 찌질하지 않게 담장을 넘어가는 커다란 홈런 한 방으로 멋지게 홈을 밟고 싶다고. 이건 확실한 대사가 아니라, 내가 마음으로 기억하는 대사다. 

       이런 대사도 있었다. 이건 도루이야기인데, 꼭 1루에서 2루로 가고, 2루에서 3루로 가는 게 아니라 3루에서 2루로 가고, 2루에서 1루로 거꾸로 뛰는 도루도 멋지지 않냐고. 그러다 1루에서 홈으로 뛰어서 홈에서 다시 시작하는 건 어떠냐고. 나는 스물 아홉, 철수는 80년생. 영희는 원숭이띠. 우리는 서른 이전의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몇달 후면 서른 이후의 삶이 찾아올 것이다. 홈에서 다시 시작하는 스물아홉.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멋지다, 정말.

       노래방에 가면 매번 박상민의 '서른이면'을 부르는 오빠가 있다. 서른이면 나도 취직해서 장가를 갈거라고 생각했지. 내 부모님과 내 집사람과 오손도손 살아갈거라고- 우리는 함께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도 부른다. 술을 아주 많이 마셨을 때다. 늘 서른을 생각하며, 이 노래를 스무살 때부터 불러왔다. 부르다 운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내 앞에 김광석이 두려워한 서른이 다가온 거다. 서른에 대한 많은 글들이 있지만, 코 앞에 닥친 내게 가장 공감되는 말은 서른 이후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잔치도 끝났고, 매일 이별하면서 살지만, 서른 이후에 잔치는 다시 시작되고, 매일 누군가를 만나면서 살기도 한다는 것. 
     
       서른. 노르웨이에 있는 땅끝으로 가는 영희. 서른. 고소공포증을 안고 아찔한 난간 위에 서는 철수. 이 연극을 금령씨가 꼭 봐야한다고 말해주었던, 어제 내게 행복한 밤을 안겨줬던, 이제는 얼굴도 아는 사이가 되어버린 곡예사님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끝나기 전에 꼭 보러가자고. 친구는 지금 서른. 우린 스물 아홉, 서른이지만 처음부터 언니동생이 아니라 친구였다. 연극을 다시 보게 될 그 밤도 어젯밤처럼 행복할 거다. 우리는 아마도 스물 아홉과 서른에 대해 이야기하겠지. 그리고 우리의 서른과 서른 하나에 대해서도. 응. 스물 아홉의 청춘들이 뻔하지 않듯이 철수와 영희도 뻔하지 않다. 나와 당신이 뻔하지 않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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