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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6월, 북악산과 한강 2014.06.17
  2. 희랍어 시간 - 밑줄긋기 2012.01.08
  3. 바람이 분다, 가라 2 2010.03.31

6월, 북악산과 한강

from 여행을가다 2014. 6. 17.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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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문학동네


   한강의 소설은 시를 읽듯, 그렇게 읽게 된다. 지난해 십일월과 십이월에 천천히 읽어 나간 한강의 노래. 말을 잃어가는 한 여자와 눈을 잃어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그녀는 일기장 뒤쪽에 단어들을 적기 시작했다. 목적도, 맥락도 없이 그저 인상 깊다고 느낀 낱말들이었는데, 그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숲'이었다. 옛날의 탑을 닮은 조형적인 글자였다. ㅍ은 기단, ㅜ은 탑신, ㅅ은 탑의 상단. ㅅ-ㅜ-ㅍ이라고 발음할 때 먼저 입술이 오므라들고, 그 다음으로 바람이 천천히, 조심스럽게 새어나오는 느낌을 그녀는 좋아했다. 그리고는 닫히는 입술. 침묵으로 완성되는 말. 발음과 뜻, 형상이 모두 정적에 둘러싸인 그 단어에 이끌려 그녀는 썼다. 숲. 숲.
p.14


   나는 침묵했습니다. 대답을 기다리던 당신은 수첩을 덮어 도로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우리는 강물을 바라보았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허락된 것처럼.
p.36


   ...아침이면 그날 강독할 문장들을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며 암기하고, 세면대 위의 거울 속에 어렴풋하게 비쳐 있는 내 얼굴을 곰곰이 바라보고, 마음이 내킬 때마다 환한 골목과 거리를 한가롭게 걷습니다. 문득 눈이 시어 눈물이 흐를 때가 있는데, 단순히 생리적이었던 눈물이 어째서인지 멈추지 않을 때면 조용히 차도를 등지고 서서 그것이 지나가기를 기다립니다.
p.41


   시간이 더 흐르면...
   그의 목소리가 더 잦아든다.
   내가 볼 수 있는 건 오직 꿈에서뿐이겠지요.

    ...장미.
   수박을 반으로 가르면 활짝 꽃처럼 펼쳐지는 붉은 속.
   연등회 날 밤.
   눈송이들.
   옛 여자의 얼굴.
   그때는 꿈에서 깨어나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꿈에서 깨어나 세계가 감기는 거겠지요.
p.158-159


    소설은 두 사람이 어떤 교감을 하기 시작하면서 끝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한 여자와 한 남자, 각각의 이야기이다. 이 두 사람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어떤 이야기들이 아니라, 말을 잃어가는 세계를 살아가는 여자와 눈을 잃어가는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남자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이 만나게 되는 찰나의 이야기이다.

    십이월 밤. 집으로 오는 7호선의 지하철에서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서 너를 생각했다. 너도 이 소설을 읽었을지. 이번 겨울, 니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새 소설이 연이어 출간되었는데 너는 그걸 장바구니에 담아두었을지, 아니면 구입해 읽기 시작했을지, 아니면 다 읽은 후일지, 아니면 니 방의 내가 탐나했던 스탠드 옆에 아직 넘겨지지 않은 채 놓여져 있을지. 니가 나를 집으로 초대한 날, 먹었던 닭도리탕과 멸치호두조림과 맥주를 떠올렸다. 엽서들이 가득 붙여져 있던 니 방 벽과, 책들과 폭신폭신했던 침대를 떠올렸다. 그 날도 무척 추웠었는데. 네게 아주 긴 편지를 쓰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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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from 서재를쌓다 2010. 3. 31. 00:10



    한강이 봄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나를 불러 세운다. 잠깐만요. 여기 앉아볼래요? 이제부터 내가 아주 긴 노래를 들려줄게요. 나는 얕은 눈보라가 치는 미시령 절벽 위에 서 있다. 눈보라 때문에 앞이 보이질 않는다. 무릎을 안고 쪼그려 앉아본다. 까마득하다. 정확히 두 발만 더 내디디면... 그녀를, 그녀의 엄마를 만날 수 있다. 한강이 긴 노래를 끝낸 날, 어떤 이가 목을 맸다. 그이는 그 날 미시령 고개에 있었던 거다. 두 발 앞이 벼랑이었던 거다. 그이는 그 벼랑의 허공에서 그녀를 보았던 거다. 그녀가 손짓했겠지. 그이는 안심했던 거다. 그리고 발을 내밀었던 거다. 우리는 모두 미시령의 어느 절벽 위에 서 있다. 한강이 아주 긴 노래를 끝내고 떠나고, 나는 얕은 눈보라가 치는 절벽 위에 남았다. 절벽 위에 무릎을 세우고 가만히 앉아 있다. 눈보라가 서서히 잦아들고, 바람이 견딜만 해졌다. 한강은 떠났지만, 어디선가 그녀의 기타선율이 미시령의 바람에 머물고 있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가만히 앉아 있는다. 그리고 본다. 미시령에 봄이 찾아오는 것을. 눈이 멈추는 것을. 눈이 녹는 것을. 새싹이 돋는 것을. 꽃이 피는 것을. 그리고 바람이 부는 것을.


     한강의 새 소설을 읽었다. 아주 긴 노래였다. 헝겊 위에 퍼지는 별의 흔적처럼 마음이 먹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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