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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의는 거절하지 않습니다 2 2021.12.02
  2. 다름 아닌 사랑과 자유 2021.11.18
  3. 첫눈 2021.11.11
  4. 가을비 2021.11.08
  5. 밝은 밤 2 2021.10.26
  6. 산책 6 2021.10.13
  7. 조용한 희망 2021.10.08
  8. 오전시간 4 2021.10.05
  9. 단독주택에 진심입니다 2021.10.03
  10. 결혼기념일 4 2021.09.28

 

    어느 후기 때문에 샴푸를 샀다. 로즈마리 샴푸인데 머리를 감을 때마다 숲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는 거다. 재활용할 수 있는 투명한 용기에 연두빛 샴푸액이 담겨 있었다. 사실 향 만으로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대신 샴푸를 쓸 때마다 그 후기글이 떠오른다. 매일 아침 혹은 저녁 머리를 감으면서 숲에 가 있다는 분. 그 후기를 생각하며 머리를 감으면 나도 슬쩍 숲에 한 발 내딛는 것 같다.

 

   김남희 작가님의 새 산문을 읽었다.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시대의 여행작가 글이다. 여행을 하지 못함으로써 생기는 걱정,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며 겪게 된 경제적인 어려움, 십 년 넘게 산 부암동 집을 떠나는 이야기, 새로 이사한 집에서 시작하는 에어비앤비 이야기, 새집에서는 숲이 무척 가깝다는 이야기, 매일매일 숲을 산책하는 이야기, 그렇게 꾸리게 된 방과후 산책단 이야기, 그 속에서 위로받고 위안이 되어주는 이야기, 경제적으로 어려운 작가를 배려해 세심하고 따뜻한 손길을 내미는 사람들 이야기, 그리고 그의 든든한 가족 이야기. 작가는 여행이 빠진 글을 쓰는 게 걱정된다고 했지만 나는 여행이 빠진 글이 더 좋았다. 일상을 걱정하고 서로 배려하고 힘이 되어주는 이야기가 가득했기에. 인상적이다 생각한 것은 앞으로의 일을 상상하는 부분이 많았고, 그 미래들이 대부분 희망적이고 따스했다는 것이다. 여행이 작가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어 그동안 무게를 잡아주기도 흔들기도 했다며, 열려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의 중심에 단단하게 자리잡은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는 구절에는 허리를 단단히 세우고 배에 힘을 주고 나의 중심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어제는 강풍을 맞으며 좋아하는 동네꽃집에 가 곧 생일인 친구의 선물을 샀다. 잔뜩 골라 유모차 짐칸에 놓고 또 강풍을 맞으며 돌아오는데 아기는 새근새근 잠들었고 좋아할 친구의 모습이 떠올랐다. 작가는 여행 뒤 고마웠던 사람들에게 작은 선물을 보내는 습관이 생겼는데 그걸 두고 이렇게 썼다. "미루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고마움을 매 순간 표현하는 사람이 되고자 애쓰게 되었다." 공감. 완전 공감이다. 책을 읽으면서 샴푸 후기처럼 작가와 작가의 지인들이 만들어가는 따스한 기운 속에 한 발 내딛는 느낌이 들었다. 따스하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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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어떤 마음으로 외국의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정기후원을 했었다. 후원을 하면 그 아이의 사진과 좋아하는 것 등이 적힌 간략한 프로필, 후원자에게 보내는 편지들이 도착했는데 어느 날 후원하던 아이가 갑자기 바뀌었다. 단체에 이유를 물어보니 현지에서 연락이 끊긴 거고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때 후원을 중단하고 싶었는데 어찌어찌 이어나갔다. 남편과 연애 중일 때 남편이 내가 하는 후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했다. 비슷한 성격의 다른 단체에서 후원받은 돈을 아이들을 위해 쓰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다른 형식의 후원을 알려주며 이건 사연을 보고 직접 후원할 수 있는 거라고 했다. 망설이다 정기후원을 중단했다. 그런데 소파에서 나란히 티비를 보다 남편이 갑자기 그러는 거다. 아, 나 2만원짜리 정기 후원 시작했어! 예전에 나한테 했던 말 기억 안나냐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단다. 사진을 봤단다. 엄마도 아빠도 없는 아이들이 보육원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사진. 보육원 선생님은 한 사람이고 안아줘야 할 아이는 여러 명. 지안이 또래의 아이들이 나란히 누워 자신이 안길 차례를 기다리고 있더란다. 그 사진을 보니 마음이 너무 아파서 후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동물에 관한 내용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나는 지금 내게 무척 소중한 한 사람을 생각했다. 너무너무 소중한데 무척이나 연약해서 잘 보살펴줘야 하는 존재. 나를 힘들게도 하지만 너무너무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존재. 이 아이가 커나가는 세상이 지금보다 좀더 좋은 세상이었으면 하는 존재. 많은 경험을 해야겠지만 너무 힘든 사람은 만나지 않았으면 싶은 존재. 세상을 넓게넓게 보고 깊이있게 사랑했으면 좋겠는 존재. 그렇게 생각하자 동물을 키워본 적은 없지만 그 소중한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물을 많이 사랑하는 주위 사람도 생각이 났다. 동물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소중한, 하지만 어떤 이유로 연약한, 그로 인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좀더 좋은 세상이었으면 하는, 그런 자신만의 존재를 떠올리며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뒤의 이야기보다 앞의 이야기들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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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from 모퉁이다방 2021. 11. 11. 00:15

 

   아침에 일어나 비몽사몽 수유 준비를 하고 있는데 창밖으로 무언가 보슬보슬 떨어지는 게 보였다. 눈이 오나봐. 기저귀를 갈고 있던 남편이 그럴리가, 하고 반신반의했다. 내가 서 있는 창 가까이 와서 보더니 어, 진짜네, 한다. 오늘 첫눈이 왔다. 군포에. 오다말다 오다말다 하더니 어느 순간 폴폴 쏟아지길래 남편이 지안이를 안고 창가에 섰다. 아니 내가 이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야겠다며 아이를 안고 창가에 서보라고 했다. 남편은 자세를 잡더니 지안이 등을 토닥거리며 말을 건넸다. 와, 눈이네 눈. 지안아, 눈이 오네. 첫눈이네. 첫누-운. 창가의 둘, 조금 떨어진 곳의 나. 그렇게 셋이 가만히 아침의 첫눈을 지켜봤다. 셋이 되어 보는 생애 첫 눈. 그리고 올 가을 들어 처음으로 보일러를 켰다. 천천히 따듯한 온기가 채워졌다. 이제 뒤집기도 되집기도 자유자재로 하는 아이는 커다란 침대를 만난 덕분에 어제 통잠을 잤다. 자다깼다 이리 움직였다 저리 움직였다 하며 아빠와 엄마의 토닥임없이 크게 칭얼대지 않고 열 시간 가까이 통잠을 잤다. 새벽에 깨지 않고 내리 잘 수 있다는 게 이리 행복한 일이었다니. 오늘도 잘 자주길. 다들 3월에 어린이집을 보내는 게 좋다고 해서 3월 입소로 신청해놓았는데 오늘 한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다. 아직 먼 일인데 마음이 뒤숭숭하네. 내일은 좀더 신나게 놀아줘야지. 오늘 아이를 힙시트 위에 세우고 위아래로 살짝 움직여주니 꺄르르 웃었다. 내일도 잘 놀자, 아가.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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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

from 모퉁이다방 2021. 11. 8. 14:19

 

 

   비가 오니 예전에 살던 동네 생각이 난다. 11층이었던 오피스텔 앞문으로 나와 횡단보도를 건넌다. 바로 펼쳐지는 불광천 길. 오른편에 천을 두고 왼편으로는 자전거 길을 두고 천천히 걷는다. 큰 나무들에 노란색, 빨간색 단풍잎들이 그득하다. 기지개도 펴보고 숨을 힘껏 들이마시면서 이어폰을 꺼내 걷는다. 첫 곡은 루시드폴의 '아직, 있다'가 좋겠다. 걷다보면 이름모를 제법 커다란 새가 물 아래로 부리를 들이미는 모습도 보이고 나뭇잎들이 가을바람에 일제히 사르르 움직이는 모습도 보인다. 그렇게 삼십분 넘게 걷다 월드컵경기장 쪽 계단을 올라 극장에 간다. 찜해뒀던 영화 시간표를 다시 확인하고 무인발권기에서 티켓을 끊는다. 저녁이면 맥주 한 잔을 했을테지만 오전시간이니 따뜻한 커피를 주문한다. 날씨가 쌀쌀하니 라테가 좋겠다. 입장 시간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가지고 간 책을 에코백에서 꺼낸다. 사람도 없고 한적하니 책이 잘 읽힌다. 입장 시간이 가까워지고 화장실을 다녀온다. 그리고 두 시간 동안 사람이 별로 없는 극장에서 집중해서 영화를 본다. 영화는 좋다. 시간을 내어, 일부러 걸어, 영화를 보러오길 잘했다고 생각이 든다. 극장을 나와 불광천으로 내려가기 전 다리 위에서 인증샷을 찍는다. 티켓을 꺼내 날짜와 좌석번호, 영화제목과 시간이 보이도록. 그리고 이 곳의 커다란 나무들이 나오도록. 이어폰을 다시 꺼내 방금 본 영화의 분위기와 비슷한 음악을 검색한 뒤 들으며 집으로 돌아온다. 코끝에 닿는 바람이 쌀쌀한 것이 딱 내가 좋아하는 날씨다 생각하면서.

 

   엄마가 고구마를 보내면서 가지를 여러 개 함께 담아 보내주셔서 어쩌나 하다 검색을 해보니 이탈리아 가정식 음식으로 올리브오일가지절임이 있더라. 구운 가지를 마늘, 허브와 함께 올리브오일에 담아두고 빵 위에 올려먹거나 파스타를 만들어먹으면 맛있단다. 남은 오일은 파스타나 다른 요리 할 때 쓰면 맛나고. 집에 올리브오일이 있어 아이와 함께 유모차를 끌고 나가 마늘을 사왔다. 수퍼에 바질이 있었는데 너무 비싸 집에 있는 깻잎을 조금 넣자 싶었다. 페퍼론치노도 레시피에 있었는데 모유수유 중이라 아예 넣지 않을까 싶다가 약간 넣으면 맛있을 것 같아 세 개 정도만 잘게 부숴 넣었다. 집에 있는 자그마한 병을 세 개 꺼내 끓는 물에 소독했다. 후라이팬에 가지를 굽고 마늘을 굵게 으깨고 깻잎을 가늘게 잘랐다. 커다란 볼을 꺼내 모든 재료를 함께 버무렸다. 벌써 맛있는 냄새가 솔솔 났다. 딱 세 개의 병에 담겼다. 작은 병 하나는 그 날 놀러온 민선이에게 줬다. 맛이 너무 궁금해 다음날 동네빵집에서 올리브가 박힌 치아바타와 말랑말랑한 바케트를 사왔다. 빵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그 위에 가지를 얹었다. 마늘향이 가득 밴 오일이 빵을 촉촉히 적셔줬다. 맛은 성공. 마늘을 너무 많이 넣어서 향이 강한데 다음번에는 마늘을 줄이고 향이 좋은 허브를 함께 넣어야겠다. 

 

   비가 왔다. 이 문장을 쓰고 창밖을 보니 다시 비가 오고 있네. 아까는 개었었는데. 이런 날이면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따뜻한 음료를 만들어 마시며 책을 읽거나 영화를 봤었는데. 다행이 아가가 자고 있어 몇 자 남긴다. 오늘은 꼭 무언가 쓰고 싶은 날이라. 집 앞 산에 단풍이 그득했는데 비와 바람 때문에 많이 지겠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산 덕분에 여름과 가을을 아가와 함께 집에서 잘 견딜 수 있었다. 고마워, 숲아. 여기까지 쓰니 아기가.... 울....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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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 밤

from 서재를쌓다 2021. 10. 26. 21:57

 

 

  아이가 백일이 되기 전이었다. 몸과 마음이 한창 지쳐있던 때. 조금 외로웠던 밤이었는데 완전히 혼자 있고 싶어 반신욕을 했다. 그 즈음 매일 밤 반신욕이 간절했다. 최은영 작가의 <밝은 밤>은 봄이가 선정한 시옷의 책이었는데 출간되자마자 읽으려고 사두었었다. 책을 가지고 들어가 따뜻한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오래 있었다. 두번째 챕터 마지막 문장을 읽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증조모는 열일곱일 때 살기 위해 엄마를 버려야 했다. 병에 걸려 곧 죽을 것이 분명한 엄마를 자신이 살기 위해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간다고 하자 엄마는 말했다. "기래, 가라. 내레 다음 생에선 네 딸로 태어날 테니. 그때 만나자. 그때 다시 만나자." 증조모의 딸, 그러니까 주인공의 할머니는 병에 걸린 자신의 엄마 증조모가 자신을 보며 두 팔을 쭉 내밀며 했던 말을 잊지 못한다. "어마이, 어마이 왔어?"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증조모, 자식의 딸로 다시 태어난다는 고조모, 병에 걸려 딸을 엄마라고 부르는 증조모. 서럽게 외롭고 사무치게 그리운 마음이 정말 환생된 걸까. 이런 생각에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져 나왔다. 위안이 되는 밤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책이었다. 

 

  추석에 남편이 거래처에서 주었다며 커다란 멜론 세 개를 가져왔다. 남편은 과일을 좋아하지 않고 이 세 개를 제때 맛있게 다 먹기란 불가능한 일. 가까이 있었으면 나눠 주었을 사람들이 생각났다. 새삼스레 참 멀리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쉬웠지만 내가 좋은 것을 얻었을 때 아직도 그들을 생각한다는 것이 참 다행스러웠다. 내게 힘을 주는 사람들이 아직도 이렇게나 있다는 것이. 그리고 <밝은 밤>을 떠올렸다. <밝은 밤>은 곁에 있는, 혹은 멀리 있는 힘이 되는 사람들이 떠오르는 그런 이야기이다. 좋았고 좋았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이 작은 책을 얼마동안 가만히 품에 안아주고 싶었다. 수고했어, 고생했어. 그리고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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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대답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그건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아, 엄마. 사람들이 트랙터로 밭을 갈고 있네. 무언가를 심으려고 하나봐. 여름이랑 가을에는 바깥 풍경이 볼만하겠다. 재촉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잖아. 아무도 겨울 밭을 억지로 갈진 않잖아. 

- 16쪽

 

  며칠 지나지 않아 마트 앞에서 할머니와 우연히 만났다. 나는 할머니를 차에 태우고 아파트로 바로 돌아가는 대신에 시내를 한 바퀴 돌았다. 할머니는 차창을 내리고 부드러운 봄바람을 맞았다. 바람에 할머니의 짧은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날렸고 천변에는 꽃들이 한창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주현미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밤공기에 옅은 꽃향기가 섞여 있었다. 기분 좋은 바람. 온전한 봄밤이었다. 할머니는 허밍으로 노래를 따라 했다. 

- 70쪽

 

  연재를 앞두고도 내가 어떤 소설을 쓰게 될지 알지 못했다. 그 무렵 어느 작가 레지던스에 머물 기회를 얻었다. 방에 짐을 풀고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 모니터를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창밖으로 보이던 눈 쌓인 벌판과 한없는 고요함. 그곳에 앉아서 나는 <밝은 밤>을 쓰기 시작했다. 그 기분을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날 나는 다시 쓰는 사람의 세계로 초대받았고, 그곳에서 삼천이를 만났다. 

- 341쪽,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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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from 모퉁이다방 2021. 10. 13. 12:13

 

  어제는 아이가 계속 짜증을 부리며 울길래 산책을 나갔다. 하늘도 흐리고 바람도 쌀쌀해 산책은 생략하려고 했는데 부랴부랴 챙겨 나갔다. 긴팔 바디수트에 이번에 산 민트색 레깅스를 입혔다. 양말도 신기고 모자도 씌웠다. 혹시 유모차에서 울까봐 노란색 튤립 사운드북도 챙겼다. 튤립 사운드북이 여러 개 있는데 노란색 노래들이 경괘해서 그런지 유독 이 튤립을 좋아한다. 나가보니 맞은편 동네 구름이 심상치 않았다. 어둑어둑한 것이 금방 비가 쏟아질 것 같았는데 우리 동네 구름은 많기는 하지만 색이 괜찮아서 근처만 조금만 걷다 오자며 나섰다. 그리고 근사한 구름을 만났다. 유모차를 멈추고 말했다. 지안아, 진-짜 예쁜 노을이다. 그치? 다행이다. 집에만 있었으면 저 예쁜 노을을 못 봤을텐데. 보고 있는건지 그냥 밖에 나와서 좋은건지, 어쨌든 산책 내내 울지도 않고 엄마가 따뜻한 커피를 살 때도 맛나보이는 무화과 케잌을 추가주문할 때도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잠이 들었다. 

 

  가을의 시작. 어제는 딱 이 표현이 어울렸다. 막 추워지기 시작했으니. 가을이 시작되는 온도에 마음이 들떠 잠든 아이를 밀며 좀더 걸었다. 하늘에 자잘한 구름들이 가득했다. 군데군데 노을빛 하늘이 보였다. 저 멀리 반만 찬 달도 보였다. 가만히 걷고 있는데 그동안 남편이 내게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남편은 자기가 애 쓰고 있는 게 보이지 않냐고 했다. 왜 내 생각만 하냐고 했다. 이상하다. 싸울 때는 잘 보이지 않던 남편의 애씀이 이렇게 아이와 함께 혼자 산책을 하고 있으니 뚜렷하게 보였다.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얼마나 힘이 들지. 셋이 잘 살아보자고 각자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왜 나만 다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생각하고 생각했다. 오늘 지안이는 136일. 세상에 나온지 4개월 14일째. 우리가 부모가 된지도 4개월 14일째. 여전히 서툰 초보엄마아빠. 이렇게 한 시절이 지나가고 있구나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이때를 뒤돌아보면 우리 그때 진짜 힘들었는데 잘 해냈다고 말할 수 있기를. 매일 집에 들어오면서 내 기분이 어떤지 눈치를 보게 된다던 남편을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렸다. 오늘은 기분이 무척 좋으니 안심하라고 미리 알려주려고.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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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희망

from 티비를보다 2021. 10. 8. 16:31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틀에 걸쳐 봤다. 아이와 단둘이 있을 때는 티비를 켜지 않는데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자고 있는 사이 틀었다가 깨어나도 끄질 못했다. (미안, 아가) 3살이 되어가는 딸이 있는 알렉스가 함께 사는 남자친구에게 학대를 당하고 그에게서 탈출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 라고 쓰고 사전에서 '고군분투'를 찾아봤다. 고군분투 : 적은 인원(人員)이나 약한 힘으로 남의 힘을 받지 아니하고, 힘에 벅찬 일을 극악스럽게 함. '극악스럽다'도 찾아봤다. 극악스럽다 : 더할 나위 없이 못되고 나쁜 구석이 있다. 극악스럽다는 표현을 제외하면 맞는 것 같다. 탈출은 단순히 도망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의 완벽한 독립이다. 알렉스는 한 번의 실수를 하지만 결국 해낸다. 그녀에게는 어릴 때 엄마를 학대했던 아빠가 있고, 허상에 빠져 삶을 잘 일구어나가지 못하는 엄마가 있다. 도움을 받을만한 가족이 없다. 정부에게서 받을 수 있는 지원 절차와 조건들도 힘이 든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는다. 딸이 있기 때문에. 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알렉스는 얼굴 가득 충만한 미소를 보인다.

 

  알렉스가 이 많은 상처와 고난을 치유해나가는 방법은 글쓰기이다. 카펫에 누워 실의에 빠져 있던 자신을 일으켜 세워준 친구는 한밤중에 말도 없이 떠났지만 그녀에게 노트와 펜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파출부의 고백. 이 제목 아래 자신이 생계를 위해 청소를 한, 그 집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쓴다. 그리고 작가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몇년 전 포기했던 대학교에 재지원이 가능한지 물어본다. 학교는 최근에 쓴 글이 있냐고 묻고 그 글을 보내달라고 한다. 알렉스는 노트에 가득 썼던 이야기들을 타이핑해 전송을 한다. 결과는 합격. 본래의 글쓰기 능력과 그동안 겪은 출산과 육아, 학대와 시련의 나날들이 더해져 그의 글을 더 깊이 있게 만들어주었을 거다. 알렉스에게 잘못이 있다면 제대로 된 남자와 사랑을 하지 못한 것. 다시 한번 시련이 찾아오지만 이번엔 출구를 잘 찾아나간다. 

 

  새로운 삶이 펼쳐질 도시로의 이사를 앞두고 알렉스는 지내던 쉼터에서 글쓰기 치유 교실을 맡는다. 살아오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대해 글을 써보고 사람들 앞에서 그 글을 읽어보는 거다. 좋았던 장면은 발표가 끝나면 한 사람씩 방금 읽었던 글 중 좋았던 구절을 하나씩 이야기하는 거다. 쉼터를 관리하던 책임자도 글쓰기 교실에 참여했다. 그녀는 지옥같았던 시기에 9주된 딸이 자신을 만졌던 순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글을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미소를 띄며 좋았던 구절을 이야기한다. 여과되지 않은 애정. 따뜻한 젖을 주는 여자. 밤낮으로 두려워했던. 작은 손. 그리고 드라마의 제일 마지막 장면. 알렉스가 자신의 글을 읽는다. 이 드라마에서 처음으로 알렉스의 글 전체를 읽을 수 있었다. 글은 "나의 가장 행복한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에서 "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은 네 것이라고."로 끝난다. 나는 잠시 이 글쓰기 교실의 일원이 되어 알렉스의 글 중 좋았던 구절을 읊어본다. 참 많았다. 오래된 참치 냄새가 나는. 내 놀라운 딸. 많은 행복한 날. 300개 하고도 38개의 변기 청소. 페리 선착장 바닥에서의 하룻밤. 내 딸 인생의 3번째 해 전부. M은 매디의 첫 글자. 완전히 새로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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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시간

from 모퉁이다방 2021. 10. 5. 23:32

 

 

  아이가 다시 세네 시간마다 깬다. 이건 신생아 즈음에나 있었던 일인데 (그래봤자 이제 겨우 사개월차) 아홉시나 열시 부근에 자니까 세네 시간마다 깨면 새벽에 두 번을 일어나야 한다는 소리다. 아이를 재우고 약간의 휴식을 취하다 천근만근 몸을 이끌고 자정이 되기 전에 침대에 눕는데 잠든지 한 시간도 안돼 아이가 울기 시작하는 거다. 나는 아침잠 없는 사람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했었다(과거형). SBS 아침뉴스 1부 시작할 즈음에 자동기상하는 사람이었는데 요즘은 3부 끝날 때까지도 정신을 못 차린다. 며칠 전 새벽에는 아이가 너무 심하게 울어 둘다 깨어있었다. 수유를 시작했고 남편은 이렇게는 안되겠다며 검색을 시작했다. 검색 끝에 찾은 것은 어떤 해결책이 아니라 4개월차 아이들의 원더윅스였다.

 

  그 밤에 내가 이해한 바는 이렇다. 아이는 4개월차가 되면서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꽤 많은 것들을 할 수 있게 된다. 뒤집기를 할 수 있게 되고 손을 쓸 수 있게 된다. 그렇게 폭풍 성장을 하며 독립적인 자기자신을 인식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엄마랑 연결된 자신이 아니라 독립된 하나의 개체로서의 자신을. 세상에 덩그러니 나와있는 자신을. 갑자기 무서워진단다. 그래서 엄마가 눈앞에서 없어지면 울고 엄마 품에 좀더 안겨있고 싶고 새벽에도 엄마 젖을 더 먹고싶어진다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그랬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것이다. 아, 그렇구나. 그랬었구나. 왜 이리 안 자냐고 푸념을 하던 초보 엄마아빠는 급반성모드에 들어갔다. 우리 지안이가 무서웠구나. 엄마아빠가 몰랐구나. 이제 더 많이 안아줄게. 밥 많이 먹어, 우리 아가. (하지만 다음날 새벽에 어김없이 두 번을 깨고 금방 다시 푸념모드로 돌아갔다. 흑흑- 인간이여.)

 

  아이가 어제는 새벽 4시까지 한번도 깨지 않고 잤다. 사실 나는 2시쯤에 화장실이 가고 싶어 잠이 깼는데 시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볼일을 보고 돌아와 남편을 깨워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지만 혹여 우리가 이야기하는 소리에 애가 깰까봐 그냥 잤다. 새벽 4시에 먼저 깬 남편은 흥분상태로 말했다. "혹시 중간에 지안이 깼어!? 아니야!? 지금 몇 신줄 알아!? 무려 4시라고!!" 나는 중간에 나만 깬 이야기를 하고팠는데 너무 졸려 수유하지 말고 좀더 재우달라 부탁하고 다시 잠들었다. 여섯시간을 연이어 자니 살 것 같았다. 주말에는 막내동생네가 왔는데 집에 있는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왔다. 오늘아침, 막내가 가져온 베이글, 치즈, 잠봉햄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먹고 소윤이가 선물해준 어머니 머그컵을 찬장 깊숙한 데서 꺼냈다. 남편은 출근을 하고 아이는 아침 수유 뒤 잠시 놀다 자기 시작했다. 아, 좋구나. 오래오래 자거라. 책도 읽었다. 이런 문장들이 있었다.

 

- (...) 자정 넘은 시각, 눈이 쌓이고 집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취했고 춥고 내일은 지각을 할 거 같고 여전히 일이 많고 여전히 하기 싫지만 참 즐거운 밤이었다. - 139쪽

 

- (...) 그럴 줄 알았지만 공동 거주는 참 즐거웠다. 회사가 중심이 되는 삶에서 집이 중심이 되는 삶으로 내 중심이 옮겨지는 것이 좋았다. 퇴근하면 씻고 이거 저거 좀 보다가 자는 집의 생활에서 퇴근 뒤에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많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 좋았다. 요리도, 대화도, 뜨개질도, 음주도, 무엇이라도 집에서 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 140쪽

 

  오늘밤도 기대해봐도 될까. 앞으로 2시간 남았다! 얼른 누워야지. 요즘 아이는 귀를 만진다. 한 쪽 손을 옆으로 뻗어 자기 귀를 만진다. 처음엔 엄정화 몰라 포즈여서 어디가 아픈가 생각했는데 유심히 들여다보니 자신의 귀를 만지는 거였다. 손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몸 이곳저곳을 탐색하다 귀까지 간 것이다. 엇 여기 뭔가 튀어나온 게 있는데. 말랑말랑하고. 이게 뭐지? 신기해하면서 계속 만져보는 것 같다. 귀여운 녀석. 계속 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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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도심 주택에 살아보니 집을 '산' 것은 동네를 '사는' 것이란 걸 깨닫는다. 집은 삶 그 자체이고 내 집이 위치한 동네는 브랜드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관계망이다. 구도심 작은 동네의 좁은 관계망이 어떨 땐 불편하기도 하고 어떨 땐 즐겁기도 하다. 불행히도 아파트에 살 때 내게 이웃은 얼굴 없는 층간소음의 장본인일 뿐이었다. 혹여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어색하고 불편한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야말로 같은 공간을 사는 이웃이 되었다. 집 앞에 낙엽이 뒹굴면 낙엽을 쓸고 눈이 오면 눈을 같이 치워야 한다. 좋건 싫건 나는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며, 우리 가족만 잘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자연스레 깨닫는다. 

- 10쪽

 

 

  단독주택은 남편의 소망이 되었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불만이 쇄도하는 아파트 주민들, 재활용 쓰레기를 제대로 버리지 않는 사람들, 무엇보다 층간소음이 힘들다고 한다. 입주하고 초기에 누가 걷는듯한 큰 소리의 층간소음이 있었다. 누군가 어디서 어디로 이동하는지 다 들리는 그런 소음이었다. 우리는 메모와 함께 슬리퍼를 윗집 문앞에 놓아두었고 윗집은 과일과 메모를 우리집 앞에 놓아두었다. 윗집은 자기네 소리가 아닐 거라며 집에 언제 주로 계시는지 궁금해서 이야기해보려고 왔는데 아무도 없어 메모를 남긴다고 했다. 윗집이 집에 있는 시간대는 우리와 비슷했다. 그 뒤 소음이 점차 줄어들더니 이제는 거의 나지 않는다. 아이가 크면 우리가 낼 소음도 걱정이다. 조심한다고 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소리가 있을 것이다. 내게도 단독주택에 대한 소망이 있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아보고 싶은. 지금의 아파트 생활에 큰 불만은 없어 그 소망은 조금 나이가 든 뒤에 이루어져도 좋을 것 같지만. (과연 이루어질 지가 문제지) 

 

  한수희 작가님의 인스타 팬이다. 작가님이 글과 사진을 올리면 찬찬히 읽어본다. 작가님 덕분에 동인천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내가 잘 읽어낸 것이 맞다면 동인천은 오래된 것과 그 오래된 것을 보존하려는 새로운 매력이 뒤섞인 곳 같다. 얼마 전에는 인천에서만 마실 수 있다는 인천맥주공장 사진도 봤다! 홋카이도에서 홋카이도에서만 마실 수 있는 맥주가 있어 얼마나 부러웠는데. 맥주를 마실 수 있게 되면 꼭 인천맥주를 마시러 인천에 가봐야지. 작가님은 동인천으로 이사를 한 뒤 그곳의 매력에 푹 빠져 마냥 좋은 산책길, 할머니도 혼자 먹으러 오는 돈까스집 등을 인스타에 올리며 자신이 이 동네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야기한다. 이 책도 작가님이 좋아하는 가게에서 술을 마시며 읽은 책이다. 자신의 산책길에 소박하고 예쁘고 품위있는 집이 있다고. 늘 그 집이 궁금했는데 그 집의 주인이 책을 썼다고. 동인천의 구도심에 오래된 단독주택을 고쳐 사는 한 부부의 이야기를 동인천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읽는 것이다. 멋지다, 생각하며 나도 책을 주문했고 동인천과는 거리가 꽤 있는 군포의 아파트에서 읽었다. 그곳을 상상하며.

 

  내가 사는 동네가 근사해질 수 있는 방법은 내 마음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저 낡은 것이라 치부되는 것에서 생애 보물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발 디딘 곳의 매력을 발견하고 그 매력에 뿌리를 내리고 물을 적절히 잘 줘 튼튼하게 성장시키는 마음. 그 마음을 두 사람에게서 읽었다. 이 책의 봉봉 작가님과 한수희 작가님. 

 

  내가 사는 동네는 위치가 애매하다. 역과 역 사이에 위치해 있다. 4호선 대야미역과 1호선 의왕역. 역세권이 아니여서 서울로 갈 때 아쉽지만 4호선도 1호선도 탈 수 있다. 크지 않은 자그마한 지구에 아파트가 5단지까지 있는데 예전에 허허벌판이었던 곳에 동네가 들어선 거라 상점들이 아직 많이 없다. 최근에 주상복합 오피스텔이 입주를 시작했고 속도는 더디지만 하나하나 상점들이 생기고 있다. 이번에는 어떤 상점이 오픈을 하나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얼마 전에는 분식점이 오픈을 했다. 조그마한 애기들이 엄마들과 함께 가게 앞 파라솔에 앉아 어묵을 먹고 있는 모습을 산책을 하다 봤다. 맛있는 왕겨 참숯 돼지 직화구이집이 있고, 좋아하는 빵집 체인점도 있다. 샌드위치집도 맛있는데 양상추가 어마어마하게 들어간다. 아이스라떼가 무척 고소해서 산책할 때마다 마시곤 한다. 새로생긴 파스타 집도 맛있다는데 조용하고 자그마한 곳이라 언제 가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우리 동네의 큰 장점은 바로 우리집. 우리집 창문 밖으로 보이는 숲이다. 산 이름이 구봉산인데 지도에서 찾아보면 145.3m라고 되어 있다. 그 산의 나무들이 고층의 우리집에서 선명하게 보인다. 바람이 많이 불 때는 나뭇잎이 쏴아하고 일제히 흔들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봄이 되어가는 속도, 한여름의 출렁거리는 소리, 가을이 여물어가는 빛깔도 보인다. 이 집에 처음 왔을 때 이 창밖 풍경 때문에 긴 출퇴근길을 견딜 수 있겠다 생각했었다. 이 집에서 언제까지 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는동안 이 집과 이 동네를 많이 좋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음이 있다면 그 다음 집도 그랬으면 좋겠고. 욕심보다 애정이 많은 사람으로 나이 들어갈 수 있기를 책의 집과 나의 집을 돌아보며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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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념일

from 모퉁이다방 2021. 9. 28. 00:17

 

 

  남편이 말했다. "우린 지금 살얼음판이야." 육아를 시작하고부터 우리에게 여러 인내의 순간들이 찾아왔다. 남편이 참는 경우, 내가 참는 경우, 둘다 어찌어찌 참고 넘어가는 경우, 둘다 정말 못참겠는 경우. 물론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로 인해 행복하고 충만한 순간이 더 많다. 어쩌다 이런 말까지 하게 되었는지 그 시작조차 생각나지 않는 살얼음판의 순간이 오면 정말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내가 이러려고, 로 시작하는 생각들. 남편도 그럴 것이다. 그 밤이 지나고 나면 (어떨 때는 밤이 지나기도 전에)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예민했었다 생각이 들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내가 세상에서 최고로 불행하고 힘든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말 육아는 녹록치 않다. 마음과 몸이 동시에 지치니 평소 같으면 지나쳤을 말 한마디로 살얼음판을 오르내린다. 얼마 전 영화 <보살핌의 정석>을 봤는데 이런 대사가 있었다. 만삭의 임산부가 묻는다. "부모가 되는 건 어떤 느낌이에요?" 사고로 아이를 잃은 아빠가 대답한다. "귀에 박히게 들었던 아이 얘기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진짜더군요." 정말이다. 진짜 그렇더라. 그동안 우리는 정말 해맑은 신혼이었다.

 

  인내의 순간 중에 서로를 걱정하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순간들도 있다. 그런 순간들이 있기에 남편이 참는 경우, 내가 참는 경우, 둘다 어찌어찌 참고 넘어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팔월에 두번째 결혼기념일이 있었다. 첫번째 결혼기념일에는 부러 날짜를 맞춰 여행을 갔지만 올해는 둘다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결혼기념일 당일 아이를 안고 집안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달력을 보고 알았다. 헐,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었어, 라고 카톡을 보냈고 남편도 헐, 이라고 답장이 왔다. 그러고나서였나보다. 좋아하는 동네꽃집은 수요일마다 미니꽃다발을 오천원에 파는데 수량이 정해져 있다. 예약도 받는다. 이번주 꽃다발이 무엇인지, 예약은 얼마만큼 되었는지 게시물과 댓글을 보고 있는데 이상한 질문을 한 댓글이 보였다. <꽃다발 예약할 수 있을까요? 사장님이 알아서 예쁘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가격도 말 안하고 알아서 해달라니 이상한 사람이네, 그러고 넘어가려는데 아이디를 이상하게 읽어보고 싶어지는 거다. 전...용... 퇴근 즈음 아이와 유모차 산책을 하고 있었고 남편이 멀리서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왔다. 나는 어머머 왠 꽃다발이냐며 남편의 서프라이즈를 끝까지 지켜줬다. 

 

  어느 주말이었다. 남편은 거실에서 아이와 함께 있었고 나는 안방에서 티비를 켜고 <놀면 뭐하니>를 보고 있었다. 가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면 커피숍에 갈게, 나를 찾지마, 하고 안방에 들어간다. 물론 당연히 혼자만의 시간이 될 리 없지만 코로나 시대 한적한 숲세권 동네에 사는 내겐 이것이 최선인 것이다. 그 날 <놀면 뭐하니>는 느닷없이 생방송 뉴스를 진행하는 몰래카메라였는데 정준하 편이 너무 웃겨 정말 간만에 큰소리로 숨 넘어가게 웃었다. 눈물이 찔금 날 정도로 웃고 있으니 남편이 거실에서 달려오더니 아이가 자니 조용히 하라며 손가락을 입에 대고 쉿쉿쉿을 반복했다. 나는 그러고 싶은데 티비가 너무 웃겨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했다. 남편은 도대체 뭐길래 그러냐며 옆에 앉았다. 그리고 1분도 안돼 나보다 더 큰 소리로 숨 넘어갈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아이가 깨면 뭐 또 재우면 되지. 둘이 나란히 방바닥에 앉아 티비를 코앞에 두고 같은 마음이 되어 한참을 함께 웃은 순간. 육아로 너무 힘이 들 때면 그때를 생각한다. 남편도 많이 힘들겠지. 그래, 같이 힘을 내보자 하고. 꼬맹이는 추석 연휴가 지나자 혼자서 뒤집기 시작했다. 어제오늘 뒤집기 지옥이었다. 오늘 나는 저녁밥을 먹고 어김없이 커피숍에 들어갔고 남편이 아이와 놀아주다 급하게 나를 불렀다. 아이를 일으켜 세워 손으로 모빌 인형을 툭툭 치게 하자 아이가 자지러지게 웃었다. 까르르까르르- 그 웃음에 나도 남편도 함께 웃었다. 그래, 너도 세상 적응이 쉽지 않겠지. 우리 같이 힘을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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