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만두를 자주 해먹기 시작한 건 새로 산 프라이팬 세트 덕분이다. 남편은 인터넷광고에 적대적이고 홈쇼핑에 관대하다. 내가 파주로 출근을 하던 시절, 전철역까지 데려다주고 집에 와 자신의 출근시간까지 어중간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남편은 반신욕을 하거나 소파에 누워 티비를 보곤 했다. 합정역에 도착하면 혹여나 자고 있을까 싶어 전화를 했는데 남편은 여러 번 홈쇼핑 얘기를 했다. 지금 나오고 있는데, 살까살까? 그렇게 산 물건이 소갈비탕, 프라이팬 세트 등등. 주부들이 주고객층인 아침 홈쇼핑 덕분이다.
새로 산 프라이팬 세트는 작은 프라이팬 하나, 큰 프라이팬 하나, 윅 하나, 중식도로 구성되었다. 작은 프라이팬은 윅 정도로 깊이가 깊다. 뚜껑도 있고. 어느 날 뭘 먹을까 고민하다 작은 프라이팬을 보니 만두 굽기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름을 넉넉히 두르고 불을 약하게 켠다. 팬이 달구어지면 만두를 팬 가득 나란히 배열하고 뚜껑을 닦는다. 한 면이 노릇노릇하게 익기 시작하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고 만두를 뒤집는다. 거기에 물을 소주잔 한 잔 정도 붓고 다시 뚜껑을 닫는다. 지지직 소리가 나고 팬에 김이 가득해진다. 물이 거의 없어지고 다른 면도 노릇노릇하게 익어가면 꺼낼 타이밍.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군만두 완성이시다.
조리원 입성 첫날 울었다. 의지했던 남편을 2주동안 만날 수 없고 낯선 곳에서 생애 처음 해보는 일을 혼자 해야 한다는 사실이 턱 밑까지 부담으로 다가왔다. 조리원 일정은 간단했다. 코로나 때문에 프로그램은 진행되지 않았다. 수유와 아침, 점심, 저녁식사. 마사지가 있는 날이 있고 없는 날이 있었다. 수시로 수유를 해야했고 아침과 저녁에 모자동실 시간이 있었다. 아침식사 뒤에는 생과일주스가 점심식사 뒤에는 두유를 곁들인 간식이 나왔다. 야식으로는 호박죽. 수유는 각자 방에서 했고 식사는 칸막이가 설치된 식당에서 다같이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뭐가 잘못되었는지 알겠는데 당시에는 이유를 몰라 답답했다. 배고프다고 울어대며 방으로 들어온 아이는 젖을 물리자마자 잠들어버렸다. 이번엔 제대로야, 양껏 먹여 보냈어, 점점 방법을 터득하고 있어, 싶었는데 30분도 되지않아 신생아실에서 콜이 왔다. 탕이가 배고파하네요. 보충할까요? 원장선생님이 가끔 와서 자세를 잡아주고 방법을 알려주셨지만 계실 때는 잘 되던 것이 혼자 있을 때는 되지 않았다. 아기와 함께 끙끙대며 시간을 보내다 낙심하며 신생아실에 데려다 주는 일상이었다.
마사지를 받는데 옆의 분이 말하더라. 삼일 정도까지는 진짜 우울했어요. 3일이 지나자 적응되나 싶었는데 그 뒤부터 시간이 쏜살같이 가는 거예요. 퇴소를 앞둔 분이었다. 정말 맞았다. 삼일까지 매일 울었더랬다. 외로워서. 수유가 뜻대로 되지 않아서. 밤에 잠을 잘 수 없어서. 가슴이 너무 아파서. 답답해서. 그 3일동안은 식당에서 말없이 밥을 먹었더랬다. 4일째 되는 날이었고 점심시간이었다. 조금 늦게 갔더니 늘 앉던 자리에 그 날 입소한 분이 앉아 있었다. 다른 자리를 찾아 앉았다. 국을 한 술 뜨니 앞의 분이 말을 걸어왔다. 첫째세요? 수술하셨어요? 아프진 않으세요? 병원이 어디였어요?
그렇게 앉은 네 사람이 밥멤버가 되었다. 물론 그 날 입소한 누군가가 내 자리에 앉아 있으면 다른 곳에 가 앉기도 했지만 이제는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첫째세요? 자연분만이요? 많이 아프시죠? 병원이 어디예요? 실밥은 풀으셨어요? 견딜 수 없을 것 같던 조리원 생활이 점점 괜찮아지기 시작했다. 하루 세 끼를 같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눠보니 겉으로 봤을 땐 다들 잘 하고 있는 것만 같았는데 나와 다를 바 없었다. 다들 서툴렀고 (심지어 둘째 엄마까지) 다들 몸이 조금씩 아팠고 다들 수유가 뜻대로 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다들 조리원 후의 생활을 걱정하고 있었다.
'2개월 된 아기를 키우는 오드리' 라는 문구에 이끌려 보게 된 <렛다운>은 그런 드라마였다. 육아교실에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육아교실 첫 날, 오드리는 수업을 듣다 중간에 일어난다. 오드리는 자신의 죽을 뻔 했던 출산경험을 공유하고 싶지도 않았고 잠들지 못하는 아이를 재우기 위해 매일 밤 드라이브를 하고 있다는 사실도 말하기 싫었다. 자기는 혼자 잘 할 수 있다며 이런 육아교실 따위는 필요없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 하지만 다음 수업에 돌아온다. 그리고 자신의 죽을 뻔 했던 출산경험을 공유하고 매일밤 잠 못드는 아이를 재우기 위해 차를 몰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다들 문제 없어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것을 서로 공유하기 시작하며 나의 생활이 괜찮아진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된다.
드라마 마지막 회. 네 아이를 키우며 알코올에 의존하는 바버라는 술을 멀리 하기 위해 매주 한번씩 댄스홀을 찾는다. 그리고 육아교실 친구들을 부추겨 함께 춤을 추러 가자고 한다. 친구들은 바버라 덕에 오래간만에 모이고 댄스홀 앞에서 근황을 나눈다. 오드리는 준비되지 않은 몸으로 임신을 해 결국 둘째를 낙태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지만 자신의 몸을 위해 아이를 포기했다는 사실이 무척 힘이 들었다. 비난받을까 겁났고 자신이 엄마 자격이 있을까 자책하기도 했다. 그래서 함구했다. 그러다 술을 잔뜩 마신 어느 날 남편과 이야기를 한다. 남편은 누군가와 이 이야기를 나누라고 한다. 그 뒤 엄마에게도 털어놓고, 육아교실 선생님께도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이 날 댄스홀 앞에서 친구들에게 갑자기 말해버린다. '그냥 자기들한테 말하고 싶었어. 털어놓으려고 했었거든. 오랫동안.' 친구들은 괜찮다며 자기도 했었다고 말하고,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다독여주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고 함께 울어준다. 어제 설거지를 하다 생각했다. 결국 이 드라마는 소통에 대한 이야기였구나. 털어놓으면 생각보다 훨씬 괜찮아질 수 있다고. 그러니 혼자서 끙끙대지 말자고. 함께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하자고.
창밖이 뿌예지더니 소나기가 쏟아졌다. 두 차례. 어제 오후의 일이다. 막 쏟아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금새 환해졌다. 지금 나가서 동네 한바퀴를 산책하면 얼마나 좋을까. 비가 내려 공기는 서늘하거나 시원할테고 풀들은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을 거고 하늘도 깨끗할테고 초여름같은 선선한 바람이 살짝 불 수도 있을텐데. 책을 가지고 나가 걷다가 커피집이나 빵집에 들어가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도 있을테고 일찍 문을 연 술집이나 편의점에 들러 시-원한 생맥주 한 잔이나 맥주 한 캔을 야외 테라스에서 의자 물기만 살짝 털어내고 마실 수 있을텐데. 돌아오는 길에 궁금했던 동네 작은 책방에 들러 책을 한 권 살 수 있을테고 좋아하는 꽃집에 들러 작은 꽃 한다발을 사가지고 올 수도 있을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역류방지쿠션에 올려놓은 지안이가 창밖을 지그시 올려다보고 있다. 지안이는 매일매일 창밖을 보거나 무얼 보는지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데, 어제는 그 시선을 따라가게 되더라. 지안아, 뭐 보고 있어? 뭐가 있어? 하는데 하늘에 길다란 무지개가 떠 있었다. 와 지안아, 무지개다. 지안이 덕분에 엄마가 놓치지 않고 무지개를 보네. 무지개를 가늘었지만 높고 길었다. 둘이서 비 개인 하늘을 한참을 올려다봤다. 어제는 아이의 50일이었다. 무지개 사진을 찍어 가족단톡방에 보냈더니 극성팬 1호인 엄마는 무지개도 지안이 50일을 축하해주네, 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선선한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하는 늦여름이 되면 둘이서 유모차를 타고서 산책 할 수 있겠지.
요즘 즐거움 중 하나는 바로 요거트. 시판 요거트는 너무 달고 그리 달지 않은 건 비싸고 해서 직접 만들어 보기로 했다. 예전에 그릭요거트를 만들어 본 적 있는데 면보 걸러내고 냉장고에 숙성시키는 시간도 있고 해서 매번 해 먹기는 번거로웠었다. 요거트 만드는 법을 다시 검색해보니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리고 꽤 맛있어서 계속 만들고 있다. 넉넉한 밀폐용기에 1리터 우유를 붓고 마시는 요구르트도 붓는다. 닥터캡슐로 해봤는데 잘되더라. 나무 숟가락으로 휘휘 저어준 뒤 예열해놓은 전자렌지 겸 오븐에 넣어둔다. 잠들기 전에 넣어두고 아침에 꺼낸다. 밀폐용기를 흔들어 내용물이 단단해진 걸 확인한 후 냉장고에 넣어둔다. 아침밥을 허겁지겁 먹고 아침수유를 하고 아기가 잠이 들면 밀폐용기를 꺼낸다. 손잡이가 없어 잘 쓰지 않았던, 엄마가 준 고전적인 모양의 컵을 꺼낸 뒤 요거트를 가득 담는다. 여기에 다섯가지 베리로 만든 잼을 한 스푼 얹고 잘게 다진 견과류를 잔뜩 뿌린다. 얼마 전에 꽃집에서 산 메이드 인 타이 컵받침을 들고 집 안에서 제일 편한 공간에 가서 먹는다. 별 것 아닌 것 같은데 매일 아침 이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점심으로 샌드위치 세트를 시켰다. 닭가슴살 샌드위치와 디카페인 커피. 출산하고 커피는 두 번째다. 조리원에서 원장 선생님이 작은 종이컵에 따라준 걸 아껴 마셨더랬다. 수유를 끝내고 잠든 아이를 보듬어 트림을 시키려 노력한 뒤 침대에 눕혔다. 밤낮을 구별하게 하려고 낮에는 아기침대가 거실에 있다. 문밖으로 옅게 부스럭 소리가 났고 연이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문할 때 이렇게 남겼다. 아기가 있어 문앞에 두고 노크해주세요. 오늘은 커피가 간절했다. 샌드위치를 한 입 물고 그동안 참았던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창 밖을 보니 그제서야 구름이 보였다. 초록으로 물든 산 위에 짙고 풍성한 구름이 가득 차 있었다. 근사한 구름이었다. 여행지에서 이런 구름을 만났더라면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었겠지 생각했다. 요즘 핸드폰 메모장에 다시 비행기를 타고 다른나라로 갈 수 있다면 사올 것들 목록을 적어두고 있다. 그 나라 비누 사오기. 요거트 사먹기. 특이하고 자그마한 접시 사오기. 그 나라 맥주 마시기. 잔뜩 사놓고 미처 못 마신 맥주는 트렁크에 담아오기. 요즈음 집에서 온종일 생활하면서 친구들에게 선물받은 물건을 자주 쓰게 되는데, 그때마다 그 사람의 마음을 떠올린다. 샤워를 하고 설거지를 할 때 수제비누를 쓰며 B를 생각하고, 접시에 음식을 담으며 S와 B를 생각한다. 잠옷을 입으며 M과 S를 생각하고, 화분에 물을 주며 H를 생각한다. 아직 몇일 쓰지 못한 5년 다이어리로 S를 생각하고, 아가에게 옷을 입히며 H씨를 생각한다.
낮에 트림을 시켜줄 때 넷플의 영상을 조금씩 보고 있다. 갓 육아를 시작한 엄마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보기 시작했는데 재밌어서 트림을 시키지 않을 때도 보고 있다. 1시즌 마지막에 이런 대화가 나왔다. 실수투성이 초보엄마 주인공과 느긋한 나이의 육아교실 선생님과의 대화이다.
- 작은 일에도 짜증이 나요. 사람들이 운동하거나 제러미가 숨 쉬는 소리도 짜증 나요. 괴팍한 엄마가 되고 싶진 않아요.
- 당연히 그렇겠죠. 당신이 이상한 게 아니에요.
- 전 엄마가 되기엔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요. 지난주에 애랑 떨어져 있었는데 정말 편안하더라구요. 마루를 닦고 엄마랑 싸우는 것조차 괜찮았어요.
- 정상인 거죠. 진짜예요.
- 이러다 늘 애가 뒷전이 되면요?
- 어떻게 될 지 미리 사서 걱정하지 마요.
- 저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 그것도 정상이죠. 에스터가 이번주에 그러더군요. 엄마이기도 하지만 나는 나라는 걸 깨달았대요. 그게 사실이구요.
- 맞아요. 에스터는 똑똑하니까요. 정말 똑똑하죠. 좀 재수없긴 하지만.
- 그래도 에스터는...
- 정말 재수없죠.
- 맞아요.
- 영리하긴 해요.
- 계속 과거만 돌아보면 잃게 된 것만 자꾸 떠오를 거예요.
- 남편이랑은 어때요? 이름이 뭐였죠? 제러미였나요?
- 네. 사이가 좋진 않아요.
- 아기가 울면 꼭 안아주잖아요. 무슨 이유로 울건 간에 아기를 이해하려 하고 또 안심시키려 노력하죠. 그렇죠. 스스로나 다른 이에게도 똑같이 한다고 생각해봐요. 우린 그냥 다 큰 아기들일 뿐이에요.
그리고 육아교실 선생님은 주인공에게 사람들과 계속 대화하라고 말한다. 육아교실 내내 시크한 태도를 유지하던 선생님이 눈물을 글썽이는 주인공의 등을 톡톡 두드려 준다.
오늘 새벽에도 백수린을 읽었다. 이번엔 '중국인 할머니'였다. 환하고 둥그런 달이 등장하는 소설이다. 어제는 새벽 두시와 다섯시에 수유를 했다. 남편은 외근까지 한터라 피곤해 두번의 울음소리를 듣지 못했고, 나는 두시에 수유를 하다 다리랑 팔이 저릿저릿했다. 전날 밤에도 다리가 저릿했는데 혈액순환이 잘 안되고 있었나보다. 족욕을 자주 해주라는 이모님 조언이 있어 수유를 끝내고 세탁실에 있는 아이보리색 세수대야를 가져와 뜨거운 물을 가득 담았다. 금방 식을까봐 뜨거운 물로 받았는데 발을 담그니 너무 뜨겁더라. 찬물을 조금 섞었다. 그사이 재워놓은 아이가 울어 방으로 들어가 조금 더 안아줬다. 이번에는 깨지 않고 잘 잤다. 다시 욕실로 돌아와 그새 식은 물에 뜨거운 물을 좀더 부어 뜨끈하게 만들었다. 물에 발을 담그고 낮에 읽다만 '중국인 할머니' 페이지를 펼쳤다.
"그때 왜 떠나지 않고 이곳에 남으셨어요?"
새할머니의 긴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후, 내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말투로 물었다.
"이렇게 너를 만나려고 그런 게 아니었겠냐."
새할머니가 내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면서 농담하듯 웃었다. 새할머니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었구나. 만발했던 여름 꽃송이가 차례로 떨어진 마당은 밤하늘 높이 두둥실 떠 있던 커다란 연등 때문에 환했다. 새할머니의 손끝에서는 낯선 기름 냄새가 났다. 올해는 유난히 달이 밝대요, 하던 내 말에 그렇구나, 새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 149쪽, <참담한 빛>
물을 버리고 발을 닦은 뒤 대야를 다시 세탁실에 옮겨뒀다. 아이가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한 뒤 침대에 누웠다. 저릿한 기운이 사라지고 다리가 가벼워졌다. 족욕 좋네, 남편도 언제 하라고 해야겠네, 생각하고 잠들었다.
이번주 목요일이면 산후도우미 이모님의 도움도 끝난다. 처음 이모님이 오셨을 때 모든 게 서툴었고 3주 뒤에 혼자서 어찌하나 싶었는데 걱정할 때마다 이모님이 응원해주셨다. 산모님, 다 하실 수 있어요. 분명 다음주가 다르고 다다음주가 다를 거예요. 정말이었다. 1주차가 다르고, 2주차가 달랐다. 그리고 지금 3주차. 낮시간 동안 혼자서 할 수 있을 거라는 조금의 자신감이 몽글몽글 솟아오르고 있다. 지안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매일 얼굴이 변하고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다. 3.04키로로 태어난 아기가 영유아1차검진 때 벌써 4.4키로. 또래보다 약간 빠르게 건강하게 성장 중이라고 했다.
막막하고 아득한 순간들이 있었다. 모유수유를 하러 처음으로 병원 수유실에 갔을 때. 수유 하는 방법을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는데, 이름이 뭐냐고 묻더니 신생아실에서 아가를 데려왔다. 순식간에 작디 작은 아가가 내 품에 안겨졌다. 작은 입을 가슴 쪽에 가져다대니 빠는 듯 마는 듯 서로 어색하게 품에 안겨 있던 순간. 바로 옆의 엄마는 어찌나 잘하던지. 나중에는 수유하길 포기하고 남은 시간동안 아기 얼굴을 요리저리 바라봤었다. 그리고 남편이 가고 조리원에 혼자 남게 된 순간. 이제 나혼자서 두 주동안 해내야한다는 생각에 왈칵 눈물이 쏟아지던 밤이었다. 사실 조리원은 천국이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여러 통증 때문에 잠 못 들던 밤들. 고작 한 달 지났는데 많은 순간들이 있었다.
오늘은 이모님과 아기의 손톱을 처음 잘랐다. 아기 손톱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부드러웠다. 이모님이 손수건을 동그랗게 말아 아기 손에 넣은 채 잡아주셨고 나는 아기 손톱용 작은 가위를 꺼냈다. 아기는 자고 있었다. 그냥 일자로 살에만 안 닿게 살짝 잘라주면 되요. 혹여나 살을 자르게 될까 자세를 여러 번 바꾸고 조심스레 가위질을 했다. 얇고 여린 것이 쓱 하고 잘려나와 바닥에 톡 하고 떨어졌다. 와, 생각보다 굉장히 부드럽네요. 지금 나는 온통 처음인 것들을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첫 모유수유, 첫 분유타기, 첫 기저귀갈기, 첫 똥 씻어내기, 첫 배냇저고리, 첫 바디수트, 첫 예방접종, 첫 목욕, 첫 유산균 먹이기, 첫 콧속 청소, 첫 손톱깍기.
이제는 모유수유에 아기도 나도 엄청 익숙해져서 둘 다 왠만하게 한 방에 딱하고 합체를 한다. 조리원에서는 매일 아침에 목욕을 시키고 아기를 방에 데려다줬다. 선생님들은 목욕하고 목 마를 때니까 엄마 젖 많이 먹고 와, 라며 아기를 수유쿠션에 눕혀 주셨다. 그러면 아가는 조금은 상쾌해진 표정으로 엄마인지 무엇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신의 앞에 있는 나를 바라보다가 뭔가 자세가 잡히면 아기새처럼 작은 입을 쩍쩍 벌렸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여전히 어려웠던 모유수유를 열심히 해보려고 애를 썼었다. 그런 순간들이 있었다.
불금. 남편에게 약속이 있었고, 남편이 들어오자마자 아기를 맡기고 잠들었다. 다행이 모유양이 많아 밤에 한 번을 제외하곤 모유를 먹이고 있다. 모유가 소화가 잘돼 자주 배고파하는 것 같아 밤에는 푹 자게 분유를 한 번 먹인다. 남편이 혼자 저녁시간을 즐긴 게 미안하다고 제때 분유를 먹이고 재운단다. 덕분에 3시 반까지 푹 잤다. 3시 반에 모유를 먹이고 트림을 시키는데 트림은 나오지 않는 시간을 보내다 침대에 눕혔다. 새벽 4시가 지나고 아가도 남편도 자는데 이상하게 정신이 또렷해졌다. 육아만 온종일 하기보다 아기 자는 시간 틈틈이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엄마도 살 수 있다고 낮에 이모님이 말씀하셨다. 마침 오늘부터 단편 하나씩을 읽어보자 결심을 했더랬다. 거실 소파에 앉아 낮에 읽다만 백수린 작가의 '첫사랑' 단편을 읽어나갔다. 대학시절 짝사랑하던 선배와 오래간만에 만날 약속을 한 주인공이 일일 아르바이트를 하며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한 건 선배를 만날 때 괜찮은 옷을 입기 위해서였다.
"꼭 벚꽃잎 같네."
선배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선배는 고향에 쌍계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 근처 십리 길을 따라 죄다 벚나무가 심겨 있다고 했다.
"그 벚꽃길을 같이 걸으면 백년해로를 한다더라."
선배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선배, 선배는 왜 그런 말을 내게 하는 거예요,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엄마에게 쓰다듬어달라고 머리를 들이미는 아이처럼 선배에게 자꾸만 묻고만 싶었다. 먹색에 가까운 어둠속에서 겨우 형체만 가늠할 수 있던, 본관 앞 벚나무의 새까만 가지 위로 함박눈이 쌓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선배는 내게 할 말이 있는 듯 계속 망설였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선배의 발끝만 보았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지? 선배와 결국 맥없이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배 손에서 나던 은은한 담배 냄새. 내가 교환학생으로 선발되어 러시아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불도 켜지 않고 방 한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J선배와 통화를 하던 밤들이 떠오르면 나는 가끔 그게 궁금했다. 선배도 알았을 텐데. 그날 선배 옆에 서서,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질 4월의 눈을 맞으며, 십리를 선배와 하염없이 걷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내가 속으로 기도했다는 것을.
- 122쪽, <참담한 빛>
새벽 4시. 해 뜨기 전, 비몽사몽이 아닌 채로 깨어있기는 오랜만이었다. '첫사랑'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아득해졌다. 포슬포슬 내리다 손바닥에 닿으면 금새 사라지는 4월의 눈 느낌을 떠올려 봤다. 아, 좋구나 싶었다. 간만이네 이런 감정, 싶었다. 작가가 소설에 쓰지 않은 선배의 근황은 그래서 좋았다. 써버렸으면 여운이 덜 했을 거다. 역시 좋구나, 백수린 작가, 싶었다. 남편은 마치 어디서 해본 것처럼 육아를 배우지도 않았는데 잘 해내고 있다. 나는 조리원에서 이모님께 배우는 데도 서툴고 실수투성이다. (이모님 앞에서 내가 바보같이 느껴질 때가 여러번) 그래서 주눅들어 있기도 했는데 서툴고 실수투성이고 배워도 잘 못하는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천천히 느는 사람이라고. 남편과 내가 함께 가서 남편이 아이를 안고 남편이 능숙하게 똥기저귀를 갈고 있는데도 병원에서는 늘 엄마가 트림을 잘 시켰네요, 엄마가 잘했네요, 엄마가, 라고 말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것 같다. 트림을 잘 시키지 못하는 나는 그 칭찬이 불편했다. 아빠가 더 잘해요, 말하고 싶었다. (왜 말하지 못했는가) 당연하게 엄마가, 로 시작되는 칭찬과 당부가. 더 내 시간을 갖고, 더 내 것을 만들어 가야지. 한수희 작가가 육아를 하며 살기 위해 미친듯이 책을 읽었다고 한 것처럼. 아기와 나, 아빠. 우리 세 사람이 각자, 그리고 동시에 잘 살아가기 위한 것들을 찾아나가야지. 아가와 아빠는 아침잠을 자고 있고 나는 어제 좋았던 글귀를 컴퓨터 한글파일에 키보드를 두드려 옮겨 적는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고 있고 삶아 두었던 달걀 하나를 소금에 콕 찍어 먹고 있다.
이천이십일년 오월 마지막 날에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되는 건 한 순간이었다. 수술 두 시간 전에 병원에 갔고, 진료실에서 마지막 진료를 봤다. 분만실 침대에 누워 대기하고 있다 시간이 되자 수술실에 걸어 들어갔다. 수술대에 누워 이것저것 시키는 대로 했더니 주치의 선생님이 들어와 걱정말라고 손을 잡아 주셨다. 마취가 시작되었다. 아기가 나올 때까지 하반신 마취만 하는 줄 알았는데 물어볼 새도 없이 수면마취가 시작됐다. 눈을 떠보니 숨이 막혔다. 옆에 남편이 있어 여기가 어딘지 지금이 언제인지도 모른채 숨 막혀, 라고 말했다. 남편이 간호사를 불렀고 간호사가 호흡기를 떼어주고 마스크를 벗겨줬다. 수술이 끝났다고 했다. 회복실에 온지 몇시간이 지났다고. 아기는 잘 태어났다. 남편이 사진과 동영상을 보여줬다. 동영상에서 간호사가 두꺼운 요를 감싼 아가를 데려왔고 아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나올 때 양수를 조금 먹었는데 괜찮다고 했다. 동영상을 보는데 눈물이 났다. 감격이나 뭉클 이런 격한 감정보다는 뭔가 내 인생에 정말 큰 일이 벌어졌구나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남산만 했던 배가 푹 꺼져 있었다. (나중에 다시 나왔다. 하하) 다리를 움직일 수 있으면 병실에 올라갈 수 있다는 말에 열심히 다리를 움직였다. 병실에 옮겨다 준 회복실 간호사들이 회복이 무척 빠르다고 했다. (무통 떼자마자 고통이 시작되었다 -_-)
병원에서 보낸 4박 5일 동안 남편이 수발을 열심히 들어주었다. (수발의 사전적 뜻을 찾아봤다. 신변 가까이에서 여러 가지 시중을 듦.) 출산 뒤 나오는 오로 때문에 기저귀 패드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도 열심히 갈아주고 닦...(고맙습니다)아 주었다. 이틀을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배가 고픈 것보다 목이 무척 말랐다. 물을 마셔도 된다고 했을 때 세상에 물이 이렇게 맛있었었나 싶을 정도로 맛나게 미지근한 생수 한 통을 빨대로 꿀꺽꿀걱 마셨다. 누워 있는 동안 남편은 혼자 하루에 두 번 면회시간에 탕이를 보러갔다. 동영상과 사진을 찍어왔는데 매번 자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게 되었을 때는 함께 보러 갔는데 그때도 매번 자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아이는 참 순하구나, 생각했다. 퇴원수속을 하는 동시에 알게 되었다. 그건 착각과 오산이었다고. 하하. 탕이의 이름은 지안이가 되었다. 지혜롭고 편안한 사람.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