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는 캄보디아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앙코르와트를 걷고 또 걸었다고 했다. 거길 다녀오니, 어딘가로 또 떠나고 싶어진다고 했다. 그날 밤, 우리는 여행 책을 샀다. 김남희의 책이다. <일본의 걷고 싶은 길> 1권. 사진이 너무 많아 실망했지만, 사진이 많아서 좋기도 했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연두빛 나뭇잎들이 글과 글 사이에 놓여 있다. 나무들이, 산들이, 고즈넉한 일본의 거리가 글과 글 사이에 놓여 있다.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매일 밤 퇴근하면서 이 책을 읽었다. 김남희를 따라 그 길을 걸었다. 내가 늘 가고 싶어했던 일본 북쪽의 마을들. 김남희는 내가 하고 싶어했던 노천 온천을 원없이 했더라. 하루종일 걷다, 예약해둔 숙소에 들러 생선 반찬에 된장국의 소박한 저녁밥을 먹고, 온천을 하고, 잠이 드는 그런 여행. 난 항상 겨울의 홋카이도를 생각했는데, 봄과 여름의 카이도도 근사하더라. 언젠가 나도 그런 여행할 수 있겠지?




    그 밤, 이런 잡지도 샀다. 도보여행가 김남희씨가 아닌, 뼛속까지 영화인 김남희 언니가 추천해 준 잡지. 월간지고, 한 달에 한 번씩 여행을 떠날 도시를 선정한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장소들, 풍경들, 사람들을 소개해 준다. 지난 달부터 사 보기 시작했는데, 이번 달은 한국의 도시다. 담양. 이번 호를 보면 담양에 가서 얼마나 멋진 나무들을 볼 수 있는지, 얼마나 맛있는 남도 음식들을 먹을 수 있는지, 또 얼마나 근사한 숙소들이 있는지 알 수 있다. 느긋하고 편안한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 근사한 대나무 숲도, 입이 쩍 벌어지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도 만날 수 있단다. 여행 책이 있고, 여행 잡지가 있어 다행인 무더운 여름밤. 꿈꿀 수 있어 다행이다. 



   <다카페 일기>가 반값 할인 중이다. 신나서 구입. 내가 아끼는 책이다. 소심한 아빠가 오랜 시간을 두고 쓴 사진일기. 아내가 등장하고, 딸아이가 등장하고, 새로 태어난 남자아이가 등장한다. 천연덕스럽게 귀여운 와쿠친도 빼놓을 수 없지. 첫 장에서 마지막 장까지 봄이 되었다가, 여름이 되었다가, 가을이 되었다가, 겨울이 되었다가. 1살이 되었다가, 2살이 되었다가, 3살이 되었다가.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마지막 장을 넘겼는데 왠지 마음이 찡했다. 아, 이렇게 시간이 흐르구나. 나이를 먹는 구나. 그걸 내가 이렇게 지켜 보고 있구나. 좋은 책이다. 건조한 한 줄의 메세지와 지극히 사적인 사진이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니. 놀라운 책이다. 2권은 좀 천천히 구입하려고. 다카페 가족들의 시간을 맞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한 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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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 2008년 봄호
문학동네 편집부 엮음/문학동네

 
    Foot,이 아니라 풋,이다. 풋사과할 때 풋. 풋사랑할 때 풋. 풋풋하다할 때 풋. 빠알갛게 여물기 전 단단한 연두빛의 아삭한 접두사. 더 열심히 물을 빨고, 햇살을 쬐면 먹음직스럽고 탐스럽게 영글 글자. 풋,하고 웃는 수줍은 소리. 그 풋,이다.

   그러니 내가 이 따스한 봄에 연두빛 청소년 잡지 풋,을 만난건 당연한 일이다. <풋,>을 산 건 김연수 작가의 새 연재물 때문이다. 늘 그렇듯 김연수 작가의 글은 따스했다. '원더보이'라는 놀라운 초능력을 가진 소년의 이야기다. 소년은 소설의 첫번째 이야기에서 아버지를 잃고 초능력을 얻었다. 그리고 첫번째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소년은 창 밖의 내리는 눈을 마주한다. 

   눈을 묘사한 마지막 장을 읽고서 나도 모르게 아, 탄성이 나왔다. 또 이렇게 따스한 이야기구나. 이 작가는 어떻게 이런 감수성을 지녔을까. 중심을 잃지 않으며 그가 내어놓는 따스한 감수성 어린 묘사의 나열. 시를 썼던 이라 그런걸까. 그런 거라면 나도 시를 쓰고 싶다. 어떤 부분은 예전에 읽었던 조너선 사프란 모어 소설과 닮은 구석이 있다. '아빠죽지마'가 49번 반복되는 문단이 있다. 소년은 진정으로 아빠가 죽지마기를 49번 바라는 것이다. 먹먹해진다. 따스하고 아름다운 스노우볼을 한 손에 들고 이리저리 흔들어 내려놓곤 그걸 가만히 바라보는 느낌이다. '원더보이'는.


   <풋,>의 여러 글들을 읽어내려가며 나는 고동색 교복을 입은 단발머리 여고시절로 돌아가고 싶었다. 초록색 교복을 입은 커트머리 여중시절이면 더 좋겠고. 그 때로 돌아가 북적대는 교실 안, 작은 나무 책상 위에서나 내 방 침대 위에서 좋아하는 테잎을 틀어놓고 이 꿈꿀 수 있게 만드는 잡지를 읽고 싶어졌다. 앞자리에 1을 단 나이인 채로 잡지 속에 소개된 책들을 찾아 읽고 싶어졌다. 스티비 원더의 음악을 듣고, 만화책을 열심히 모으고, 18세 금지 영화도 몰래 찾아가 보고, 튕튕거리며 기타도 배워보고 싶어졌다. 내가 그랬던 것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은 글을 끄적거려보고 싶어졌다.  

   그러니 이건 스물아홉이 열아홉의 나에게 하는 풋,스런 이야기다. 스물아홉이 열아홉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건 니가 아니라고 읊조려 보라고. 가장 행복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보라고. 힘들 땐 책과 음악, 영화를 끝없이 찾아보라고. 세계 지도를 붙여두고 그 곳을 디딜 상상을 해 보라고. 친구와 나란히 서 자판기 커피를 빼어 먹으며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보라고. 그리고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기억해두라고. 그 시간의 설렘을 만끽하라고. 스물아홉이 열아홉에게 말한다. 이 책을 읽을 바로 지금 싱그러운 너희들의 시간이 부럽다고. 너희의 앞자리 1의 나이가 그립다고. 그렇기에 가질 수 있는 연두빛 단단한 너희들 꿈이 부럽다고. 벌써부터 이렇게 글을 써대는 그 자체로 질투가 난다고. 서툴지만 상콤하다고. 너희들 글이 싱그럽고 솔직하다고.

    좋은 글이 많다. 여름호도 가을호도 기다려야지. 윤대녕 작가의 글엔 가슴이 뛰었다. 만해마을을 소개하는 글에도. 아, 그 곳에 가보고 싶어라. 이 잡지에서 제일 좋았던 건 센스있는 두 줄짜리 작가 소개글들이었다. 어떤 소개글은 너무 좋아 다섯번씩 읽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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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요일, 황석영 작가님의 강연회에 갔다가 'SKOOB'이라는 잡지를 받아왔다. 그냥 받아서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오늘 집에서 뒤적거리다가 읽었는데 잡지가 꽤 괜찮은 거 같다. BOOKS를 거꾸로 뒤집은 말이라고 하는데, 세 인터넷 서점의 VIP회원에게 책 주문을 할 때마다 제공되는 잡지라고 한다. 따로 받아보려면 연회비를 따로 내야 된다고 하고.
  
   내가 받은 건 3호였는데, 황석영과 장정일, 이현세의 인터뷰에서부터 공지영의 연재소설과 신간소개 등 읽을만한 것들이 많았다. 민망하지만 이런 잡지는 화장실에서 시간을 조금 오래보낼 때 한토막씩 읽으면 정말 좋다. 가장 집중이 되는 시간에,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글을 읽으면서 기억해두는거다. 생각보다 그 시간의 독서는 오래 남는다.

   4호를 보니깐 신경숙 인터뷰를 비롯해서 읽고 싶은 기사들이 많았는데, 세 인터넷 서점의 VIP도 아닌 나는 이 얇지만 알찬 비매 잡지를 어떻게 구해봐야하는건지. 연회비는 조금 부담되는데.

  아무튼 3호를 읽으면서 여러 기사들에서 읽고 싶은 책들을 메모했다. 요즘 책과 나름 사랑에 빠진 나, 무궁무진한 책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구.


- 여름 인상에 대한 겨울 기록 / 도스토예프스키
- 두 도시 이야기 / 찰스 디킨스 
- 몰개월의 새 / 황석영
- 책의 자서전 / 안드레아 케르베이커
- 광기와 천재 / 고명섭
- 오늘의 거짓말 / 정이현
- 지중해 철학기행 / 클라우스 헬트
- 그리스 로마 철학기행 / 클라우스 헬트
- 산해경
- 설마 있을까 싶은 기이한 동물 추적기 / 만프레트 라이츠
- 스톤 다이어리 / 캐롤 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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