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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시 눕눕
    모퉁이다방 2021. 4. 22. 14:13

     

      지난 정기 검진때까지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제 검진주기가 한달에서 2주로 바뀌었고, 마지막 진료 때 아가는 2주 사이 500그램이나 늘어 있었다. 아직 역아였지만. 선생님은 내가 많이 노산이라 아기가 돌더라도 수술을 원하면 할 수 있다고, 노산은 보통 진행이 많이 느려 골반이 좋더라도 힘들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내가 자연분만을 원하면 할 수 있다고 하셨다. 주변에서 수술이 나쁘지 않다고 권하는 사람들이 꽤 있어 수술 쪽으로 마음을 먹고 있다. 탕이는 몸무게가 는만큼 태동도 힘차졌다. 이제 밖의 소리를 다 듣는단다. 선생님은 초음파에 아가 얼굴이 보이자 "안-녀영, 아가야." 하고 인사를 건넸다.

     

      다음 진료 날짜를 처음으로 평일로 잡았다. 그날 막달 검사를 한다고 했다. 5월부터 휴가를 쓸 거니 5월 첫번째 월요일로 잡았다. 매일 산책하고 아가 옷과 손수건 빨래도 하고, 혼자서 영화도 보러가고 등등의 소소한 계획들이 있었다. 그런데 화요일 출근하려고 일어났는데 아주 옅은 피가 묻어 나왔다. 아주 옅었고 그동안 피가 두어번 난 적이 있어 침착하게 팀장님한테 연락을 하고 휴가계를 냈다. 병원 진료가 9시 반부터라 1시간 정도 누워 있었다. 피는 멈춘 것 같아 샤워를 하고 남편과 함께 아침을 챙겨 먹었다. 그러고 화장실을 갔는데 좀더 짙은 피가 묻어 나왔다.

     

      선생님은 진료실에 들어서자마자 피가 났다고요? 얼마나 났어요? 물으셨다. 먼저 배초음파를 봤다. 아가는 잘 있었다. 대기실에서 기다릴 때 태동이 느껴졌는데 손이며 다리며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여전히 역아이고. 선생님이 6센치 근종 때문에 못 도는 걸 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질초음파를 했는데, 피는 보이지 않고 자궁경부가 입원했을 때보다 반 정도 짧아졌다고 한다. 벌어진 틈도 보이고. 30주에 들어서면서 배가 많이 나오고 피곤함을 자주 느꼈는데 그래서 그런걸까. 태동검사를 하고 수축이 잡히면 입원을 하고 잡히지 않으면 일단 외래진료를 보자고 했다. 다행히 수축은 없었다. 질정처방을 받았다. 그리고 집에서 누워만 있으라고 했다. 출근도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일주일 뒤에 보자고 하시며 34주에는 나와도 되는데 그 전에 나오면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엄마가 최고의 인큐베이터잖아요, 집에서 누워만 있으세요. 오늘이 32주 5일차이다.

     

      회사는 바로 휴가를 냈고 그날부터 다시 눕눕의 생활이다. 아무 것도 못하고 누워만 있으니 답답하고 힘들다. 티비를 보다 잠이 들고 혼자 밥을 챙겨 먹고 그러다 갑자기 서러워지기도 하고. 창문 밖의 숲은 점점 초록초록해지고 있다. 빨래라도 하고 싶은데 움직였다 자궁경부가 더 짧아지면 위험하니 잠시 앉았다 대부분 누워 있는다. 한 이틀은 티비만 보며 지냈는데 이제 정신을 차려야지 싶어 음악을 틀고 책을 꺼냈다.

     

      4월에 엄마가 올라오셨다. 코로나와 임신 때문에 명절에도 못 내려갔더니 엄마가 내 배 나온 모습을 영영 못 볼 것 같아 한 번 올라 오라고 했다. 아빠는 올라오셔도 딱히 할 게 없으니 답답하다며 출산하면 올라오신다고 하셨다. 동생과 남편과 엄마랑 제일 가까운 서해인 제부도에 다녀왔다. 날이 좋아 사람들이 많았다. 고요한 서해바다를 앞에 두고 나란히 앉아 동생이 집에서 내려온 커피와 나의 최애빵 팟콩파이를 나눠 먹었다. 엄마는 저기 커다란 바위가 보이는 곳까지 걸어갔다 와봐야겠다고 했고 동생이 따라 나섰다. 남편과 나는 캠핑의자에 앉아 자우림의 HOLA! 앨범을 반복해서 들었다. 우리들의 실패로 시작해 모닝 왈츠, HOLA!로 끝나는 순서였다. 눈 앞의 바다는 천천히 물이 차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보더니 어, 하면서 남편이 뛰쳐 나갔다. 전전 회사 상무님이라고 했다. 나는 멀리서 인사를 했다. 중학생 즈음 되어보이는 아들과 함께 바닷가 산책 중이셨다. 남편이 긴 인사를 나누고 돌아오고 한참 지나 엄마와 동생이 돌아왔다. 제부도를 나와 제부도가 내려다보이는 가게에 들어가 쭈꾸미 샤브샤브를 땀을 뻘뻘 흘려가며 먹었다. 우리가 지나온 바다에 물이 점점 들어차는 모습이 보였다.

     

      제부도에 가기 전에도 샤워를 할 때 자우림 앨범을 틀어놓고 했는데, 돌아와서 하니 샤워기에서 옅은 바닷내가 나는 것 같다. 그 한가했던 풍경이 떠오른다. 남편은 앞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고 엄마와 동생은 저 멀리 바닷가를 걷고 있고. 차례차례 나와 아가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풍경. 이번에는 엄마와 싸우지 않았는데 (세자매 중 엄마랑 제일 많이 싸우는 큰딸이시다) 엄마가 아가에게 애틋한 마음을 얘기할 때 뭉클했다. - 아빠는 기다렸다는데 엄마도 기다렸어? - 아니. 나는 안 기다렸는데. 생길 때 되면 생기고 아니면 아닌 거고 생각했지. - 내가 들으니까 손주는 자식과 비교가 안되게 귀엽대. - 응. 그렇다더라. 엄마 친구들도 다 그러더라. 귀여워 죽는다고. 엄마는 두 밤을 자고 갔는데 첫날 밤에 내려오는 눈꺼풀을 버티다 안 되겠는지 방으로 들어가며 내 배를 톡톡 치며 탕이야, 내일 보자, 엄마랑 잘 자, 했다. 그러네, 엄마의 철 없는 딸이 이제 엄마가 되네. 눕눕하며 잘 버티다 딱 좋을 때에 누구보다 건강하게 세상에 나와 할머니 할아버지들 엄마 아빠 이모들 삼촌들 만나자, 아가. 다시 눕눕의 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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