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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다림 - 기다림을 위한 기다림
    서재를쌓다 2008. 4. 1. 17:35
    기다림 
    하 진 지음, 김연수 옮김/시공사


       "매년 여름 쿵린은 수위와 이혼하기 위해 어춘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기다림>의 첫 문장이다. 하진의 <기다림>은 이 첫 문장으로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부모가 정해준 배필과 결혼해 도시에서 혼자 의사로 근무하고 있는 쿵린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고, 여름 휴가 때마다 이혼 하러 고향에 내려가지만 매번 실패하고 돌아오길 17년. 별거 생활을 한 지 18년이 되면 배우자 동의 없이도 이혼할 수도 있다는 그 기다림으로 버틴다. 영어로 소설을 쓰는 미국의 중국인 소설가 하진은 18년동안 지속된 어떤 기다긴 기다림을 간결한 문체로 덤덤하게 이어나간다. 지난 가을, 소설을 번역한 김연수 작가는 작가와의 만남 자리에서 <기다림>은 굉장히 '좋은' 소설이라고 말했다.
     
       무려 18년이다. 실제로 소설의 결말은 그보다 더 나아가긴 하지만. 소설의 인물들은 하진의 문장들처럼 억세지 않다. 순하다. 휴가 때마다 고향에 내려가지만 이혼하자는 말을 못 꺼내거나, 꺼내고도 법원까지 가서야 이혼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는 부인 수위의 말에 화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돌아오는 쿵린이나. 남편이 보내주는 돈을 아끼고 아껴가며 불평불만 한 마디없이 딸을 키우며 시부모 병치레를 도맡아 하고도 이혼을 하자는 남편의 말에 그러리라,고 수긍하고 마는 수위나. 휴가 때마다 이혼을 실패하고 돌아오는 린에게 잔뜩 화가 나지만 그의 사정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럴 수도 있겠다며, 이내 마음을 수그러뜨리며 내년에는 기필코 이혼하고 오리라 말하는 만나나 모두 바보스러울 정도로 둥글둥글하다. 긴 시간, 무언가를 기약없이 기다리는 사람의 마음이란 질퍽해지고 탁해지기 마련이건만 18년을 기다리는 쿵린과 만나는 짧은 소설의 문장들처럼 간결하고 명료하게 그 날을 기다린다.

       소설은 그저 흘러간다. 복잡한 사건없이. 그저 이혼을 하려는 사람과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는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하며 긴 기다림이 계속된다. 반복되는 1년, 1년을 함께 넘기며 나는 쿵린의 흰머리와 만나의 가슴앓이와 수위의 주름살을 마주했다. 그 순간부터 나는 이 소설의 진가를 알아차렸다. 이런 거였구나. 기다림이란 이런 거였지. 긴 세월이 흐르고 그들은 늙어갔다. 어느새 열정적인 마음은 무뎌졌고, 강인했던 확신은 내리는 눈만으로도 스르르 무너졌다. 내리는 눈 너머로 화목한 수위와 딸의 모습을 마주하고 쿵린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뭘 그렇게 간절히 기다려왔던 거지. 그는 그 기다림의 끝에서 선뜩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지도, 절망하게 뒤로 물러나지도 못한다. 18년의 기다림 끝에는 원하는 삶은 없었다. 내가 뭘 원해왔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는 울었다. 술을 마시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미안하오. 나를 용서하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보통 사람이 되고 싶었소.
     
       매년 간절히 기다리는 날짜들이 있다. 그 날에 나는 무얼할까. 누구를 만날까. 어떤 일들로 행복해질까. 기다림은 즐겁다. 뭐든지 상상할 수 있다. 행복한 나, 즐거운 너, 아름다운 풍경. 하지만 늘 그렇듯 현실은 상상보다 비루해져 버린다. 그것은 상상할 때 가장 빛나는 것이다. 쿵린은 말한다. "그건 기다림을 위한 기다림이었을 뿐이야." 소설의 결말부분을 눈을 비비며 새벽시간에 읽다가 가슴 속으로 무언가가 쿵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만은 생명력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린은 알 수 있었다." <기다림>의 마지막 문장이다. 아니, 또다른 기다림의 첫 문장인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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