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우'에 해당되는 글 2건

  1. 베르테르 2015.12.21
  2. 맨 오브 라만차 2015.11.16

베르테르

from 무대를보다 2015. 12. 21. 23:19

 


 

 

   공연을 보고 찾아본 조승우의 인터뷰에 그런 말이 있었다. 사실은 13년 전처럼 베르테르라는 역할에 푹 빠져들 수가 없다고. 조승우는 13년 전, 실제로 깊은 짝사랑에 빠져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이 아팠다고 한다. 그는 정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었던 거다. 이번에는, '젊은'도 빠지고, '슬픔'도 빠졌다. 그냥 '베르테르'다. 항상 무대 위의 조승우를 보고 오면 범접할 수 없는 그의 성장에 설레이면서도 마음이 착찹해지기도 했다. 같은 80년 생이고, 오랫동안 지켜본 팬으로써, 그는 성큼성큼 나아가는데 나는 그대로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데 이번엔 공연을 보고 찾아본 그 인터뷰 기사 덕분에, 그와 나의 '다름'이 아니라 '같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래, 우리 같이 나이 먹어가고 있지.

 

   발하임은 아름다웠다. 그 전보다 저 아름다워져 있었다. 커다란 해바라기들이 우르르 무너져 버릴 때는 마음이 덜컹 했다. 달빛길도 예뻤고, 롯데의 온실도 아름다웠다. 그런데 10여 년 전, 처음 공연을 보고 마음이 먹먹해져서 베르테르가 너무 가엾어서 소리죽여 울었던 나는 이제 없더라. 롯데가 베르테르에게 떠나지도 말고, 머물지도 말고, 적당히 사랑해달라고 노래할 때는 저, 저, 나쁜 년, 롯데가 저렇게 나쁜 년이었다니, 배신감이 들었다. 베르테르가 결국 슬픔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신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을 때, 달려가 말해주고 싶었다. 괜찮아질 거라고, 세월이 지나면 이건 정말 아무 일도 아니라고, 이렇게 죽어버릴 일은 정말 아니라고. 지금 니가 얼마나 빛나는데, 니 젊음이 얼마나 아름다운데, 이렇게 저버리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라고, 진정으로 말리고 싶었다. 그래. 나도 이렇게 나이가 들어 버렸다. 알베르트가 제일 이해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렇지만, 여전히 설레였다. 그건 베르테르가 배우 조승우였기 때문에. 그의 세심한 작은 행동들이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슬쩍 롯데의 손을 잡으려다 용기를 더 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던 풋풋한 모습이라든지, 자신을 봐 달라고 노래할 때 무릎을 조금 낮춰 키를 낮추고 얼굴을 마주보려고 애쓰는 애절한 모습이라든지. 자신의 사랑이 결국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걸 완전히 깨달고 부르는 노래에는 목소리 톤 자체에 찢어질 듯한 아픔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었다. 어디까지 갈까 궁금한 배우. 바라던, 베르테르가 된 조승우를 볼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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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오브 라만차

from 무대를보다 2015. 11. 16. 23:16

 

 

 

    10월의 연휴에 돈 키호테를 만나러 갔다. 그는 여전히 황량한 라만차를 떠돌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는 어김없이 사랑에 빠졌다. 허름한 여관에서 '알돈자'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자를 만났다. 돈 키호테는 노래했다. 당신은 '둘시네아'라고. '둘시네아'는 스페인어로 '사랑스러운 여인', '귀여운 여인'. 알돈자는 그를 무시했다. 이 망할 놈의 영감탱이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화를 냈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몸을 팔고 허드렛일을 하며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는 자신은 알돈자라고. 하지만 돈 키호테는 계속해서 노래했다. 그에겐 이 허름한 여관이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는 고귀한 성이었고, 촐싹대는 여관주인은 자신에게 기사 작위를 내려줄 고마운 성주였고, 모두가 한번 하고 싶은 헤픈 여자 알돈자는 자신의 사랑스러운 여인 둘시네아였다. 그는 세상을 세상 그대로 보지 않고 '둘시네아'로 보았다. '둘시네아'의 또 다른 뜻, '이상적인 포부', '환상적인 큰 뜻'. 그의 세상은 절망적이지 않았다. 희망찼다. 뭐든지 할 수 있고, 뭐든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둘시네아'니까.

 

   <돈 키호테>는 여전히 내게 어렵다. <맨 오브 라만차>도 그렇다. 조승우가 이 극 때문에 배우가 되길 결심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떤 극인지 너무 궁금해 아주 추운 겨울 날, 높은 언덕 위에 있는 학교에 가 학생들이 하는 공연을 봤다. 그렇게 처음으로 공연을 보았을 때에도, 한창 뮤지컬에 빠져 있을 때 Y언니와 공연을 보고 씨디를 사서 가사를 달달 외울 정도로 열심히 넘버들을 들었을 때에도, 사실 이 이야기를 잘 이해하질 못했다. 그저 아름다운 선율의 극이라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그랬다. 극이 후반을 향해가고 있는데도 잘 모르겠더라. 그래서 알아내기 위해서! 돈 키호테의 행동 하나하나에, 대사 하나하나에서 의미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니 극이 더 어려워졌다. 더 모르겠더라. 조승우만 잘하더라. 그런데 극이 끝나갈 무렵 알돈자가 죽어가고 있는 돈 키호테를 찾아왔을 때, 울먹이며 돈 키호테 곁에서 노래할 때, 이 이야기가 한 순간 이해가 됐다. 이건 한 사람과 한 사람의 이야기구나. 이 넓은 세상에서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찾았고, 보았다. 그 사람이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 얼마나 아름답고 빛나는지. 한 사람은 몰랐다. 자신이 그런 존재인지. 한 사람이 한 사람에게 계속 말해줬다. 노래해줬다. 당신은 '둘시네아'라고. 자기 자신을 무시하고 깍아 내기만 했던 한 사람은 한 사람의 말을 개소리라고, 꺼져버리라고 고함쳤지만 사실은 기뻤다. 사실은 자신도 소중한 사람이고 싶었던 거다. 누군가 알아봐주길 바랬던 거다. 자신도 몰랐지만 그랬던 거다. 한 사람은 계속 노래했고. 한 사람은 모른 척 했다. 한 사람이 떠났고, 한 사람은 마침내 깨달았다. 자신이 빛나는 사람이라는 걸. 알돈자는 죽어가는 돈키호테를 찾아가 울면서 노래한다. 그래요, 내가 둘시네아예요. 당신의, 그리고 나의, 둘시네아예요.

 

    2015년 10월, 내가 이해한 라만차의 이야기는 이거다. 우리는 모두 '둘시네아'라는 것. 그러니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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