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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 내 꿈의 서점, 팝앤북서재를쌓다 2008. 4. 26. 14:54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제레미 머서 지음, 조동섭 옮김/시공사
이름은 팝앤북. 북앤팝보다 왠지 더 부르기 편한 것 같다. 3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그리 크지도 그리 작지도 않은 너비에 1층은 서점. 이야기가 있는 소설만 파는 서점이다. 나무로 된 책장들 사이사이 나무 의자가 놓여져 있다. 책을 살 수도 있고,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책의 배열은 작가별로. 영화 <댄 인 러브>에서 보았던 것처럼 손으로 쓰거나 글자를 오려붙인 친근한 팻말의 작가 이름이 책장 사이사이 붙여져 있다. 훌륭한 책의 표지들이 영화 포스터처럼 벽 사이에, 책장 사이에 무심한듯 멋드러지게 붙여져 있다. 2층은 음반가게. 말랑말랑한 팝 위주의. 영화 <비포 선라이즈>처럼 사랑의 눈빛을 훔쳐볼 수 있는 공간이 있는. 역시 나무로만 이뤄진 테이블에 나무 의자가 놓여져 있다. 음악을 살 수도 있고, 음악을 들을 수도 있다. 3층은 커피와 술을 파는 카페. 역시 나무로 이뤄진 테이블과 의자가 있다. 영화 <카모메 식당>처럼. 책을 사고 음반을 산 사람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갈 수 있는 공간. 책을 사지 않고 음반을 사지 않은 사람도 행복해질 수 있는 공간. 3층에선 간간히 작가의 낭독회나 뮤지션의 어쿠스틱 무대가 펼쳐진다. 옥상은 흡연을 할 수 있는 또 다른 카페. 난간마다 계절의 꽃이 만발하고 밤이면 촘촘한 별을 볼 수 있는 곳. 건물 전체에는 2층에서 엄선한 음악들이 하루종일 울려퍼지고, 3층엔 촌스럽게도 주크박스가 있다. 언제든 누군가 동전을 넣으면 오래된 노래가 흘러나온다. 건물 전체에 흐르는 노래는 멈추고 그 오래된 노래가 3층, 아니 옥상까지 로맨틱하게 울려퍼진다.
<시간이 멈춰진 파리의 고서점>을 읽으며 이 꿈의 건물을 끊임없이 상상했다. 심지어 팝앤북의 종이봉투와 테이크 아웃용 컵의 디자인까지 생각했다. 1층에서 책을 한 권 사고, 3층으로 올라가 2층에서 틀어주는 음악을 들으면 생맥주 한 잔을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는 정말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기까지 했다. 다이어리에는 말도 안 되는 그림을 그리며 북앤팝의 설계도를 완성했다. 작가들이 이 공간을 너무나 좋아해 팝앤북에 가면 언제든 작가와 뮤지션을 만날 수 있다는 소문이 나는 상상을 했다. 이런 생각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니 나도 참.
예스24에서 자신의 책장에서 가장 오래된 고서적에 대한 이야기를 댓글로 달면 <시간이 멈춰진 파리의 고서점>을 선물해주는 이벤트에서 당첨됐다. 나는 내 책장에서 가장 오래된 책, 1981년에 민성사에서 출간된 <잠재력의 기적>에 대한 짧은 댓글을 달았다. 세로로 씌여진, 이제는 누렇게 바랜 책. 내가 태어난 다음해에 출간된 것을 아빠는 어느 해엔가 구입했다. 뒤의 몇 장은 벌써 떨어져나갔다. 아빠는 언젠가 명절에 이 누렇고 오래된 책을 내 손에 쥐어주며 가져가서 한 꼭지씩 읽어보라고 했다. 잠재력이란 게 별 게 아니라고. 아빠는 그 순간 큰 딸의 숨어있는 잠재력이 하루 빨리 기적처럼 깨어나기를 바랬을텐데. 내 잠재력은 아직까지 깊은 곳에서 고이고이 잠들어있다. 요 녀석은 당최 깨어날 생각이 없는 게 분명하다.
그리하여 내게 온 책. 소설인 줄 알고 읽기 시작했는데 에세이였다. 실제로 파리에 '셰익스피어 & 컴퍼니'라는 믿을 수 없는 공간이 존재한단다. 오래된 파리의 영어서점이고, 영화 <비포선셋>에서 에단 호크가 낭독회를 하던 그 서점이 바로 이 곳이란다. 낡은 나무 책장에 오래된 영어 서적들이 즐비해있는 1층이 있고, 2,3층에는 이 서점의 주인인 조지의 허락을 받은 작가들이 공짜로 머물고 있다. 다소 더럽고 복잡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는 가난한 작가들에겐 천국과도 같은 곳이다. 이들은 아침에 서점을 함께 열고, 일주일에 한 번 깨끗이 서점 청소를 하고, 밤에 함께 문을 닫는 일만으로 이 곳에서 공짜로 잠을 잔다. 아, 글도 쓰고. 일주일에 한 번 홍차 파티와 팬케이크 아침을 얻어먹을 수 있다. 이 곳을 오가는 사람들이 많은 터라 파티도 여러 번 있다. 그러니 이 곳의 작가들은 식사를 해결할 식비만 마련한다면 천국과 같은 이 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사람이 사는 곳인지라 예기치 못한 시련과 문제들은 언제든 불어닥치긴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제레미 머서가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보낸 여러 날들을 기록한 책. 책을 읽으며 파리로부터 멀리 떨어진 서울에 있는 내가, 파리도 한번도 가 보지 못한 내가 제레미 머서와 함께 '셰익스피어 & 컴퍼니'에 들어가 여러 날을 함께 묶는 경험을 했다. 오래된 책들의 냄새가 가득한 센 강가의 작은 서점. 완벽한 공산주의를 꿈꾸는 서점의 주인 조지가 있고, 아일랜드에서 환상의 낭송회를 성공한 사이먼이 있고, 한밤 중 와인에 취해 오돌오돌 떨며 센강에서 이야기 시간을 가지는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곳. 책을 읽으며 이 곳에 반한 나는 그럴 거라 믿긴 했지만 이 곳이 계속해서 이 비현실적인 전통들을 이어나갔으면 하고 바랬다. 나도 언젠가 이 곳을 방문하고, 내 자식들도, 내 자식의 자식들도 이 곳을 방문할 수 있기를. 그래서 이 에세이의 마지막 장을 읽으며 정말 다행이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거쳐간 작가들의 짧은 자서전을 묶은 책을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곳에 머물려면 누구든 자신의 짧은 자서전을 조지에게 제출해야 한다. 그 자서전이 조지의 마음에 들어야만 이 곳에 머무를 수 있다. 만일 내가 조지에게 자서전을 써야한다면, 내 인생의 어떤 순간을 극적으로 써 낼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내 인생은 너무 극적인 구석이 없다. 난 이 곳에서 머무를 수 없을 게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