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밍고

from 여행을가다 2017.06.28 06:42


 
   오늘도 새벽 일찍 일어나버렸다. 비가 내리길래 친구가 여행에 가지고 가라고 챙겨준 캔들을 켰다. 나무심이라 켜자마자 타닥타닥 소리가 났다. 비가 오니 왠지 라면이 땡겨, 가지고 온 컵라면 5개 중에 하나를 끓여 먹었다. 아침부터. 오늘도 그 느끼한 빵을 먹을 생각을 하자 라면 생각이 절로 났다. 사실 전날 방에 가져와놓고 너무나 피곤해서 못마신 맥주가 아쉬워 새벽에 한 캔 땄다. 비도 오고 해서.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온라인으로 예매해뒀다. 금요일에 가보니 사람이 너무 많아 오전 9시 45분 입장으로 예약해뒀다. 일찍 가서 맞은편 공원에서 성당을 가만히 올려다 보고 싶어 조식을 건너뛰고 걸어갔는데, 잠시 그친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공원 벤치에 앉진 못하겠고, 어딜 들어갈까 계속 고민하다 츄러스를 파는 작은 가게 옆에 있는 또 다른 작은 가게 테라스에 앉았다. 주인 아저씨가 계란으로 만든 전과 비슷한 음식을 손님에게 내어 놓았는데, 너무 맛나 보여 뭐냐고 물어봤다. 뭐라고 말해줬지만, 알아들을 리가 없지. 아저씨는 너무나 바쁘시고. 그냥 전에 앉은 사람과 옆 테이블 사람이 모두 시킨 것 같은 커피를 시켰다. 유리잔이 마음에 드는 것. 파는 음식들이 맛나 보여 시키고 싶었는데, 입장 시간이 간당간당했다. 중국이나 대만 쪽인 것 같은 알바생이 있었다.

   드디어 사그라다 파밀리아 입성. 비는 그쳤지만 날이 흐려 좋아하는 스테인글라스로 들어보는 빛의 향연은 즐길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흐린대로 운치가 있었다. 덕분에 너무 붐비지도 않고. 성당의 내부에서는 뭘 들으면서 구경하고 싶어 이비에스 가우디 다큐 영상을 들었는데, 흠. 별 감흥이 없었다. 성당 밖에 나와서 가우디의 탄생의 파사드와 수비라치의 수난의 파사드를 순서대로 둘러보았다. 가우디의 파사드는 훌륭해보였지만, 이상하게 나는 수비라치의 파사드에 더 마음이 움직였다. 명성이 자자한 가우디의 뒤를 이어 파사드를 만들게 되었을 때, 수비라치는 영광스러웠겠지만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 가우디와 수비라치의 파사드는 너무나 극명하게 대비되어 오늘날에도 논란이 있단다. 수비라치의 피사드는 가우디에 비해 선이 단순해보이지만 거기에 느껴지는 울림이 있었다. 특히 베르도. 성당 바깥에 나와서 수비라치의 파사드를 둘러보다 갑자기 이소라 음악이 생각났다. '아멘'을 틀고 파사드를 둘러봤다. 베드로의 파사드를 올려다 봤다. 그 표정이며, 뒷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울뻔 했다. <침묵>의 기치지로 생각이 났다.

   그리고 숙소로 걸어 돌아오는 길에 납작복숭아도 사고, 체리도 사고, 올리브도 샀다. 길 가다가 너무 배고파 요기를 잠시 채우고자 바르의 테라스에 앉았는데, 중국인이 운영하는 바르였다. 불친절해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았지만, 오징어 튀김과 맥주로 배를 채웠다. 숙소에서 쉬다가 저녁을 먹고 카딸루냐 음악당의 플라멩고 공연을 보러 길을 나섰다. 친구가 선물해준 어깨가 파인 블라우스를 꺼내 입었다. 음악당 근처에 야경투어 가이드가 추천해준 타파스 맛집이 있어 걸어갔는데, 이미 만석에다 대기까지 있었다. 지나가며 보니 창가 자리에 어려보이는 한국인 여자 둘과 남자 하나가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민박집에서 만났을까, 인터넷 카페 벙개일까. 참으로 젊어 보이네, 맛있니? 속으로 물으면서 지나갔다. 지도를 검색해보니 근처에 한번 찾아보았던 집이 있어 들어갔다. 자그마한 가게였는데, 사람들의 후기대로 무척 분위기가 있었다. 바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들여다봤다. 역시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추천을 받았다. 어떻게 먹는 거냐고 물어보니 마음대로 먹으라고 했다. 빵이나 과자 위에 얹어 와사비 소스를 얹어 먹거나, 그냥 먹거나. 말해준 대로 작은 빵에 훈제된 생선을 잘라 얹히고 와사비 소스를 조금 발라 먹는데, 와! 맛있다. 그야말로 맥주 안주구만. 뒤따라 들어온 예쁜 서양 언니와 오빠도 내가 먹는 걸 보더니 하나 시켰다. 그 언니는 어떤 샐러드도 먹었는데, 정말 맛있는지 최고의 수식어들을 다 붙여 칭찬을 하더라. 서양언니는 웨이터 언니의 신상까지 털었다. 웨이터 언니는 영국에서 왔고, 매일매일 일한다고 했다. 디저트 체리까지 다 챙겨 먹고 일어났다.

   음식이 맛있긴 했는데, 혼자 먹기엔 좀 느끼했다. 처음엔 원더풀한 맛이었지만. 돈이 아까우니 다 먹기 위해, 그리고 진짜 맛있어서 두번째 맥주까지 시켜 마셨는데, 이게 문제였다. 방금 밥을 먹어 배는 터지겠고, 맥주는 두 잔이나 마신거지. 저렴하지만 나름 좋은 좌석이라고 생각했던 음악당 좌석은 무대와 꽤 멀고, 앞 사람의 앉은 키가 참으로 중요했던 것이다. 아, 우리나라에서도 공연을 볼려면 좋은 좌석에서 보고, 그렇지 않으면 아예 보지 마라, 라는 나의 신념이 있는데. 그걸 바르셀로나에서 무시해버렸네. 기타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분들은 아주 잘 보였는데, 정작 플라멩고를 추는 무용수들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바르셀로나의 음악당에서 맥주 두 잔과 배가 터질 것 같은 저녁을 방금 막 먹고 온 나는, 졸고 졸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포기하고 졸아 버려서 춤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 그래도 앵콜 무대는 옆에 자리가 비어서 제대로 봤다. 잠이 달아나니 너무나 멋지더라. 티켓값 생각이 절로 났다. (다른 곳에서 다시 봐야 할 듯;;) 음악당은 내부가 무척 아름다워 가이드 투어 말고 돈을 좀더 주고 공연을 보라고 했던 가이드의 추천에 따라 보았는데, (공연은 못봤지만) 건물이 정말 아름답더라. 1층으로 내려와 마치 졸지 않은 사람처럼 천장과 벽면을 열심히 구경하고 나왔다. 숙소까지 걸어가는 길은 공연비만큼 아쉽고 우울했지만, 어쩌겠어. 깨끗하게 씻은 뒤 빠빳한 이불 덮고 잤다.


바르셀로나, 다섯째 날. 오늘의 행복했던 일 : 성당에서 이소라를 들은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