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배려
    모퉁이다방 2021. 3. 27. 14:41

     

     

     

       오월부터 쉬기로 했다. 연차 소진하고 출산휴가 들어가기로. 삼십대에는 단 한번도 회사를 쉰 적이 없다. 오월에 어떤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지 기대도 되고 셀레기도 한다. 더불어 다가올 진통의 시간과 육아의 시작이 걱정도 되고. 아가는 아무래도 나를 닮은 것 같다. 입체초음파의 입이 완전 도톰한 것이 나다. 눈은 감고 있어서 잘 모르겠고, 코도 양수에 불어 있어 잘 모르겠는데 입은 딱 봐도 나다. 나를 닮은 아이가 초여름이 되면 이 세상에 존재를 드러낸다는 게 아직까지 믿기지 않고 신기하기만 하다. 오월에는 사놓은 손수건과 천기저귀 빨래도 하고 물려받은 작디작은 옷들도 빨아야지. 어제는 남편의 지인이 아가옷을 잔뜩 물려줬다. 지인의 아가는 돌을 앞두고 있는데 사실은 두번째이지만 거의 처음 보는 삼촌 이모에게 자기 장난감을 나눠주고 생긋생긋 잘도 웃어줬다. 오월에는 매일 일기도 쓰고, 산책도 하고, 책도 봐야지. 그때쯤이면 동네나무들도 초록초록해지겠다. 의사 선생님은 이제 3키로 남았다고 했다. 아가는 1키로도 안된다며 이제 조절해야 한다고. 하지만 피도 늘고 양수도 있고 등등이 있지 않나요? 라고 말하진 못하고 다음달에 지금과 똑같은 몸무게로 온다고 약속을 했다. 목요일에 먹은 숯불 돼지고기는 정말 맛있었다. 상추와 깻잎 위에 잘 구워진 돼지고기 얹고 새콤한 우렁야채무침과 편마늘을 얹어 한입 가득 입안에 넣으니, 캬- 어제 재어보니 1키로가 늘었더라. 과연 약속은 지켜질 수 있을까. 임당은 재검 끝에 통과되었다. 재검하면서 네시간 동안 한 시간에 한 번씩 피를 뽑았다. 

     

       지하철 임산부석에 관해서는 매일매일 일기를 쓸 수 있을 정도다. 세상에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지 임산부석에 앉은 사람들을 보며 새삼 느낀다. 요즘은 배가 많이 나와서 양보해주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꼭 앉아서 가고 싶던 초중기에는 뱃지를 봐도 잘 일어나 주질 않더라. 뱃지를 잘 보이게 하기 위해 가방까지 일부러 샀다. 이번 주에는 이런 분을 만났다. 1호선은 임산부석이 비어 있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그날의 퇴근길에도 누군가가 앉아 있었다. 젊은 여자였고 큰 쇼핑백을 가지고 있어 뱃지가 잘 보이지 않았다. 대놓고 볼 수도 없어 처음에는 왜 안 일어나지? 생각했고 (조금 화가 났고) 혹시 임산부인가? 생각했다. 예전에 임산부 아닌 사람이 앉아 있어 속으로 부글부글했는데 뒤늦게 뱃지를 발견하고 미안했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아무튼 양보해주지 않으면 어쩔 수 없으니 그냥 책이나 보자 하면서 가고 있었다. 퇴근길이라 사람들이 꽤 있었다. 몇 정거장을 더 갔는데 갑자기 뒤에서 한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그러면서 저기 자리가 있어서요. 이리 와요, 하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바로 뒤로 아니고 멀리 대각선 라인에 있는 자리였다. 좌석 앞에 사람들이 일렬로 촘촘히 서 있었는데 어떻게 저 멀리서 나를 보신거지? 아주머니는 혹시 누군가 앉아버릴까봐 자기 에코백을 자리에 놔두고 나를 데리러 온 거였다. 여기 앉아요, 하더니 맞은편 좌석쪽으로 가 한참을 서서 가셨다. 지하철에서 몇 번의 양보를 받아봤는데 이렇게 눈물나는 양보는 처음이었다. 나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연거푸 말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복 받으실 거예요. 이 분에게 좋은 일이 많이 일어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대신 뱃지를 보고, 만삭의 배를 보고 바로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는 젊은 사람들을 보면 빈다. 너도 임신해서 꼭 너 같은 사람들만 만나기를. 배가 점점 불러오고 있다. 이렇게 뱃가죽이 늘어나는 게 신기할 정도로. 이번 주에는 읽고 있던 책 하나를 끝냈고 또 하나를 시작한다. 아가 책도 여러 권 샀는데 포동포동한 손으로 읽어달라고 가지고 올 생각을 하면 뭔가 마음 한 켠이 따땃해진다. 나오는 날까지 건강하자, 탕이야.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