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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어가 살던 곳 - 봄을 만나는 길
    티비를보다 2008. 3. 24. 12:46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따닥따닥 빗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습니다. 커피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우산을 펴들고 집 앞에서 거품이 소복히 얹혀진 커피를 사고 들어오는 길에 갑자기 '은어가 살던 곳'이 생각이 납니다. 당장 집에 가서 그 단막극을 다시 보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따딱따딱. 우산으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엠피쓰리 속의 음악보다 더 훌륭합니다. 아, 요즘 루시드 폴의 '삼청동'을 반복해서 듣고 있습니다.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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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컴퓨터를 켜니 샛노란 봄 빛깔의 현미씨가 저를 맞아줍니다. 나풀거리는 롱 스커트를 입고 샛노란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그녀는 하동 터미널에서 내립니다. 높은 샌들은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어째 여행에 어울리지 않는다 싶었다구요. 결국 그 샌들 덕분에 기가 막히게 눈부신 여행을 했지요. 나풀거리는 롱 스커트의 샛노란 현미씨 뒤를 종종거리며 따라다닙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그 길을 햇살을 마주하며 걸어갑니다. 벚꽃이 밤의 조명이 되기도 하는군요. 하얀 벚꽃을 조명삼아 술집 오두막에 떡하니 앉아 김광석 노래를 들으며 동동주도 한 잔 합니다. 벚꽃 향내 그윽한 새벽 공기도 빨간 스니커즈를 신으며 깊이 들이 마셔봅니다. 지리산 노고단에도 올라갑니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고 경치가 기가 막히네요.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벚꽃길을 설레이는 사람과 함께 걸어봅니다. 현미씨, 그 사람 정말 괜찮은 사람 같아요. 노을이 지는 강가에서 현미씨가 그 사람과 달콤한 첫키스를 나누는 것은 훔쳐 봅니다. 아, 이런 곳에서의 키스라니. 그 사람과 영영 만나지 못해도 이 키스만은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만 같아요.

       드라마의 중간쯤 그 사람이 우연히 현미씨 이름을 알아내고 뒤에서 부르잖아요. 현미씨. 현미씨 맞죠? 라구요. 아, 그 말, 왜 그렇게 떨리던지요.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이렇게 설레는 일인가 잠시 생각했어요. 뭐 특별한 사건이 없었지요. 그저 친구들이 어떤 남자와 현미씨를 잘 엮어주려고 시작했던 여행이였고, 현미씨는 그 남자와 맞지 않는다는 걸 알았죠. 그러다 붙임성 좋은 한 남자를 알게되고 그 사람과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게 되면서 왠지 사랑에 빠진듯한 느낌. 이게 다잖아요. 봄을 담은 이야기들은 늘 여기까지더군요. 맞아요. 사랑의 설레임. 딱 봄다운 이야기예요. 사진을 포기하려는 남자에게 현미씨가 한 말이요. 나는 그 말이 참 좋았어요. 어쩌면 다른 드라마 같으면 억지처럼 고래고래 고함지르며 꿈을 포기하지 말라며 어쩌구 저쩌구 했을텐데. 현미씨는 그냥 심드렁하게 카메라 렌즈로 하늘을, 나무 위를 올려다보면서 재능이 없는 게 아니라 욕심이 많은 거 아니예요? 그러면 그만두는 게 아니라 더 많이 찍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랬잖아요. 그 사람, 거기서 현미씨한테 완전 뽕 갔을 거예요. 장담해요. 그 순간 그 남자의 표정을 봤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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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년 후. 똑같은 옷을 입고 다시 나타난 현미씨는 너무 귀여웠어요. 그 나풀거리는 샛노란 옷이라면 어디서든 눈에 띄였을텐데 왜 그렇게 그 사람은 현미씨를 못 찾은 걸까요. 정말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람과 현미씨가 인연이였던 걸까요. 그 남자는 사진을 포기했을까요. 더 열심히 찍어대고 있을까요. 벚꽃길은 어찌 그리 아름다울까요. 흩날리는 벚꽃처럼 그렇게 사라져버리는 순간들은 왜 그리 많을까요. 빠알간 벤치 위의 사진을 그 남자는 발견했을까요. 우리는 다시 사랑하게 될까요.

       현미씨. 우리 내년 만우절날 다시 만나요. 은어가 살던 곳에서요. 기다릴께요. 만우절 약속이라고 무시하지 말아요. 봄은 이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것이였군요. 발개 벗겨지는 느낌에 겨울 뒤에 봄이 오는 게 약간 부담스러웠거든요. 나는 이제서야 조금씩 봄을 알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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