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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애 최고의 약속 - 히말라야 바람 소리
    티비를보다 2008. 3. 30. 01:43

       눈이 하얗게 뒤덮은 히말라야 정상을 오른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 중 두 사람은 앞이 보이지 않는 시각 장애인입니다. '생애 최고의 약속'이라는 다소 상투적인 재목의 특집 오프닝을 보고 심드렁했던 마음을 가졌던 것이 금방 미안해져 버렸습니다. 얼마나 게으르고 나약한지 한 시간여의 다큐멘터리 앞에서 나는 또 작아져 버립니다. 짝짝짝. 고맙습니다.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어서. 그리고 그 속에 강한 당신들이 있어주어서.

       '생애 최고의 약속'에는 세 사람의 시각 장애인이 히말라야 6476m의 메라피크 등반에 도전합니다. 등반에 앞서 여러 건강 검진과 고산증을 대비한 합숙 훈련까지 마친 세 사람의 각오는 대단했습니다. 장애인이라서 안 된다는 편견을 없애고 싶다, 무엇보다 그 곳에 다녀오면 뭐든 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길 것 같다. 세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자신들에게 색안경을 끼고 보는 세상을 향해서 그 높은 곳을 올라가겠노라고 결심합니다. 


        40살의 안마사 유성씨. 특수 교육을 전공하는 대학생 나영씨. 두 눈을 잃은 후 여러 번 자살 시도 후 처음으로 세상에 맞선 도영씨. 다큐가 시작되고 산을 오르는 세 사람의 모습이 비춰질 때 살며시 눈을 감아봤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암흑인 세상. 성우의 나레이션 소리와 산을 오르느라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헉헉대는 숨소리만 들려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앞 사람의 몸과 발이 맞닿는 땅의 느낌만으로 보통 사람도 오르기 힘들다는 히말라야를 오르고 있는 겁니다. 왠지 숙연해집니다.

       각자 사연이 있었지요. 유성씨는 자신과 같은 시각장애를 가진 아들에게 자신이 꼭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영씨의 부모님은 심하게 반대하셨지만 넓은 세상을 더 알고 싶다는 나영씨가 보낸 간절한 스물 세 통의 문자 메세지를 받은 후 결국 허락하셨습니다. 아쉽게도 무릎 통증이 너무 심해 도중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도영씨는 끝내 눈물을 보였습니다. 꼭 성공하고 싶었다면서요. 자기 몫까지 열심히 정상에 올라가달라고. 유성씨도 나영씨도 모두 같은 마음이였기에 함께 눈물을 흘렸습니다.

       방에서 감기 조금 걸렸다고 보일러를 빵빵하게 틀어놓고 누워서 티비를 보고 있던 저는 냉큼 일어났습니다. 앞도 보이지 않고 몸도 힘든 그들이 이렇게 힘겹게 히말라야를 오르고 있는데, 앞도 잘 보이고 몸도 튼튼한 제가 너무나 게으르게 비스듬히 누워서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져 벌떡 일어나 허리에 힘을 주고 곧은 자세로 앉았습니다. 


       유성씨의 아들 동진이는 판사가 꿈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해질 수 있기 때문에 판사가 되고 싶다고 합니다. 어린 녀석이 어찌나 말도 잘 하는던지요. 예쁘게 말하는 법을 아는 아이였습니다. 음성도 아주 맑은 아이였습니다. 꼭 정상에 오를 때 들으라고 했던 동진이의 녹음 선물을 유성씨가 들을 때 저도 함께 울어버렸습니다. 얼마나 기특하고 착한지. 신은 유성씨에게 두 눈을 앗아간 대신 그렇게 어여쁜 아이를 주셨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곱고 맑은 아이였어요. 동진이가 좋은 세상에서 불편없이 살 수 있게 우리가 애써야 할텐데 말이예요. 유성씨는 가슴팍에 동진이 사진을 달고 메라피크 정상에 오른 후 동진이에게 선물로 준다며 히말라야의 바람소리를 녹음합니다. 쉬이쉬이. 바람 소리뿐이지만 동진이는 알겠지요. 그 소리에 아빠의 땀과 그만두고 싶었던 지친 마음과 그래도 너로 인해 포기할 수 없었던 마음이 담겨져 있다는 걸요. 그래서 끝내 오르고만 벅차 오르는 지금 이 순간의 마음두요.

       동진이는 '아마도 히말라야는 하얀 세상이겠지'라고 말했습니다. 유성씨는 정말 동진이 말대로 하얀 세상인 히말라야에 마침내 올랐구요. 눈으로 볼 수 없지만 마음으로 볼 수 있었겠죠. 하얀 세상을요. 유성씨의 아내가 한 말이요. 우리는 가보지 못한 곳들도 인터넷이며 티비를 통해서 볼 수 있지만 유성씨와 동진이는 그렇지 못하니 좋은 기회가 왔을 때 꼭 다녀왔으면 좋겠다는 말이요. 어쩌면 우리는 많은 것을 볼 수 있지만 또 그만큼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또 동진이와 유성씨, 나영씨와 도영씨는 많은 것을 볼 수 없지만 우리보다 더 많은 걸 보고 있을 수도 있을테구요.

       저도 유성씨가 녹음한 히말라야의 바람소리를 듣고 싶어요. 눈을 감고 조용한 곳에서 녹음기에서 흘러 나오는 쉬이쉬이 소리를 듣고 싶어요.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왠지 뭐든지 잘 될 거 같은 믿음이 생길 것만 같아요. 마치 제가 그 하얀 세상, 히말라야의 정상에 오른 것처럼요. 유성씨가 이런 말을 했어요. 사람에 의지하는 것보다 오히려 로프를 잡고 오르니깐 더 믿을 수 있었다고. 로프가 더 좋았다고. 얼음 절벽 길에 로프를 잡고 오른 것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왠지 이 말이 프로그램이 끝나고 나서도 계속 마음에 남네요.
     
        고맙습니다. 비 내리는 주말, 덕분에 제 마음이 뜨거워졌어요. 뭔가 힘들어질 때면 유성씨의 녹음기에 녹음된 히말라야의 바람소리를 눈을 감고 상상해볼께요. 쉬이쉬이. 귀 기울이면 금새 들려올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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