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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랑한 밤길 - 낮게 거니는 비 내리는 밤길
    서재를쌓다 2008. 2. 13. 00:02
    명랑한 밤길
    공선옥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기어코 맥주 2병을 사왔다. 집에서 가져온 예쁜 팔각형 유리컵에 맥주를 좔좔좔 따르고 벌컥벌컥 마셨다. 달다.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한 뒤 책이 들어왔다는 문자를 받고 달려가 받아와놓고선 다른 책만 읽어댔다. 그러다 반납기간이 얼추 다가오는 것 같아 연장을 하려고 홈페이지에 들어갔는데 벌써 누군가 예약 신청을 해버린 바람에 연장이 안됐다. 연휴동안 내려가서 다 읽고 오자고 생각했는데 뒹굴거리기만 한 탓에 반납기간이 넘어서 읽기 시작했다. 누군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텐데. 염치없게도 3일을 더 가지고 있었다. 내일은 꼭 반납해야지.

       첫번째 단편, '꽃 진 자리'를 읽고선 맨 앞 장의 작가 사진을 유심히 봤다. 이름을 소리내어 읽었다. 공.선.옥. 두번째 단편, '영희는 언제 우는가'를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읽었다. 휴게소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는 동시에 글이 끝났다. 아득한 느낌. 세번째 단편 '도넛과 토마토'를 읽으면서 서울에 도착했다. 긴 연휴가 끝났다. 휴우. 네번째 단편 '아무도 모르는 가을'을 읽으면서 잠이 들었다. 서울의 밤은 고요하다. 작가의 대화체가 신기하다. 소리나는 것과 비슷한데 같지는 않다. '날 안아주세요오오옹'의 서글픈 메아리가 가슴을 둥둥 친다.

       다섯째 단편, '명랑한 밤길'은 화장실에서 일을 보면서 마저 읽었다. 이상하다. 작가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러보았던 것처럼 자꾸만 마음에 가는 글귀들을 소리내어 읽어보게 된다. '난 사장님, 돈 줘 소리 못하겠어, 사장 돈 없어, 몸 아파, 어머니 아파, 사장 슬퍼.' 이런 부분들. 여섯번째 단편 '빗속에서'를 읽으며 이 소설집에서 끊임없이 비가 내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비는 그냥 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처럼 감정을 싣고 떨어진다. 구슬프게. 갑자기 비가 그리워졌다. 일곱번째 단편, '언덕너머 눈구름'을 선 채로 읽었다. 여덟번째 단편, '비오는 달밤'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 순전히 추석을 혼자 지내는 아부지와의 통화 내용때문에. 비오는 밤에도 달은 뜬다.

       아홉번째 '79년의 아이'를 읽고 비지찌개를 끓여 먹었다. 비지가 담백하지 않고 비렸다. 뭐가 덜 들어간걸까. 아니면 더 들어간건가. 열번째 '지독한 우정'을 창가에서 읽었다. 엄마는 나를 악아,라고 부른다. 이게 무슨 뜻일까 싶었는데 마지막에 가서 나는 악아,를 입밖으로 소리내어 봤다. 이해가 됐다. 열한번째 '폐경 전야' 를 읽고 꼭 책이 끝나면 술을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이 올만큼 추운 날씨인데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열 두번째, '별이 총총한 언덕'을 읽고 갑자기 동태찌개가 먹고 싶어졌다. 비릿하고 얼큰한 생선찌개. 소설에 등장한 건 삼겹살과 딸긴데, 나는 왜 비릿한 것이 땡길까. 날씨 때문인가.

       마지막 장, 마흔 다섯의 공선옥이 쓴 작가의 말을 읽고 책을 덮었다. 그리고 다시 앞 장으로 넘겨 작가의 사진을 봤다. 작년에 대학로 어느 건물에서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 한 대목의 낭독 플래쉬를 본 적이 있다. 성우 목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작가가 직접 낭독한 것이었다. 작가의 목소리도 마음에 든다. 낭독을 듣고는 수첩 귀퉁이에 작가 이름과 제목을 적어뒀었다. 택시를 타고 담배를 피는 엄마를 기사가 욕한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다고. 그리고 마지막 문장. '기사의 욕도 얼굴에 맞는다. 나는 담배를 깊숙이, 양껏, 힘차게 빨아 당긴다.'    

       좋아하는 작가 목록에 공선옥을 올리고,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 전문을 찾아 읽어봐야지. 맥주 한 병에 알딸딸해지는 나는 언젠가 동네 골목길에서 만난 동남아시아쪽의 한 여자를 생각해냈다. 나이가 꽤 있어보이던 여자는 지나가는 나에게 휴대폰을 내밀며 문자 하나만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멈춰서서 내용을 부르라고 했고,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언니, 미안해요. 지금 술 한 잔 할 수 있어요?' 미안하다고 했는지 잘못했다고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여자의 표정에 다급함이 묻어났었다. 정말 미안해하는 표정. 정말 자기가 잘못했다고 하는 표정. 나는 핸드폰 자판을 누르면서 정말 여자가 언니에게 잘못을 했을까 생각했다. 여자는 나에게 이렇게 보내면 괜찮을까요, 라고 물었다. 그 때 한 한국 여자가 나타났고 그 동남 아시아 여자에게 아는 척을 했다. 여자는 그 한국 여자를 전혀 모르는 것 같았지만. 그래서 동남 아시아 여자는 언니와 만나 술 한 잔 했을까? 언니는 여자를 용서해줬을까?

       공선옥은 낮게 낮게 걸어간다. 비오는 낮길을, 비오는 밤길을 낮게 낮게. 나는 그녀가 퍽 마음에 든다.  



       <술 먹고 담배 피우는 엄마> 낭독 들을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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