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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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킬로그램의 삶서재를쌓다 2017. 12. 29. 00:22
요즘에는 집에 오면 물부터 끓인다. 최근 우리집에서 제일 열일하는 전기포트. 가을에 사둔 보이차가 바닥을 보인다. 뚜껑을 잃어버린 주전자 모양의 옥색 다기에 꽁꽁 뭉쳐진 보이찻잎을 넣고 뜨끈한 물을 붓는다. 첫물은 재빨리 따라 버리라던데, 적합한 시기를 모르겠다. 어떤 날은 따라 버리고, 어떤 날은 찻잎에 묻은 먼지 따위, 하면서 그대로 우려 마신다. 우려내는 찻물이 투명해질 정도로 옅어지면 비로소 안심이 된다. 오늘치의 물을 마셨다고. 덕분에 화장실을 자주 가지만, 가벼운 것이 들어가고 가벼운 것이 빠져나간다는 생각에 즐거운 마음이다. 다만 차의 카페인 때문인지 10시에 잠들었던 취침 시간이 갈수록 늦어지고 있다. 막내는 가을부터 연애를 시작했는데, 우리가 '아프리카'라고 부르는 남자아이가 벌써 두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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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와 독일할머니모퉁이다방 2017. 12. 26. 23:06
연휴 이틀 동안 XTM에서 을 연속방송해줬다. 일요일에 우연히 발견하고 종일 보고 있었다. 케이블이라 광고가 길어서 광고 할 동안 마트에 다녀오거나 설거지를 하거나 했다. 다시 봐도 좋더라. 오해영이 잔디밭에 가만히 앉아 울적한 마음을 지워보려 애쓰는 장면. 해영이는 주문을 왼다. "마음이 울적할 때는 행복한 것을 떠올려보아요." 에릭이 여자 혼자 사는 티 내지 말라며 현관 앞에 자신의 커다란 구두를 무심하게 가져다 놓던 어떤 밤의 기억. 오늘 나는 오해영의 주문을 생각해냈다. 마음이 울적할 때는 행복한 것을 떠올려보아요. 커다란 구두 같은 로맨틱한 기억은 최근에 없으므로, 어제 오후 친구와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 오후를 떠올렸다. 우리는 이대역에서 만났다. 반대 방향으로 타는 바람에 걸어가도 충분한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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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국모퉁이다방 2017. 12. 23. 23:01
동생이 끓여준 미역국이 끝이 보였다. 갑자기 명절 때 먹는 탕국이 생각났다. 레시피를 찾아보려고 검색해보니 탕국이 경상도 음식이었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명절 음식은 해물이 가득 들어간 탕국이랑 야들야들하게 익혀 적당한 두께로 자른 문어. 문어는 초고추장에 찍어 먹는 것보다 소금이 들어간 참기름장에 먹는 걸 좋아한다. 엄마한테 레시피를 물으니 소고기도 들어가네. 엄마가 알려준 레시피에서 소고기는 뺐다. 멸치와 다시다 국물을 낸 뒤에 마트에 다녀왔다. 해물을 듬뿍 넣고 싶어 홍합살과 새우살과 바지락살, 굴을 사고 알래스카산 말린 황태도 샀다. 내일 먹으려고 두부도 사고, 아몬드도 샀다. 계란도 떨어져 6개 대란 한 통을 샀다. 다코야끼볼 과자를 사려다가 오늘 사둔 통밀 스콘이 있으니 참았다. 집에 와 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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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모퉁이다방 2017. 12. 22. 07:54
닷새동안 침대 두 개가 들어가고 조금 남을 만치의 공간을 온전히 가졌다. 침대는 하나였고, 앞과 옆으로는 커튼이 쳐져 있었다. 침대에 앉아 오른쪽의 커튼을 치면 창문이었다. 창가에 손에 자주 닿는 물건들을 놓아두고 썼다. 수첩과 펜, 책과 립밤, 휴지와 이어폰, 엽서와 물통. 첫 날은 동생이 함께 왔고, 다음 날에 동생과 엄마가 왔다. 다음 날에는 친구들이 와주었다. 그 다음 날엔 혼자였다. 밤에 동생이 퇴근을 하고 와 무거운 짐을 가지고 가줬다. 마지막 날엔 아침밥을 먹고, 책을 읽다가, 옷을 갈아입고, 원무과에 가서 정산을 하고, 퇴원증을 간호사에게 건네주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지난 두어달 겁이 났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결정을 하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도 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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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행극장에가다 2017. 12. 17. 09:14
지난주는 유난히 추워서 고민을 했었다. 영화가 끝나고는 추위를 뚫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은 7년을 사귄, 동거를 하고 있는 남녀가 각자의 집으로 '함께' 가는 이야기이다. 여자의 집에 가는 남자는 익숙하다. 여자의 집은 부동산 투자에 열성인 어머니 때문에 잦은 이사를 하고 있다. 이번에는 새로운 집으로 간 거지만 남자는 여자의 부모님을 대하는 게 익숙해보인다. 부모님은 돈도 직장도 아직 불안한 두 사람을 걱정한다. 여자는 자신들을 닥달하고 자랑스러워 하지 않는 엄마가 짜증나고 서럽다. 여자는 남자의 집에 처음 간다. 남자는 자신의 집을 여자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는데, 아버지의 환갑을 맞아 함께 속초로 가게 된다. 여자는 술에 취해 욕설을 내뱉는 남자의 아버지, 견딜 수 없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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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가을모퉁이다방 2017. 12. 16. 22:10
가을의 사진들을 모아놓고 보니, 죄다 먹고 마신 사진들이구나. 나는 먹고 마실 때 가장 행복한가 보다. 2017년 가을도 수고했다아. 요즘 맥주를 전혀 마시고 있지 않는 상태에서 지난 가을 맥주 사진들을 보니 뭔가 만감이 교차하네. 맥주를 마시지 않는 나날들은 생각보다 괜찮다. 마시지 않는 날들이 꽤 되니, 생각이 아예 나질 않는데, 그럼에도 술모임에는 꼬박꼬박 참석하고 있다. 무알콜 맥주를 사들고. 사람들이 저마다의 속도로 적당하게 취해가는 걸 보는 게 꽤 좋다. 이 가을의 끝에 내게 온 일. 소윤이는 짧은 서울행에 잠깐 시간을 내 보자고 했다. 이 속 깊은 어린 친구는 내가 더 걱정할까봐 의연하고도 단단하게 다 잘 될 거라고, 언니는 더 튼튼해질 거라고 얘기해줬다. 내 얘길 듣고 고심해서 고른 게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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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월모퉁이다방 2017. 12. 12. 04:29
일요일에는 사당역에서 고기를 먹었다. 고기 좋아하세요? 라고 묻더니, 10분이나 늦게 나타났다. 5층인 줄 알았던 4층의 고깃집은 분위기가 꽤나 좋았다. 고가도로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레스토랑에서 일한 경험이 있다던 그가 고기를 잘 구울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서 다 구워져 내 앞접시에 올려지는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이건 좀 부담스러운 것 같아요. 그러면 불판 위에 올려놓을테니 집어 가라고 했다. 이번 가을과 겨울에는 왠일인지 주변 사람들이 자꾸 사람을 소개해줬다. 위안이 되는 사람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터라 소개해주면 무조건 만난다고 했다. 한 번 만난 사람도 있고, 두 번 만난 사람도 있다. 그는 세 번 만난 사람이었다. 나는 내가 좀 담백한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알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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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선셋모퉁이다방 2017. 12. 6. 22:00
지난 주의 일. 연차였고,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다. 충무로의 병원에 갔다가 광화문까지 걸었다. 든든한 걸 먹고 싶어 광화문 국밥에 갔다. 깔끔하게 맛나더라. 좋아하는 오짓어 젓갈도 반찬으로 나왔다. 바 자리에 앉아 그릇을 싹싹 비웠다. 영화를 바로 볼까 커피를 한 잔 마실까 고민하다가 테라로사에 갔다. 그 전주에 친구랑 처음 갔는데 엄청 맛있는 머핀을 발견했거든. 그날 친구는 십년도 더 된 일을 말하면서 그때의 생각들을 후회한다고 했다. 그때는 나와는 먼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 시간이 지나 친구에게도 찾아왔다고. 그때 그 일이 내 일이 아니여서 정말 다행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던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좋은 사람인 거라고 말해줬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그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