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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넷째날, 오키나와
    여행을가다 2017. 5. 11. 21:23


       '항구 도시 피레에프스에서 조르바를 만났다.'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에서 나는 조용히 읊조렸다. 이 문장을 좇아 마침내 여기 서 있어, 라고 생각하니 행복으로 마음이 뻐근했다. 눈앞에는 나를 크레타까지 데려다 줄 거대한 6층짜리 배가 서 있었다.

       십사 년 전의 일이다.

       그리스에 가면 뭐가 있는데? 하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나는 무심코 이 말부터 나올 것 같다. 카잔차키스의 묘지가 있지. 그 묘지에서 내려다보이는 작은 이오니아식 마을과 에게 해가 있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볼 만한 곳이야. 아마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 김성중, '묘지와 광장' <그곳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中



       끊어져버린, 작년 오키나와 여행의 기록들. 이제는 기억이 조금씩 가물가물해져버렸지만 (이러니 기록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데), 기록을 이어가본다. 요즘 드는 생각은, 여행지는 가기 전보다 다녀온 후에 더 애정 어린 시선으로 들여다 보게 되는 것 같다. 가기 전에는 곧 떠날 미지의 대상인데, 다녀온 후에 영화나 책이나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언급이 되면 두 눈을 빛내며 보게 되고, 좀더 유심히 들여다 보게 되더라. 앗, 내가 갔던 곳이다! 저런 역사도 있었구나, 하면서. 나의 경우는 다녀와서 그곳에 대한 공부를 좀더 하게 되는 것 같다. 얼마전 읽고 본 소설과 영화 <분노>에서도 오키나와에 대한 공부를 했던 것이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다.


       그리하여, 넷째날 오키나와의 기록들. 넷째날은 여유있게 일어나고, 아메리칸 빌리지에서만 느릿느릿 움직이기로 했다.




    어젯밤의 흔적들.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그치자 동생은 계속 자게 내버려두고, 지갑과 책을 챙겨 숙소를 나왔다.




    커피 마시면서 책 읽고 싶었는데, 마땅한 곳이 없어 편의점에서 커피를 샀다.




    계속 후타츠라고 말해서 커피도 후타츠라고 말해버렸다. 그러고는 나는 한 잔만 주문했으니 한 잔만 받아들고 나왔다. 나중에 바닷가에서 영수증을 보니 두 잔 가격이더라. 다시 편의점을 갈까 생각하다가 말았다. 150엔짜리 히토츠에 대해 생각해보았던 아침.




    어느새 비가 그쳤고, 전날 봐둔 바다와 가장 가까운 원형의 공간에 도착.




    가만 보고만 있어도 지겹지 않았던, 잘도 움직이던 오키나와 대형 구름들.




    처음으로 오키나와에 관심을 가지게 해준 메도루마 슌의 소설책을 가지고 갔다. 오키나와 바다를 마주하고 제일 좋아하는 단편을 읽는데, 뭉클했다. "고타로, 후미도 그렇고 겐타로와 도모코도 걱정하고 있어. 빨리 집으로 가자." 고타로는 현재 혼수상태. 우타는 하루종일 바다만 보고 있는 고타로의 혼에게 집으로 빨리 가자고 말했다. 모두들 걱정하고 있다고.




    곧 비를 쏟아낼 것 같은 구름.




    바다사진을 계속해서 찍고 있으니 줄담배를 피우며 쭈그린 자세로 바다만 계속 보고 있던 일본언니가 내게로 왔다. 귀엽게 웃으면서 말했다. 사진 찍어줄까요? 아, 무서운 언니인 줄 알았는데. 내가 들어간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괜찮다고, 고맙다고 말했다.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아서는 모른다.




    숙소로 돌아오는데, 숙소 근처에 어제 저녁에는 없던 도시락 가게가 열려 있었다. 오전에만 여는 가게인 듯 했다. 맛있어보이는데, 가격도 저렴했다. 고민하다가 나는 큰 것, 동생은 작은 걸로 구입. 밥이랑 반찬이 따끈따끈했다.




    동생은 일어나질 않고, 후식까지 든든하게 챙겨 먹었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동생이 전망이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해서 왔는데,

    비가 와서 테라스 자리에 앉을 수가 없었다는.




    대신 폭신폭신 맛났던 팬케이크를 먹었다.




    무척 고급스러웠던 카페였다.




    근처를 돌아다니다 배고파서 늦은 점심을 먹으러 들어왔다. 비가 와서 구경하는 것도 마땅치 않고, 이동도 힘들었다. 찾으려던 스테이크집을 결국 못 찾아 카레 파는 가게로. 맥주 반주는 기본입니다.




    맛은 그냥 그랬다.




    동생은 피곤하다고 해서 숙소로 돌아가서 쉬기로 했다. 나는 미술관이 있길래 들어갔다. 1층은 무료관람이었고, 2층부터는 유료관람이었다. 1층을 보고 괜찮아 입장권을 샀다. 보쿠넨 미술관이라고, 나카 보쿠넨이라는 판화 작가의 전시였는데, 1년 내내 그의 작품이 전시된다고 했다. 계절마다 다른 주제로 작품들이 바뀐단다. 언젠가 다른 계절에 와서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술관에 사람이 나밖에 없어서 조용히 관람했는데, 그 고요한 시간이 무척 좋았다. 건물의 옥상으로 이어지는 계단도 있었는데, 올라가보니 아메리칸 빌리지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방명록이 있어서 사람들의 기록을 들춰 봤는데, 한국인 관람객의 기록도 있었다. 나도 남겼다.

    엽서 한 장을 사가지고 나왔다.




    그리고 숙소까지 천천히 걸어 돌아오는 길.

    운동장이 있어 들어가서 한바퀴 걸어봤다.

    비온 뒤라 공기도 선선하고, 초록들도 더 선명해지고, 좋았다.




    충전완료된 동생이 궁금했던 가게로 저녁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숙소 근처에 바다가 내다 보이는 분위기가 좋은 가게가 있었는데, 전날에는 마음에 드는 자리가 없어 들어갔다 그냥 나왔더랬다. 그래, 가보자.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손님들이 거의 없었다. 좋은 자리에 앉았다.




    가게에서 밥을 챙겨줘서 그런지 귀여운 냥이 가족들이 떼지어 왔다.




    트인 곳이라 바람도 좋고, 분위기도 좋고. 해가 지는 동안 시간을 보냈다.




    해가 지고 도마뱀이 나타나서 화들짝 놀란 동생. 보호색으로 위장해 나무틀에 숨어있는 도마뱀 때문에 안절부절 못해서 남은 음식을 포장해서 일어났다. 오는 길에 바다에 들렀는데, 멀리 번화가 쪽에서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동생은 들어오자마자 쓰러져 자고, 내일 아침 떠나야하므로 나는 쟁여두었던 맥주를 꺼내 마셨다. 맥주를 마시면서 이소라의 '믿음'을, '이소라의 프로포즈' 버전과 '유희열의 스케치북' 버전으로 연이어 보았다. 많은 밤이 지나,를 부를 때 두 명의 이소라가 있었다.




    여행이 이렇게 철학적인 것인가. 여행이 거듭될 수록 깨닫고 있다. 빗소리가 창문을 마구마구 두들리고 혼자 깨어 있었던 밤. "내일 돌아가면 이 숨막히는 후덥지근함이 바로 그리워지겠지."라고 이 날 메모해뒀었는데, 정말 그랬다. 마지막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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