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다 읽고 양장 위에 덮여진 파아란 표지를 빼냈다. 4면으로 접혀져 있었던 표지가 하나로 이어지면서 푸른 체실비치 풍경이 길다랗게 펼쳐졌다. 아니, 푸르다는 표현으로 부족하다. 뭐랄까. 아득해지는 빛깔이랄까.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표지를 펼쳐 보면 누구라도 마음이 아릴게 분명하다. 해가 거의 진 후, 바닷가에 홀로 서 있으면 이런 느낌일까. 서글프다는 말로도, 시리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아득하다는 말로도, 저리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저기 앞에 하늘하늘 걸어가는 여인. 플로렌스. 나는 에드워드 대신 그 뒷모습에 대고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부르고 단번에 달려가 말해주고 싶다. 당신 마음은 그게 아니잖아요. 에드워드 마음도 그게 아니예요. 이렇게 끝내고 평생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하지만 소설은 그렇게 끝났고, 훌륭한 결말이었다. 나는 또 이언 매큐언에게 빠져버렸다.
1960년의 영국을 상상해보자. 보수와 해방이 넘실대며 물결치던 시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한 여자가 있다. 락앤롤에 빠져있는 한 남자가 있다. 둘은 자라온 환경도, 좋아하는 것들도 다르지만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여자의 바이올린 연주에 열중하는 모습에 남자는 넋을 놓고, 남자는 여자에게 역사에서 중요하지 않다고 기록된 중요한 인물들에 관해 책을 쓰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다르기에 상대방이 가진 것에 더욱 매력을 느꼈던 두 사람은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 그리고 첫날밤. 결혼식 전까지 두 사람은 정절을 지킨 그들이 첫날밤을 치루면서 틀어져 서로 등을 돌리고 걸어간다.
지금까지 읽었던 이언 매큐언의 책들은 모두 그랬다. 심드렁하게 혹은 더디게 전개되다가 소설의 마지막 몇 장을 남겨두고 펑 터지는 거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뭔지 모르는 그것이 펑 터진다. 아, 라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오고 아득해진다. 가슴이 시려온다. 나는 그 느낌이 좋아 몇 번을 반복해서 결말을 읽었다. 아프지만 그래서 더 마음에 드는 결말. 사는 게 이런 거랍니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 잃게 되는 것들이 많지요, 당신도 알고 있잖아요, 라고 말하는 듯한. 왠지 이언 매큐언은 결말을 위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거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그의 결말들은 서늘하고 아득하다. 그는 서늘하게 쓰고, 읽는 독자들은 아득해진다. 그래서 좋다.
그의 심리 묘사는 지극히 사실적이다. 그래서 때론 치졸하고 이기적이고 이중적이다. 보기 싫다고 느껴지는 구석구석까지 훤히 내려다본다. 사랑이라 믿었던 일들이 순식간에 배신이란 감정들로 변모하는 어떤 순간. 그 전까진 모든 게 사랑이었지만, 그 이후론 모든 게 가식이 되어버리는 자기 합리. 그리고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래, 내 평생의 사랑은 그 때 그이뿐이였어, 라고 후회하는 자기 연민. 의도하지 않은 말을 무섭게 뱉어내어놓고는 마음이 말을 뱉어내는 게 아니라 말이 말을 뱉어내는 꼴이 되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자기 방어. 이 순간 그이를 잡지 않으려 영영 놓쳐버리고, 영영 후회하면 살 것을 알면서도 잡지 못하는 얕은 자존심. 평범한듯 평범하지 않게 일상의 심리들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덕분에 소설을 읽으며 여러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나도 이런 생각한 적 있었어. 비겁하고 치졸했지. 이런 식의 말 해서 엄청 후회했었지. 이기적이고 소심했지.
5장을 읽어내려가며 체실 비치를 상상했다. 실제로 신혼여행지로 많이 택하는 곳이라는데. 표지와 같이 해가 거의 진 서늘하고 푸른 바닷가.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 있는 풍경. 여자의 위치에서는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남자의 위치에서는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파도가 쏴아, 해변가에 부딪치며 사라지는 소리. 여자가 소리치고, 남자가 발로 해변가의 돌을 걷어차고. 여자가 남자를 지나서 걸어가고, 남자가 그 뒷모습을 잡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는 풍경. 더 크게 부딪치는 쏴아쏴아, 파도 소리. 완전히 어둠이 깔린 체실 비치. 언젠가 체실 비치에 가게 된다면 이들을 꼭 기억하리라. 플로렌스, 에드워드. 여자가 걸어가고 남자가 그걸 보고 서 있는 모습을 나는 남자 뒤에서 보리라. 세번째 줄 중앙의 C9 자리일지도 모른다. 파도처럼 아스러져 버린 그들의 첫날밤을 밀려오는 푸른 파도를 보며 떠올려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